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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회자 전인 치유과정

양정식 2014. 12. 1. 07:18

1. 전인치유란 무엇인가?(마 8:16-17)

 

이 치유 과정을 만나게 된 나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다(믿음으로 선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잘못을 고쳐 주시며 치유해 주시기 때문이다. (욥5:17-21)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1:1-11(눅 4:18)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주로 5가지로 말씀을 하시고 있다. ① 성령을 받으실 것 ② 복음을 전하실 것 ③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실 것 ④ 병을 고치실 것 ⑤ 축복을 회복하실 것 등이다.

(출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눅 4:18-19. 사61:1-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 치유란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으로는 고칠 수 없는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환경적 질병이나 모든 허약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치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더욱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 질병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에 대한 사탄의 도전이요, 침입이며, 대적을 한 것이다. 사탄의 전략은 인간을 죄를 짓도록 하여(요일 3:8) 영생으로부터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요 10:10). 그래서 그리스도는 전인 치유를 통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 이 땅에 오셨으며(요일 3:8), 치유를 통하여 모든 고난을 종식시키는 것을 입증하며(계 21:4),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의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며(요일 3:8), 사탄의 최종적인 패배를 나타내는 것이다.

3) 치유는 하나님의 뜻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의 하나이다. 그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사도들에게 전승을 하셨고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전승하고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신비주의 및 사이비 이단에 의해 말씀에서 벗어난 비기독교적이거나 샤만이즘적인 치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가 하면, 아예 치유 사역을 도외시하는 부류가 있어, 치유 사역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이고 구원사적이며, 교회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학적으로도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목회와 신학에서도 제 위치를 굳히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에서 하는 치유 사역은 성경적이며 성령의 역사이며 복음적이며 신학적인 증명이다. 치유 사역은 한 영혼이 죄악된 세상에 빠져서 향락과 부패와 질병으로 고생을 하며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로 신분이 바꾸어지도록 돕는 주의 능력의 사역<눅 5:17>이다.

4) 치유는 성경 전체의 거대한 한 흐름이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으로 성경에 할애가 되어 있는데 바로 죄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통하여 자유함을 누리고 영성회복을 통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성장되어 지도록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백성들을 돌보고 치유하도록 적극적으로 돌보시며 일하시는 많은 사역들이 기록되어 있다.

5)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치유를 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겔 34:4,5,21>,<마 25:42-45> 말씀을 통하여 엄하게 책망을 하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며<겔 34:14-15>, 이일을 위해 그리스도를 목자로 세우겠다고 하셨으며<겔 34:23>, 이사야를 통해 치유<사 53:4-5>와 회복<사 61:1-2>을 강조하시고, 누가는 그 말씀이 실현된 것을 증거 했으며<눅 4:18>, 모세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치료자와 의사로<출 15:26>, 다윗을 통하여 죄사함과 치유와 구속의 주로<시 103:3-4>,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의로운 태양이며 치료의 광선으로<말 4:2>,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공관복음서를 통하여 보고 체험한 많은 치유의 실제를 내용으로 기록하여 남겼다.

6) 사복음서에 나타난 주의 사역중 하나가 전인 치유 사역이었다. 주님의 관심의 대상은 목자를 잃어버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억압을 받고 굶주리고 사단에게 끌려 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길 잃은 백성들을 무관심하는 당시 영적 지도자들에게 책망과 도전적인 말씀을 선포했으며,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은 다 죄인이며 그들을 위해 구원자 메시야와 치료하는 의사<마 9:12-13>로 오셨다고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셨으며<마 4:23, 9:35>, 우리를 살리는 생명과 살아 있는 양식<요 6:41-58>, 양으로 풍성한 생명과 축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요 10:10>고 하셨으며, 이것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고<눅 9:1-2, 10:9>, 마가에 의해 병 고침과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은 “믿는 자”의 표적임을 밝히고<막 16:15-18>, 바울 사도는 성령에 의한 치유 사역<고전 12:9>을 권면하고, 야고보는 병들었을 때에 장로(지금의 목회자)를 초청해 기도를 받을 것을 권면했으며<약 5:14-18>, 사도 요한은 궁극적인 치유의 실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성이 “온전한 건강”임을 알았다<계 21:4>.

7) 특히 21세기에는 전인 치유를 통한 능력 사역의 복음 전파가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 아무리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한다고 해도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자기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걸러 내고, 불평이나 하고 배격해 버리는 요즘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치유가 나타나며 각종 죄악과 질병이 떠나가고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할 때에 많은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 앞에 돌아올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고 사도들도 전승했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도 계승되어져 왔다.

8) 성경이 말하는 치유는 신체의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 치유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깨어짐과 부조화와 무질서를 치유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생들이 하나님을 떠난 자체가 이미 영적으로 각종 질병에 걸려 있으며 그들은 치유를 받아야 할 환자들이다. 전인 치유는 바로 모든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을 시키며 성숙하게 자라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온전하게 자라도록 하며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이며 하나의 목표이다. 결국 치유 사역은 직접 치유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그 자신의 하나님<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이름과 성령의 역사>을 결정적으로 믿도록 할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영적인 혼란을 주는 영지주의를 방지할 수 있다.

 

* 영지주의란 - 모든 물질(육체)은 악하고 오직 영혼만이 선하며 육체성은 부인하여 현실성이 결여된 초대 교회의 이단으로 그들은 영적인 것에만 치중을 하고 육체성을 부인하므로 육체적, 사회 공동체적인 일에 관심을 두면 비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참된 기독교인의 삶이 결여된 교리를 주장하는 주의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영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육체, 정신, 사회, 자연, 환경까지 책임적인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셨다. 영혼없는 몸이 없듯이 육체없는 영혼만을 가지고는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성경을 통하여 영혼과 육체<3분설=영과 혼과 육체>, 마음과 정신이 온전하게 조화가 이루어 졌음을 전체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9)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종합병원이다. 믿는 자들이 서로 하나 되어 각양 은사를 따라 목사는 사단을 추방하고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 부분을, 외과 전문의는 외부를, 내과 전문의는 내부를, 각양의 제3의 대체 의학은 분야별로 치유를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에 사단의 나라는 추방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확장이 되어질 것이며 성도들의 삶은 풍성한 삶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10) 치유 받고 회복된 성도들은 치유해 주신 예수를 전하고 예배가 달라져야 한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우물가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예수를 만나 마음의 고통과 갈등과 부끄러움 속에 살아왔던 그가 치유를 받고 진정한 예배를 깨닫고 동네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히 예수를 전했으며(요 4:5-39), 성전 안에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항상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도 예수를 만나 일어나 뛰면서 찬양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였던 것이다(행 3:1-10).

11) 한국 교회가 치유 사역을 무조건 배격을 할 것이 아니다. 치유가 성경적인 근거가 확실하면 교회는 분명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경보다 더 나은 말씀이나 교리가 있다고 보는가?. 치유는 이 시대와 다음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필요를 충족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해 나가는 하나의 길이다. 과학의 첨단화와 각종 오염된 문화로 인간의 마음들이 강퍅해져서 공격적<동물적>이며 파괴적이며,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적인 병폐를 간접적으로 가져온 것이 사실이며, 그것들로 인해 각종 죄악으로 병든 영혼과 상하고 찢겨진 상처 난 마음과 병든 육체와 사회, 자연, 환경까지도 사랑으로 치유를 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까지 인도해야 할 마지막 사명을 감당할 곳은 바로 세상 속에서 치유와 변화를 통해 성장을 시키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장소 즉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목회자들이 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혼란만 가져다주어 길거리<방황케하는 가정 제단>나, 산(불건전한 기도원)으로만 찾아가서 해결을 보려고 하는 데, 분명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은 종인 목회자들에게 길과 산울로 가서 강권하여 그들을 데려다가 내 집(교회)을 채우라고 명령하셨다(눅 14:23)

 

 

1, 전인(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1) 성경이 가르쳐 주는 전인(내적) 치유

성경에서는 내적 치유, 기억 치유, 상한 감정 치유, 과거 치유, 깊은 상처 치유라고 나와 있지는 않다. 이런 단어들은 단지 성경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이 하나 되시는 신비를 성경 말씀을 통해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분명히 전인(내적) 치유에 사용되어지고 있는 용어들이나 단계적 절차 같은 것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감정 혹은 내적 치유의 실제와 필요성들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그 기본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시 34:18-19). (마 22:37)에 예수님은 구약(신명기 6:5)을 인용하였는데 이 말씀은 우리의 전 인격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전 인격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악한 영의 갇힘(깊은 상처, 상한 감정, 정신적 및 육체적인 질병, 억압된 환경 등)으로 부터의 자유로워야 하며(사 61:1-3), 큰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치유도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① 첫째 더러운 것을 청소해 주는 것이다(막 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② 둘째 마음에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이다(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 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③ 셋째 다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④ 넷째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이다(딤후 2:20-22)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적 치유 예

야곱 - 태아 때부터 시작된 형과 아우의 관계에서 형 에서에 대한 기만과 술수의 결과로 인하여 결국 형 에서의 복수심을 피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기거하면서 당하는 수치와 속임수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고 열심히 부를 축적하였다. 고향으로 귀향을 하면서 외삼촌 라반의 추격과 형 에서의 복수심에 도전해 오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놀라운 은혜와 크신 역사 속에서 두려움과 복수심은 사라지고, 특히 형과의 화해의 역사는 얍복강 가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의 역사로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 형 앞에 나아가 일곱 번이나 땅에 굽히는 용서와 화해의 치료가 나타났다(창 31:24, 32:28-29, 33:1-17)

요셉 - 요셉은 형들이 그를 죽일 음모를 꾸며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으나 물이 없어 나중에는 미디안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참으로 수치스런 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형들의 비정한 행동을 재해석하였다. 요셉이 형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와 보복심에 대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창 45:8, 50:19-20)

다윗 -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에 무슨 숨겨진 죄가 있나 보시고 상하고 망가진 부분들을 치유하시며 회복하셔서 자신을 온전함과 구원 즉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부르짖고 (시 139:23-24), 그의 영혼 즉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이와 같은 사실을 되새기며 찬양하고 (시 103:2-5), 자기 성찰과 내면을 새롭게 치유하고자 철저한 회개를 한다(시 51:1-19)

야베스 - 야베스라는 이름은 본래 존귀한 자라는 뜻이나 출생을 할 때에 수고로이 나은 고통의 상처가 그에게는 항상 지배를 하며 살아왔으나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자기의 상처를 고통에서 오히려 복으로 전환을 하고 고통으로 인한 좁아진 마음과 일터를 넓혀 버리는 기도와 환난과 근심을 바꿔 버리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깊은 상처 치유를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 주셨다(역상 4:9-10)

베드로 - 예수님을 배반하였다가 다시 회복한 사건을 보면 과거의 사건을 재생하여 내적 치유가 일어났다(요 21:15-17). 베드로는 예수님께 감옥에도, 죽는데 까지도 같이 가겠다고 장담을 하였다(눅 22:33).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도망가고 멀찌감치 대제사장의 집으로 따라가서 예수님이 매를 맞으시는 것을 보았다(요 18:22). 또 그 집 뜰에서 숯불을 쬐면서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하였을 때 닭이 울었다. (눅 22:61-62)“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자만과 허세와 배반으로 인한 수치와 두려움과 연약함이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바닷가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을 때 주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달려갔을 때 “(요 21: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그 숯불 냄새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나게 하였을 것이다. 식사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통하여 세 번의 배반으로 속박되어 있던 베드로를 풀어 주시고 다시 사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 양을 먹이라”는 분부로 그를 확실히 회복시켜 주심으로 내적 치유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일로 베드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으며 그가 갖게 된 그 깊은 겸허는 아마도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길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대적 마귀가 베드로를 시험하고(눅 22:31-32), 약점을 건드리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실패를 통하여 승리를 이루셨다. 후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주님을 부인할 만큼 두려워했던 그 위세 당당한 사람들 곧 대제사장, 율법사, 장로들, 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담대히 선포하였다(행4:5-12).

향유를 붓던 여인 - 동네에서 죄인이라는 오명과 자신의 죄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아상을 회복하여 주님 발 앞에 향유를 붓던 여인을 예수님은 죄사함의 은총을 통하여 믿음을 보시고 구원과 평안의 새로운 승리의 삶을 주셨다. (눅 7:36-5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으로 인해 낙심과 놀람과 혼돈 가운데 있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성경을 풀어 주어 그들의 부정적인 체험들을 근본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재해석하여 주심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뜨겁게 하고 소망과 치유와 새로움을 안겨 주셨다(눅 24:13-35)

탕 자(탕자의 비유) - 제멋대로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당시 사회 관습과는 반대로 가장 중요한 자리에 회복시켜 준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모습을 보여주셨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가 품꾼으로라도 살고 싶은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가는 탕자를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반지와 가장 좋은 옷을 주어 자신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표시함으로 그 아들의 자아상과 존재의 가치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망쳐지고 비틀려 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 과거 내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11-32)

혈루증 앓은 여인 - 세상에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하여 혈루증을 치료하려고 하였으나 있는 돈도 다 허비하고 몸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나아 와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질 때에 병은 치료되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구원과 평안과 병에서 놓임과 건강한 삶을 주심을 통하여 예수님의 내면의 치유와 육신의 건강을 통하여 변화된 삶을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막 5:25-34)

성경은 그 외에도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부정하다고 여겨졌던 자들이나 버림당했던 자들이 온전히 회복되는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죄는 우리를 상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치유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회개는 영혼과 생각과 감정의 치유를 가져온다는 것, 율법의 계명은 우리의 영적, 정서적으로 죄인을 만들지만, 내적 치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손길 아래서 예수님의 권세와 성령의 임재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3) 사역의 종류에 따른 내적 치유. 여러 치유 세미나를 참석을 하고 사역자들의 전공과 분야에 따라 분류를 한번 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분류를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깊이 통찰해 볼 부분을 정리해 본다.

상담학적 내적 치유 - 상담을 통하여 과거의 상한 마음과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죄의 문제 를 다루기도 하나 상담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이기에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나 주로 감정 치유로 끝나는 사역으로 영적인 깊은 부분에 가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심리학적 내적 치유 - 심리학을 전공하여 심리를 이용한 치유 사역으로 상대방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지 못할 경우는 치유 자체도 힘들며 설령 치유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상담학적인 치유보다 훨씬 영적인 부분에 도달하지 하지 못한다.

의학적인 내적 치유 - 대체적으로 상담과 심리와 의학이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상처와 감 정을 치유하면서 질병 진단까지 되어지나 불치병에 이르는 것은 대체 의학이나 자연 생식의 치유로 이끌고 가는 경향 많이 있으며,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볼 수가 없다

체험적인 내적 치유 - 사역자 자신들이 먼저 내적 치유를 받아 보고 받아 본 치유의 경험으로 사역을 하는 것으로 상당수의 사역자들이 성령의 역사보다 자신의 치유 경험을 살려 하는 것으로 자신의 경험 이상은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계통한 내적 치유 - 내적 치유를 집안의 조상으로부터 흐르는 3-4대의 가계도를 통해 주로 흐르는 잘못된 관습이나 질병들의 조사를 통하여 하는 사역으로 가계의 흐르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깊은 치유 사역은 하기에 부족하며 주로 축사 사역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축사통한 내적 치유 - 원인 치유보다 주로 드러나는 악한 영을 내어 쫓는 사역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숨어 버리는 악한 영들은 축사로는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원인이 치유가 안 된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나갔던 악한 영들은 과거의 상태로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그룹으로 내적 치유 - 여러 사역자들이 한사람을 상대로 하는 그룹 내적 치유로 주로 어떤 과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하는 것으로 실제 깊은 상처나 치명적인 것은 드러나기가 너무 힘든 치유 사역으로 질못하면 환자가 모멸감으로 더욱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성령의 전인(내적)치유란 인간의 영적 문제, 마음속 깊은 내면 속에 있는 마음의 상처, 손상된 감정, 잘못 형성된 생각 등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자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성경적인 방법과 성령의 강한 역사와 은사 사역(주로 1:1로 하는 사역)을 통하여 치유하고, 그로 인하여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을 예수 권세로 쫓아내고, 질병 치유와 잃어버린 건강과 정신적인 회복과 영성이 회복되며 은사도 회복되어지며,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 깨달음으로 순종으로 새로운 삶을 통하여 전인격적으로 치유 회복되어 능력있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 능력으로 전도하는 사역이다. (시 26:1-12. 잠 4:23. 롬 8:5-7. 히 12:5)

♧ 전인(내적)치유에서 유의할 점은 성령의 강한 은사 없이 체험이나 학문 위주로 사역을 하게되면 감정 치유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 그러면 왜 많은 내적 치유 사역들이 감정 치유로만 끝나고, 반복 또는 다른 세미나를 찾아가는 세미나 병이 들게 하는가? 성령님의 강한 역사와 은사가 무지하든지, 제한하든지, 성령에 대해 무엇인가 부족하여 실제 목회와 삶에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무장 간첩 - 교회에서 항상 대적과 비판의 생활로 악한 영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음을 드러나게 행동을 하는 교인으로 영적 무장을 통해 생각을 바꾸고 믿음으로 쫓아낼 수 있다.

남파 간첩 - 믿음없어 악한 생각들이 지배했다 떠났다 신앙으로 삶 속에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의 생활을 하는 신자로 활동 거점(부정적인 자)을 차단하고 기회를 포착해 치유해야 한다.

고정 간첩 - 드러나지 않게 위장을 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자수(숨겨진 깊은 상처를 고백)해야 하며, 또한 주변 성도들의 신고가 필요한 것으로 신고한 것은 정확한 증거를 포착해서 치유를 해주어야 한다.

사상 간첩 - 신앙관 즉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된 신앙사상을 스스로 시인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바꿔야 한다. 성장한 그리스도인도 베드로처럼 속을 수 있다. 속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은 떠나가고 범사에 감사와 찬양이 넘치며 성도는 풍성하며, 교회는 날로 부흥한다.

 

4) 사역적으로 본 내적 치유와 내적 치유가 아닌 것

내적 치유란

과거에 지었던 죄 즉 잠재 속에 삶을 지배하던 것들이 드러나 사죄받고 해방되는 것이다.

② 자신으로 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잘못 형성된 성품들이 드러나 바르게 하는 것이다.

③ 잘못된(부정적, 가난, 억압, 질병, 원망, 고통, 외로움 등) 삶을 바른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④ 현재와 상관없는 잘못된 상처들이 떠올라 나를 괴롭힌 기억의 부분을 치유하는 것이다.

⑤ 피해감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을 성령의 역사로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⑥ 알 수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오직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⑦ 과거의 잘못된 사건을 현재의 입장의 시각으로 재조명을 하여 은혜로 적용하는 것이다.

⑧ 삶속에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료위해 역사하시는 주의 원동력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⑨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달아 순종하여 놀라운 능력을 입는 사역이다.

⑩ 성령의 역사로 회복시켜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통하여 능력있게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가 아닌 것

내적 치유는 정신 치료법이 아니다. 정신병은 이유를 찾지만 내적 치유는 그 문제 자체를 다룬다. 그렇지만 내적 치유에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정신 치료법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적 치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내적 치유는 놀랍도록 하나님의 치유를 긍정적이고 믿음을 확실하게 표현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적극적인 마음 자세를 갖도록 하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내적 치유은 명상이 아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묵상함으로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을 묵상함으로서 내적 치유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치유를 가능케 한 것은 그와 같은 명상이 아니라 성령님의 적극적인 임재인 것이다.

내적 치유는 도피주의는 아니다. 내적 치유는 상처를 부인하거나 사건 속에서 도망하기보다는 그 상처와 사건들 속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그룹 치유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합력하여 치유 사역을 진행하고 구체화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무리 속에서 치유가 일어날 때에라도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적 치유는 슬픔의 사역이 아니다. 내적 치유는 때때로 개인의 삶 속에서 슬픔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슬픔의 사역은 아니다. 슬픔 사건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큰 슬픔을 직면할 수 있지만 진정한 내적 치유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인 것이다.

내적 치유는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치유와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계속 개발되고 있고 또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만 결국 내적 치유는 더 민감하고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져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려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구원이 아니다. 치유 과정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며 내적 치유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감정의 영역에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시키는 것이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 자동적으로 그 적용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뉴 에이지 운동이 아니다. 뉴 에이지는 신비한 영성과 인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 자신 속에서 개발되지 않은 힘을 끌어내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약속을 붙잡게 하는 거짓된 종교의 한 형태이다. 실제로 그들은 마술적인 힘(악령의 역사)을 끌어들여 영적인 공허를 만족으로 채움으로서 전보다 더 나쁜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내적 치유든지 또는 기도, 말씀, 성령님의 역사, 예수님의 권세,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완전히 무릎을 끓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내적 치유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내적 치유는 상한 감정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하고 죄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며 인간관계를 재조명하고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지만 성화로 가는 훈련의 대용품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적 치유가 예배, 성경 공부, 교제, 선행, 기도에 대한 필요를 대신할 수는 없다. 치유 사역 중에서나 신앙생활에서 내적 치유가 최고라고 외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만이 최고이시고 최상이시다.

5) 세미나에서 말하는 내적 치유.

1) 넓은 의미 - 성령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성화의 과정이다.

2) 좁은 의미 - “내면의 상처의 치유이며 영성의 회복이다” “내적 치유는 전인 치유가 그 목적이며 성령의 사역이며 영적 전쟁이며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다”

인간은 컴퓨터와 같이 뇌에 모든 사건이 고통의 감정과 함께 입력된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일은 유리 조각처럼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낸다. 이런 상처의 파편들은 대체로 기억 속에 잇는 것들은 치료되고 해결되나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린 상처는 드러나지 않아 치유되지 못하고 잠재 속에서 문제를 우리 일생 동안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내면의 마음속에서 쓴 뿌리가 된다.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좋은나무와 가시나무

쓴 뿌리에서는 가시나무 덤불이 나오기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가시덤불에 덮여서 자라지 못한다. 내면에 숨겨져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남아서 그 사람의 삶을 잘못되게 만든다. 특정한 어떤 사건들은 분명히 상처를 만들며, 이 상처가 쓴 뿌리가 된다. 쓴 뿌리는 미움이다. 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잠재(무의식)의식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러나 이 상처는 무의식 속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왜 이 쓴 뿌리(미움)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는가? 성경은 그 해답을 준다. (마 6:15 용서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 않음), (마 5:21-24 먼저 화해하라), (마 5:43-45 원수위해 기도하라), (요일 3:10-15 미워하면 영생 없음), (히 12:14-17 쓴 뿌리가 나서 괴롭힘)

2, 내적 치유의 필요성 * 좋은 나무와 가시나무 그림을 통해 보면서

과거에 상처를 받은 마음은 외부로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삶의 모든 영향을 주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는 치료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저절로 치료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속에 있는 상처는 결국 쓴 뿌리가 되고(지하 - 마음) 가시덤불(지상 - 삶)이 되어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은 영향력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삶을 계속적으로 불행토록 만든다. 그리고 남에게도 악 영향을 끼친다.

이런 것은 교회에서 치유를 모르는 목회자들은 신앙생활의 기도나, 성경 공부, 설교 등으로 변화가 되어지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결코 치유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계속적으로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된다.

 

3. 과거 상처가 삶에 나타나는 결과

1) 의존형과 지배형으로 나타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이 많다.

① 상처가 많은 사람 중에는 상당수가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의존형의 사람이 된다. 자기주장이 없으며 남의 의견대로 사는 피동적인 삶을 산다. 의지의 대상이 없으면 자신감이 없어 살아가기 힘들다. 이런 사람은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며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

(어릴 때 - 부모님만 의지, 자랄 때 - 친구들을 의지, 결혼하면 - 배우자(처갓집, 친정), 늙으면 - 자식들 의지)

② 상처가 많으면 남을 지배하고 다스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배자형의 사람이 된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용납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아버지가 되면 자식이 의견을 내세우면 자신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고 격분하며 용납을 못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왕처럼 간섭하고 지배해야 안정감 찾는다. 왕처럼 지배하지 못하면 무시 도는 대적함)

2)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결여성이 많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반대로 타인을 비판한다.

① 남에게 분노를 잘 내며 ②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잔인하며 ③ 대개 스스로 교만하며 ④ 남에 대해 비판적이다. ⑤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을 별 것 아니라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깎아 내린다. ⑥ 상대가 조금만 거슬려도 “네가 나를 무시해”하고 대든다. ⑦ 남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한다.

3) 항상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모두 부모, 타인, 세상 탓으로 돌린다. ① 극단적인 비약을 한다. ② 자기 부정이 강하다. ③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남을 원망을 잘한다. ④ 하나님에 대해서도 서운해 하고 원망하며 불공평하다고 본다. ⑤ 그 마음에는 분노가 잠재되어 있어 잔인한 성격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4) 우울증과 강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 죄책감이 주원인이며 이유 없이 무기력해진다. 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하며 신경에 힘을 많이 쓰니까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연약해지고 예민해 진다. ② 죄악을 토설치 않을 때 두려움이 온다. ③ 죄책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④ 이유 없이 무기력 상태를 느낀다. ⑤ 우울증이 생긴다. 우울증은 반드시 이유가 잇다. ⑥ 죄책감 때문에 강박적인 증상이 일어난다. 결국 이런 죄책이 강박감으로 강박감이 무기력으로 발전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게 된다.

5)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결여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치료되기 전에는 신앙이 회복되지 않는다. ①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이다. ② 하나님을 일관성이 없는 분 ,독재자, 고통을 재미로 보는 잔인한 분, 멀리서 팔짱을 끼고 고통을 즐기는 분, 나를 불만해 하시고 인상을 쓰시는 분, 넘어지고 넘어지는 자에 대해 지겨워하시는 분으로 본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시인하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부정한다. 특히 은사 사역을 부정 비판한다)

6) 신앙생활이 굴곡이 심하고 침체에 빠지기 쉽다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한다. 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이 항상 주변 상황에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는 굴곡이 심함. ② 신앙의 연수가 많아도 어려우면 회의에 빠진다.

마음A밑에 상처

그림은 우리 마음속의 부정적 기억(깊은 상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보여 준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화살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계시와 은혜의 역사를 나타낸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체험과 간증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와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묶여 있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한다거나 삶 속에 습관적인 죄를 끊지 못한다. 그래서 늘 마음에 갈등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지만 더 이상 마음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작심삼일이다. 그래서 이 부정적 기억에서 오는 지식과 감정을 치유해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삶의 변화가 생긴다.

4, 과거의 상처들의 축적은 잘못된 감정을 형성시킨다.

 

현재의 성격은 그 동안 경험하고 체험하여 나에게 끼쳐진 영향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잘못된 성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 때문이다. 잘못된 성격은 자신의 책임이다. 잘못된 성격은 인생이 위기에 처하면 완전히 그를 파괴해 버리는 주된 요인이 된다. 사람들은 “성격이란 고칠 수 없는 것이라”하지만, 기질과 성격을 우리들은 구분해야 한다

. 氣質(기질-본질, 체질)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만

性格(성격-성질)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성격을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하나 그것은 자신이 고칠 일이다. 그래야만 바른 태도 바른 행동 올바른 인생이 된다.

아모스5:19 말씀을 보면 사람이 살다가 사자나 곰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독사는 피하기 어렵다. 외면에 있는 의식적인 것은 피할 수 있으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의식 속의 상처를 피할 수 없다. 또는 상처 속에 숨어 있는 사단은 피할 수 없다. 사단이 숨을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벽 즉 상처이다. 상처는 치유해야 내 마음속의 사단이 숨지 못한다. 벽은 인간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단단한 벽돌들로 잘 쌓아져야 튼튼할 텐데 부실한 부분(자신의 성격 중에서 상처와 죄로 인해 병들어 부실해진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 안에 독사가 숨어들게 되는 것이다. 독사가 숨어살다가 방심이나 연약할 때 나와서 물어 버린다. 그곳을 거처로 삼고 있는 귀신은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격이 예수의 진리로 바르게 세워져 나가면 귀신은 발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 안에 틈이 있다면 아무리 사탄을 쫓는다 해도 언제든지 그곳은 쉽게 귀신의 이용물이 되어 인생을 파괴시킨다.

5, 잘못된 성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픔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이다. 이것은 반드시 치료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성격은 새롭게 되고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해결되지 못한 아픔은 또 다른 아픔을 자석처럼 끌어당겨 더욱 큰 덩어리를 만든다.

 * 높은 산 설원에서 조그마한 눈 덩이가 굴러가면 산 밑으로 계속 굴러가면서 커다란 덩어리로 밑의 건물을 파괴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거짓 신자들이다. 나쁜 의식들은 밀어내면 낼수록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가장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그러므로 나의 성품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인간 구속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6,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치료하실 수 있는 이유

1) 인간에게는 4가지 마음의 영역이 있다.

ⓐ 나도 알고 남도 알고 (5%)

ⓑ 나는 알고 남은 모르고 (10%)

ⓒ 남은 알고 나는 모르고 (15%)

ⓓ나도, 남도, 아무도 모른다 (70%)

ⓐ 내가 알고 남도 알 수 있는 부분 : 이 부분은 항상 자신이 변화되어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이다. 예수님 을 믿고 난 후 가장 많이 변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 나만이 알고 남은 모르는 부분 : 하나님 앞에 은밀히 기도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 많은 사람들은 ⓐ ⓑ 이 두 부분을 내 마음의 전체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 지는 부분 : 곁에 친한 친구나 스승에 의해서 지적을 받을 수 있고, 또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에게는 아무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줄 때 오히려 해를 받기 쉽기 때문이다. 교만한자는 권면을 안 받기 때문에 고치기가 힘이 든다.

ⓓ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 4 부분 중 이 부분이 가장 큰 부분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잠재의식적인 영역이 인간 마음 안에서 70 %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신앙의 성숙은 바로 이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의식의 형성은 태중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잠재의식 속에 형성된 성격은 잘못된 성격을 형성하기 쉽다. 사람의 성격의 뿌리는 잠재의식 속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모태로부터 형성된 잘못된 성격을 고치 실수 있다.(시139:1-16 먼저 읽고 그림 참조)

⇓하나님

1살 10 20 30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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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 장래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날부터 나를 안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아신다. 나도 남도 나를 알지 못하는 문제가 내 안에 있다. 이것이 잠재의식 즉 무의식 속에 있는 성인 아이다.(정동섭 교수) 이 성인 아이의 상태에 따라 나의 성격이 형성된다. 정태기 교수는 이 성인 아이를 운전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상처를 한(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는 부모의 여러 영역이 유전되기도 한다.

이것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요 1;12. 행 4:12)

내가 부모님의 성격과 행동이 (잘못된) 내 안에 있는 것을 본다. 유전적인 죄악은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잘못된 성격을 내 자식이 다시 그대로 이어 받는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부정적인 성격의 유전은 해결된다.

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잠재의식 속의 문제를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하고 진단을 내렸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치료이다. 지나간 내 인생의 과거 문제까지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성 폭력 같은 문제는 인간의 심층에 깊은 상처를 내어 일생을 따라 다닌다. 인간은 그 일을 잊거나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밖에는 못한다. 그러나 의식 속에서 그 문제를 잊을지라도 그 문제의 독은 없어지지 않고 다른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절대자 하나님만이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신다.

땅을 파는 그림

그림의 땅은 마음을 표현하고 씨앗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어떤 사건과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고 있다. 작은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의사는 환자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진단하는 의사의 노력을 비유한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의 상처는 인간이 진단은 한다 할지라도 치료는 하지 못한다. (더욱 약물 치료는 불가능하다) 이런 정신과 치료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

 

7,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병든 인간의 마음(성격)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들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1) (마 9:12-13)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2)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3) (사 61:1-3) 이 본문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복음을 전하시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 갇힌 자를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이다.

* 위 말씀들은 주님께서 육신의 질병도 포함되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육신보다 먼저 마음이다. 육신보다 마음이 죄짓고 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깨어져 있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이 옥에 갇혀 있다고 말씀하셨다(사 61:1). 우리가 실제로는 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도 마음이 분노의 옥, 두려움의 옥, 의심의 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육신이 옥에 갇힌 것 보다 더욱 실제적인 감옥일 수 있다. 주님은 이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또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통해 치유의 은사를 베푸신다. 마음이 치료되면 육신도 치료된다. 마음의 쓴 뿌리가 뽑히면 분명히 가시나무는 죽는다. 쓴 뿌리인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자. 총체적 인간 구원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음이 변해야 삶이 변한다. 마음의 변화는 치료와 성숙이다. 마음이 치료되어야 성숙되고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

* 계속된 세미나에 참석할 마음 자세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을 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위하여 신앙이 자라나야 합니다. 당신의 진정한 신앙 성장은 당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마음(8복)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9가지 )입니다. 당신이 이 세미나 기간 동안에 성령님께 철저히 순종을 한다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내면의 깊은 상처들을 치료해 가실 것입니다. 당신은 다음 7개 항과 같은 자세를 가짐으로써 성령님께 철저히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1. 세상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얻게 된 명함과 위치와 자랑거리를 내려놓으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전 강의 시간에 참석을 하십시오.

2. 자신을 위하여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향한 사랑의 눈물을 갖고 계신 주님을 위하여 자신이 변화되고자 하십시오.

3.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찬 모든 것(특히 교만, 고정 관념, 지식, 종교관, 선입견, 자존심, 의심, 열등감 등)을 철저히 비워 버리고, 성령님이 나에게 역사하시기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라. 그 분을 알 때 자신을 아는 눈이 열리고 은혜가 주어진다.

4. 세미나 및 집회에 전혀 몰두하십시오. 일, 근심, 걱정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5.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개인적인 행동(핸드폰, 전화, 외출, 면회)은 삼가 주십시오.

그렇게 결단을 할 때만이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로 치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6.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강의를 정리하시면서 강의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도를 점검하시고 이해가 안 된 부분은 다시 또 점검을 해 보시고 꼭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7.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대하여 응답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상19:11-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끝가지 인내로 나아갈 때 치유와 승리의 기쁨을 맛봅니다!

과정2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지식인가, 관계인가)(마 7:24-27)

“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랑의 밀접한 관계가 되게 하소서”

1. 지금도 그리스도인과 기독교인의 싸움이 있다.

1)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개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머리 속의 지식적인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야다” 즉 남녀가 사랑 속에서 성 관계를 통하여 서로 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실제적인 경험, 즉 숨김이 없는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의 의미이다. (히 4:12-13) 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2) 신앙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는 지식의 힘이 아닌 관계의 힘(사랑)으로만 되어 진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을 많이 아는 지식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와 관계가 좋게 맺어질 때에 나오는 자연적인 감정이다. 사랑한다는 것도 평안하다는 것도 관계가 깨어져 있을 때에는 결코 나오지 못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인데 이 사랑이 그 관계를 나타내는 말임을 생각해 보면 진정한 변화의 힘은 내가 상대와, 즉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 즉 사랑에 따라 비례하여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속 아이

그림에 나오는 그대로 그의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과 내면의 속사람이 알고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머리 속에 들어온 선한 지식은 내면의 사람에게 전달되어져야 하나 내면의 사람은 동굴같이 자신을 둘러싼 벽으로 인하여 그 지식을 전달받지 못한다. 벽을 뚫고 이 속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머리 속의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이어야만 한다.

3) 우리의 속사람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먼저 필요하다. 관계가 이루어질 때 지식은 채워질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자. 아이는 자기 엄마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엄마의 나이, 주소 등등 - - -)이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엄마가 자신을 어떤 태도로 대해 주고 어떻게 사랑을 해 주느냐가 중요하다. 엄마와 사랑의 관계를 맺은 아이는 비록 말을 하지 못할 만큼 어릴지라도 자신의 엄마를 정확히 알아본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이 유아와 엄마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라는 것은 이 아이처럼 사랑의 관계만 맺어져 있다면 매우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하나님에 관해 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으며, 하나님이 과연 계신지조차도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관계가 아닌 지식의 힘이란 이토록 연약하기만 하다.

4)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모든 것을 알아 가는 척도를 사랑의 관계가 아닌 지식으로 스스로 입증시킨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이런 객관적인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고 연구를 했으니 그 분을 너무 잘 알고 이해를 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5) 이러한 사고 구조는 창세기 이후에 인간 안에 굳어진 잘못된 습관이다. 이런 사고 구조는 하나님이 처음에 만드신 것이 아니며 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파기하면서부터 이런 사고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삶의 태도로 굳어져서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기에 자신이 연구한 이런 지식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6)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가 가진 지식이 머리에 속한 것인지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왔으며,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리 안에 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도 알지 못했음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함께 이야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귀신의 우두머리라고까지 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가진 자가 아니라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후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할 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나온다. * 현대의 교회가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받는 가장 큰 공격은 교인들의 말과 행위가 서로 일치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말은 변했으나 행위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 공부와 수많은 메시지가 정보를 넣어 주는 것에 그쳐 버림으로써 사람들이 오히려 교만해지고 이기적이며 바리새인적으로 변해 버린 결과의 하나이다. (교회 지도자들, 사역자 및 직분 자들이 사명감대로 하지 않는 신앙생활의 결과들)

8)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정보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지식은 다만 정보로 머물 수밖에 없다. 정보로 머물러 있는 성경적인 지식들은 내면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보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한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9)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내면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속사람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시도 지으며,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사역자도 될 수 있으나, 자신 스스로 내면의 사람이 느끼고 있는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의 감정은 그의 고백을 따르지 못한다(고전 13:1-2)

성경 말씀을 안다는 것과 성령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입술로는 말을 전할지라도 변화는 별로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머리로 아무리 알고 있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 혼자 있는 것처럼 두렵기만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막상 가나안 땅 앞에 서서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거인 족속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 보호자라는 머리의 생각은 가슴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다만 떨리고 죽을 것 같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게만 가슴에 느껴졌기에, 절망에 싸여 이곳까지 데리고 온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으며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게 하셨다. 이처럼 산 지식이 아닌 개념 속의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의 행동을 하게 만든다. 속사람이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0) 지식은 세상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드나 관계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두 가지

나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계가 맺어지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되어 평안과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식으로 알게 되면 세상의 물건을 만들고 육체의 소욕에 따르는 불행한 삶을 산다

2. 관계 아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끌어 갈 때 나타나는 삶의 특징들

1) 지식이 아무리 많아져도 지식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증가는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의 증가는 그를 교만하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없는 항상 가르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머리로 아는 것은 결코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잘못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지식이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으면 그 지식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지식이 되고 만다.

이것은 아무 힘이 없는 종이호랑이와 같다. 종이호랑이와 같은 죽은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할뿐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물론 지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천적인 교만함 때문에 인간 안에 지식만이 들어올 때 그것은 인간을 더욱 교만하게 만든다. 자신의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알 수 있다고 하는 어리석음을 생산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일생을 의탁할 수 있는 힘은 결코 머리 속 지식의 축적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사상을 가르쳐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표현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죽은 하나님이라는 생각 ⇒ 종이호랑이로 생각 ⇒ 자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 ⇒ 생명력 ⇒ 영생)

2) 말은 많이 할 수 있으나 그 삶 속에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고전 4:20)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내 중심 속 자아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보적인 지식만의 지식은 인간의 행동 밑바닥 중심에 숨어 있는 동기를 영향을 주지 못할뿐더러 변화는 더욱 시키지 못한다. 자아의 변화를 위해서는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동안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 (고전 4 :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자아의 자리는 인간의 중심이다. 하지만 지식이 축적되는 이성의 영역은 극히 표면적인 곳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자아의 지배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이기적 자아가 왕 노릇하는 이중적 삶의 구조가 계속 진행되어 간다.

3) 지식으로 자신을 이끌어 갈 때 그들의 안정감의 근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므로, 누군가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그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반발하며 자신의 지식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기도 한다.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종종 본다. 이런 모습이 보일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비웃으며 어린 신앙인들은 상처를 받는다. 성령 안에서 획일적이지 않으나 연합될 수 있다.(고전 8 : 1-2)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4) 그의 삶 속에 있는 숨은 동기는 결코 지적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의 이기성은 변화되지 않고 그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거슬려 육체의 소욕을 따르다가 결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다.(갈 5 : 15-17)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된다. 지식 지향적인 삶의 태도는 비록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시 78 : 19)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의 말씀을 통해 보듯이 성령의 일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육신의 생각이다. 이 육신의 생각은 매우 좋은 일들로도 나타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뿌리가 나쁜나무가 좋은열매 맺지못함

민14장의 10지파 족장들 ⇒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에서 헤매다 죽게 하셨다. 개념속의 신앙은 결국 믿음의 위기 때에 우리로 하여금 불 신앙의 행동을 하게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 혼자 있는 것처럼 두렵기만 하다. 광야 여정 중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가나안을 정탐한 그들은 가나안 정복이 두렵기만 했다.

 

3.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진 삶의 특징

1) 그가 매일 하나님과 가지는 사랑의 관계는 어느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아이가 자기의 부모에게 깊이 사랑을 받고 있고 그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임을 안다면, 어느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인해 자신의 자녀 됨이나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 아이와 부모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가지는 관계도 이렇게 친부모 이상의 관계이다.(매일 매일 삶의 관계이다. 부부 관계도 매일 좋은 관계는 이혼이 안 된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체험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과의 어떤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비록 죄를 지었거나 혹은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바닥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여 신앙 이전의 자리로 떨어지는 연약함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사람이 전 세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노아를 생각해 보자. 노아가 전 세계에서 오직 한사람으로 사람들의 판단과 조소, 다른 의견을 물리치고 120년 동안 배를 지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120년은 현대인간의 최고의 수명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그 많은 세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그 압박감과 외로움을 견디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완수했던 노아 . 그가 다만 하나님을 머리 속으로만 아는 자였다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4.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관계로 성장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1) 내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위로부터 오는 이런 지식들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겸손함과 정직함이 필요하다.

① 겸손하다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가난한 마음으로 간구할 것이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욕심된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다. (나를 비워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을 아는 힘은 우리의 노력한 만큼이나 또는 내 머리의 능력만큼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보기는 보아도 이해할 수 없으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바로 곁에 하나님이 계셔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령한 지식을 위하여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렇게 헐떡이는 심정으로 사모해야 한다고 성경(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모르고 자신의 눈과 생각을 믿기에, 하나님에게 이런 겸허한 자세를 갖지 않으며 구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 배부른 마음이 있기에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다.

② 정직하다면 내가 가진 사역이나 다른 외적인 것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없을수록 더욱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신이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애써서 증명하려 하고, 그 증명의 수단으로 자신이 일으키고 있는 사역의 규모나 자신의 업적을 내세운다. 하지만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 있고 자신의 몸을 불태워 구제에 앞장섰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주님과 텅 빈 관계 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사역자의 집 그림

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2) 우리 안에 있는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한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①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의 머리가 공백 상태에서 주님과 교제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20살에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면 그 이전에 들어와서 나를 지배해온 많은 나쁜 영향들과 잘못된 생각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단번에 지우개로 지우듯 그 동안 머리 속에 들어 지배하고 있던 모든 기억과 가치관과 고집과 지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② 이미 우리 안에 쌓인 지식들은 가나안 땅의 부족들처럼 우리의 내면을 차지한 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셨다.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다. 하지만 그곳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미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강대한 족속들이 있었다. 그 족속들은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죽이려고 했다. 이렇게 분명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주신 땅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차지하고 있는 족속들이 자신들의 영유권을 주장하듯이, 우리의 내면 속세계도 이와 같다. 우리의 사고 속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대로 살아온 가나안 족속들과 같은 온갖 종류의 지식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이 지식들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해서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③ 이런 지식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강력한 진을 만들어 우리의 속 사람을 그 속에 가둔다. 그 진은 속사람을 속이는 진이요, 사단의 진이기에, 그 안의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음을 모를 수 있다. * 세미나 참석에서 삼사대 저주를 들은 사람의 간증. 집안에 삼사대가 지나야 축복이 오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을 때 사단은 이 어리석은 속임수에 계속적으로 온갖 질병과 사고를 일으킨다. 나중에 속임수에 완전히 속고 자신이 속임수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해방되었다. 이처럼 사단은 악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잘못된 지식을 사용하여 우리의 속사람을 가두고 우리의 삶을 파괴시킨다.

④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다. 만일 그것을 남겨 둔다면 그것은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결국은 우리의 사고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데 사용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의 뿌리가 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가나안 땅을 온전히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방황이 끝이 나고 하나님을 위한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 포도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가나안의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매우 잔인해 보인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보신다. 그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는 우상을 이스라엘 안에 전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안에도 어떤 것은 가나안의 어린이들처럼 전통이니, 사회적 윤리이니 하면서 매우 그럴듯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악해 보이지 않는 지식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게 되는 도구로 사용됨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이 완전히 그리스도로 새롭게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마치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진멸하듯이

⑤ 우리의 속사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잘못된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세상의 헛된 철학과 사상, 사탄적인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몰아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런 지식들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이런 지식이 악한 지식이라고 생각지 않는 한 그 지식은 우리 안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의 내면에 이런 악한 지식이 있음을 알고 그 지식이 드러나야만 그것을 몰아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 지식이 악한 지식인지 모르고 바른 교훈 혹은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처럼 붙들고 있다면 절대로 몰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몰아내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도우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어떤 악한 지식으로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 거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볼 때 옳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옳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생각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보자. 자신을 격려하며 더욱 성결하게 하는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들이 아니다.

다음의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을 분별하는 방법들이다. 먼저 그 생각이 말씀 앞에 옳은지 분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생각해 보려 할 때 이에 대응하는 말씀(고후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이 분명히 있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일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생각들은 말씀으로 비추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생각들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과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 같은 소리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정죄감에 빠뜨리고 가족 관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분별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썩은 우유를 분별해서 뱉어 내는 것처럼, 악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생각들을 우리는 분별해 뱉어야 한다.

만일 자신 안에 있는 생각들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분별이 된다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런 생각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 지식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 어떻게 그 생각들을 대적하고 벗어버리는가? 다음과 같은 선포의 기도를 한다. 하나님 앞과 사탄에게 선포와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속았다! 거짓임을 알았다!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다시는 속지 않는다! 거짓의 영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나는 이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진리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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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화살표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나타낸다. ⇓아래로 직선을 향한 화살표는 영원히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이것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있고,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말하신다. ⇘옆으로 사선으로 내리 그은 화살표는 사람들이 실제로 마음에 믿고 있는 가변적인 생각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생각들을 따르고 살게 된다.

이 두 화살표의 차이가 클수록 행동과 말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 사람의 삶 속에 안정감이 결여되게 된다. 비스듬한 사선에 자신의 몸을 눕혀 의지한다고 생각해 보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하는 거짓 교훈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교훈을 기준으로 삼고 살고 있는지를 아신다. 사람은 두 개의 기준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자신이 세운 사선의 기준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이거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세워진 거짓 기준들이 무너지고 진정한 기준, 진정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이 세워지기를 원하신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기준을 세워 나갈 때 우리는 변화하게 되는데, 그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 질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마 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5. 내적 치유와 이런 사실들의 관련성

1) 전인치유 세미나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모든 목표가 있다. (창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 나온 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에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목표를 이루어 나가고 계신다.

하나님은 처음 구약의 사람들에게 돌로 만든 판 위에 십계명을 주셨다. 하지만 그 계명을 가진 그들이 왜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신들 마음대로 새겨 놓은 자신의 계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판에 예수 그리스도를 새기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 판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새겨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다. 내적 치유 세미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돌 판에 새겨진 그대로 놓아두지 말고 나의 마음 판에 깊이 새겨라)

2)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전해져야 한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나의 겉 사람이 아닌 속사람이다. 우리 겉 사람은 웃지만 내면의 자신은 울고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변화는 이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 속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져야 변화해야 한다.

3)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그 속사람을 묶고 있는 결박과 진들이 부서져야 한다. 결박과 진은 우연하게,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건과 필연적인 결과들에 의해 생긴 건축물이다. 그러기에 이것의 파괴 또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4) 전인치유 세미나는 그런 결박과 진을 부수는 과정이다. 그리고 속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돕는 세미나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과 사랑의 의 관계로 성장하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과정3. 신앙의 바른 가치관 정립?(엡 1:3-6)

 

“나 자신에 대한 거짓된 속임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로 알게 하소서”

(엡 1 : 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목적 :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았던 잘못된 태도를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생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삶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헛된 사상과 철학을 따라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진리를 세우기 위함이다. ‘나’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 왔는지 모른다. 나의 참 아버지를 만나고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과정이 진행된다.

인간의 마음의 고통은 혼란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출발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평안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는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1. 성경적 가치관이 다 어디로 사라 졌는가 ?

1) 오늘의 현실과 세계의 환경들.

지난 40~50년 사이에 가치와 윤리, 정직함은 엄청난 변화를 거쳤다. 역사를 보면 정부와 사업, 그리고 물론 교회에도 항상 불미스런 일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려는 우리의 점차적인 노력으로 일반적인 사회와 별개의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은 악한 것이 선하다고 믿게 되는 단계가 될 만큼 혼미하게 되었다. 우리 국가는 절대적인 도덕을 상황적인 도덕으로 대치하려 노력한다. 일부 교회조차도 이런 속임수에 걸려 죄를 수용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도덕의 기준 변화결과로 사업의 기능이 과거에 일반적인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 가치 체계 아래에서 점점 더 운영되고 있다. “당신이 들키지 않을 때까지는 괜찮다”라든지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업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같은 생각 말이다. 극명히 많은 도덕적 회사와 사람이 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업체계가 단지 정부의 법적 처벌과 규제에 응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두려워하여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

오늘날 조차도 많은 큰 기업이 비도덕적인 행동에 의한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다. 작년만도 대기업, 수백 개에 달하는 기업이 비윤리적인 행위로 수백, 수천만 원의 벌금을 물었다. 기업이 벌금을 물고 처벌을 받았지만 실제 그런 불법을 저지른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2) 교육적인 환경(학원).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60% 이상의 대학생이 그들이 발각되지 않으면 부정행위를 하겠다고 응답을 하였다. 이러한 실태가 대부분 대학의 현실이다. 대학 동아리에 소속이 되든지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서 많은 시험 예상 문제 복사 본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전반적인 시스템은 좀 덜하고 좀 더하는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왜 예비시험이나 입시 시험에서 점수가 떨어지고 있는 지 의아해 한다. 예비 시험이나 입시 시험을 치를 때는 부정행위를 방지한 조치가 취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성적이 학교 수업의 진정한 실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때때로 상당수의 학생들은 학교 성적은 자기의 공부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 공공 교육의 도덕적 가치관을 세속적인 인본주의에 대치해 버렸다. 우리는 실험되고 판명된 도덕적 규범이 아닌 것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하나님을 삭제해 버리고 자아의 신으로 대치해 버렸다. 우리의 교육적 도덕관념은 근로 윤리가 사라지고 복리만을 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3) 정치와 세계관

① 정치적인 합법화 수정 - 우리의 정부는 도덕적으로 결정을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합법화 수정된 것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사고는 ‘내가 하는 일이 아무도 헤치지 않으면 다 괜찮다’라는 인본주의적 철학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합법화 수정된 것을 반대하면 우리는 용납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만일 성경의 예수님을 살펴보면 그 분은 오늘날 용납될 수 없는 분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셨지만 죄는 미워하셨다. 우리는 힘이 없고 차별을 받는 사람에게는 용납하지만 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 적조현상보상(죽어야 보상하는 현실<공해> ⇨ 살아 있을 때 방사하면 어족 풍성)

② 도덕 기준을 누가 정하였는가? -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위해 무엇이 도덕적인지를 재 정의해 주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가족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가족의 가치인지를 자유분방한 언론이 재정립하고 정치적 합법화로 기초를 세운다. 교회는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그들의 죄나 죄책감의 결과를 피하려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오히려 교회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4) 기준 세우기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그의 군대를 부르시고 새로운 도덕을 그 나라와 세상에 세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많은 단체와 사람을 강력한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가치와 윤리, 정직함을 다시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이 훈련을 받고 무장되어 세계를 향해 갈 때 우리는 펌프 라인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더욱 나아올 수 있게 규범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매 시간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여호와 군대의 일원이 되길 희망한다.

2. 가치, 윤리, 정직의 정의와 상관관계

1) 정 의(마 7:24-27)

(마 7 : 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① 가 치 - 가치란 인간이 마땅히 사회생활을 하는데 따르는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옳은 것이나 바람직한 것을 말하며, 가치관은 인간이 삶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서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 것인지를 판단하고 적용하는 근본적인 법칙(관점)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우리의 가치나 가치체계를 결정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고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행동과 중요성도 그렇다. 사회적으로 가치는 이상, 관습, 사회의 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가치가 윤리적, 도덕적, 행동과 일치하지 않다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가치는 악과 부도덕한 법칙 또한 성경적 도덕적 기준에 근거한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어떤 것은 가치 있게 여기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게 여긴다. 또한 사람이 값있게 여기는 것에 따라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그 말은 어떤 것에는 더 값어치를 둔다는 말이다. 이 우선 순위의 결정은 사람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 각자가 어디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 그 범위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다. 때때로 상이한 가치가 서로 경쟁하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치의 결정 시간이 다가오면 가장 최우선 순위가 드러나게 된다.

만일 우리의 가치가 성경의 법칙에 근거하게 되면 가치관은 시련과 연단의 때에 우리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그 가치관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을 하는 수단이 되고, 어떤 선택이 가치가 있고, 현명한 지도 결정하게 된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은 다른 가치관과 섞어서 우리의 인격을 이루게 된다. 가치관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주변의 충고와 환경, 경험과 친구를 통해 얻게 되는 신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② 윤 리 - 윤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로 정의하는 것으로 특정 그룹과 사회에서 수용되는 행위 규범이다. 윤리는 개인이나 개인이 이루는 그룹의 도덕적 법칙에 근거한다. 윤리는 책임을 전제로 하고, 책임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윤리는 두 가지 선택, 즉 도덕이거나 비도덕 또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권리를 일컫는다. 윤리는 개인이 이룬 가치에 근거한다. 윤리적 가치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곳에 둔 사람은 특정한 법칙이나 사물에 가치를 두고 가치가 주어진 것을 얻을 수 있는 윤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비도덕적이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얻으려 할 것이다.

③ 정 직 - 정직함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행위이다. 정직함은 도덕적 인격의 온전함과 관계가 있다. 정직함 자체가 온전함을 뜻한다. 말하는 것과 행동이 동일할 때 그 사람이 정직하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2) 가치, 윤리, 정직간의 관계

우리의 행동의 이유와 결정은 우리 개인의 가치 체계에 근거한다. 목회자는 상당히 도덕적인 가치 체계를 소유하겠고 마약 중독자는 비도덕적인 윤리에 근거한 다른 가치관을 소유할 것이다. 따라서 서로 상이한 두 가지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 윤리적 문제가 개입된 결정을 직면하게 되면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도덕적인 가치가 없는 마약 중독자는 비윤리적으로 반응하여 사회질서나 법칙에 주의하지 않게 된다. 더욱이 그의 윤리 체계가 도덕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정직함이 없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별개가 된다.

우리의 가치 체계는 우리가 상황에 반응하는 것에서 비롯된 기초이다. 우리의 윤리는 우리의 도덕적 가치 체계에 근거한다. 정직함은 당신의 말과 행동을 지키는데 근거한 도덕적 가치 체계에서 비롯된다. 정직함은 행동으로 옮기는 윤리다. 가치와 윤리, 정직함에 관한 원칙을 살펴보고 우리의 행동이 이러한 성경적 원칙에 근거하는지 보자.

3. 그리스도인과 가치, 윤리, 정직(딤후 3:14-17)

(딤후 3 : 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성경적 원리와 기초

①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 가치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디에 우리가 가치를 두는지 결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법이나 규제, 문화적 영향력, 철학, 비슷한 현상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체계를 이루는 근거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침을 받아 무엇이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인지 정의할 수 있다. 유대 기독교의 가치체계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이 많은 나라의 가치관과 윤리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이고 그 분의 행위와 일치하고 거짓이 없으신 분이다. 우리가 가치체계를 개발하고 행동을 하는데 근거가 될 정립된 성경 원칙의 한 예인 것이다.

회개와 생각 바꾸기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치관으로 일하는 중요성을 이해하고 정직함을 윤리적 기준으로 삼는다. 잘못된 부분은 회개하며 돌이키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 행동 양식을 바꾼다는 말이다. 잘못된 이들을 위해 공의를 세운다는 것이 단기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삶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름 부으심과 권세를 깨닫는 첫 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적용시켜서 하나님을 위하여 삶의 천국을 되찾게 된다.

실질적 적용 - 우리는 헌법과 규제를 적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볼 수 있다. 우리의 개인적 노동 윤리를 다른 이에게 심어 줄 수 있다. 그리스도 사업가는 근무 시간에 늦지 않고 일찍 출근하여 책임을 완수하며, 퇴근 시간보다 일직 퇴근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일터 안에서 다른 이들의 본이 되기를 힘써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모든 것의 본으로 삼고, 또한 지도자로 삼아서 따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신앙의 가치관 실제 적용도 마찬가지로 예배시간에 먼저 나와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이 열고, 열려진 마음에 말씀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예배를 마친 후 쏜살같이 나가지 말고, 예배 후 교제를 통해 은혜 받은 바를 서로 나누어 한주간의 삶에 적용되어지도록 신앙의 가치관을 바로 세워 적용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윤리의 요소

토의할 수 있는 가치와 윤리 행위의 규범이 수많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 드러내야 하는 몇 가지 중요한 가치를 선별했다. 이것을 살펴보고 선별된 이 요소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할 수 있다.

a. 정 직 - (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b. 성 실 - (시 23:3~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C. 헌 신 -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d. 청지기 -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e. 섬 김 - (요 13:1-15) [4~5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f. 충 성 - (수 1장)[16~18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g. 공 정 - (행 6장)[3~4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인간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시켜 왔는가?

1)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알았나?

당신이 자신에 대하여 내리고 있는 가치관의 정의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2) 인간은 자신 스스로 답을 할 수 없으므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 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의 것들을 갖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은 우리의 인생에 가장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이다. 즉 부모․형제,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 친척들이다.

3) 우리는 이와 같이 주위의 사람들과 유입된 정보에 의거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을 가치관을 서서히 형성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 답은 또한 거의 일생 동안 사실이든지 거짓이든 변하지 않고 우리의 나머지 일생을 결정한다.

4) 심각한 문제는 그 대답의 대부분이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것이 거짓된 나의 가치관이라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관은 매우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우리 자신에게는 진정한 가치관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대답이 거짓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첫째, 그 잘못된 가치관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핸 세월에 걸쳐 실제의 삶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부인할 힘이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 자신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관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6.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케 하는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

1) 우연히 만들어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하는 인식의 가치관

①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부모에게 전혀 한 인격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단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혀 인격적인 존중을 받지 못한다거나 혹은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너는 없어져야 할 아이다’라는 식의 대접을 지속적으로 가정에서 받아 왔다면 부모가 가치 없다고 인정하는 아이가 스스로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될까? 많은 어머니들이 어머니로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귀찮은 감정을 가지고 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러기에 그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아이에게 상처를 받고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자신이란 존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남녀의 성 관계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 그것일 뿐이라는 대답 외에는…

자신을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갖지 못한다. 다만 다른 사람이 사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목표 없이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은 우연이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②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에베소서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③ 우주에 존재하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께는 우연이 아니다.

설사 부모가 타락한 생활 속에서 당신을 잉태했을지라도, 혹은 당신의 존재와 태어남이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 부모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특별한 존재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태어났다. (시편 27 :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성경은 주님이 모태에서부터 우리의 장부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실 때 아무 이유 없이 즉흥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다. 나의 존재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그분을 알기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 외에 우리 자신은 계획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 심지어 부모조차도 다만 아이를 원했을 뿐 나라는 사람을 계획한 것을 아니므로 - 타인의 눈에 우리는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다. 없어지면 누군가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 ‘가족 보건 협회’에서 내세우는 슬로건은 이런 우리의 사고를 더욱 굳게 한다.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 잘 기르자”, “한 집 건너 하나씩” 이런 슬로건을 보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의 존재가 그렇지 않다. 그분은 우리를 계획한 분이시요, 만드신 분이시요, 계속해서 책임져 가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우리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가장 기뻐하고 기대하시는 분은 세상의 부모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부모인 하나님 그 분이시다. 그러기에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아버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 : 10)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을 버릴 수 있는 것은, 비록 그들이 몸을 빌려주었을지라도 그 생명의 진정한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자는 자식을 종이 봉투에 넣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하지만 진정한 부모인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신 적이 없다. 비록 그분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분을 찾아 보라. 언젠가 당신이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았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 보다 수백 배의 노력을 기울려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를 통해 그분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지금도 그분을 당신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

2) ‘나는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고 남보다 잘하는 것 없다’라는 인식의 가치관

①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세상이 당신을 재는 기준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나의 가치관은 나 자신의 현재의 사회적 위치, 겉모양, 능력의 정도 등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관점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결정하기에 우리의 사고도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다. 세상의 기준은 획일적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에 획일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어떤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인가? 피부색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 우등한 모습인가? 어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우수한가? 등등의 수많은 기준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가고 경쟁한다. 만일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 할 때에는 낙오자가 되고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소리 없이, 그러나 확고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붙이고 다닌다. ‘나는 실패작이고 잘하는 것이 없다’라고.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은 다만 못생기고 능력 없는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성경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인물은 뛰어난 미남에다 키도 큰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된 놀라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작은 다윗에 대한 시기심으로 일생을 불태웠다. 이런 비근한 예들을 우리 주변에도 가득하다. 이로 보건대 열등의식, 실패감은 어느 특정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이것은 객관적이 사실이라기보다 오히려 내부적인 문제이며, 영적 속임수에 걸린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그런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나는 실패작이라는 생각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②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시편 139 : 14~15)

시편 기자는 시편 139:14 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승리감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기준을 재는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자로 재었을 때 자신은 실패작도 열등한 자도 아닌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③ 하나님은 당신을 만드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을 무엇일까?

그것을 결코 당신의 외모가 아닌 당신의 중심, 당신의 속 내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본질적이고 높은 차원의 것이요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확한 가치관은 당신의 현재 사회적 위치, 겉모양, 능력 등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관점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결정하기기에 우리의 사고도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다. 나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내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잘못된 결정과 행동을 하게 한다.(외모는 늙는다. 육체는 다된다)

④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실 때 실수하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 공평치 않게 하셨을까?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그런 원망이 있다면 그런 마음의 바탕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랄 수 없다. 분명히 그런 사람은 영적 불구자가 되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체험할 수 없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⑤ 당신의 외모나 신체적 약점이나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는가?

(로마서 12 :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의 말씀을 묵상하라. 우리가 마음의 중심보다도 외적인 것을 가지도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것은 분명 사단이 만든 세상의 가치관이요 세상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따르지 말 것을 분명히 명하고 계신다.

3) 나는 모든 자보다 탁월하고 우수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인식

①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비교 의식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집안에 언니와 동생이 있는데 부모와 친척들이 어려서부터 공공연하게 한 아이는 못한다 하고 한 아이는 잘한다고 칭찬할 때 칭찬 받은 아이는 자신이 세상에서 탁월하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집밖에 나와 학교를 다니며 사회생활을 해 나갈 때 자신의 탁월성을 인정해 주지 않은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반발하게 된다. 또한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기에 그런 사람이 근처에 같이 있다면 끊임없이 경쟁하여 이기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상대를 이겨서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만 평안과 보람을 느낀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평생 동안 쉬지 못하고 동정을 베풀지언정 아무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어떤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경우가 없다. 모두 각기 다른 독특성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기 그 사람만이 가지는 향기와 모습을 넣어서 창조하셨다. 사단이 임금되어 있는 이 세상은 비교와 경쟁의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이다, 주님은 너희가 큰 자가 되고 싶으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②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빌2: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마20:27-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오심

(마23:11-12)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며,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짐

7. 우리의 진정한 가치의 신분은 무엇일까?

진정한 것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과 진리는 순간적이요, 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변하지 않는 가치, 나의 변하지 않는 위대한 신분은 일곱 가지이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고귀한 자이다.

(창1: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의 신분을 주셨다.(창 2:21-23)

② 인간이 性에 대하여 마귀에게 속으면 우리의 신분은 망가진다(창 2:25)

③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는 서로가 필요하며 대단한 신분이다(창 2:24-25)

둘째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바꾸실 만큼 가치가 있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자이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셨다(히 10:10)

② 사랑으로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간의 불법과 죄를 다시 기억치 않으신다(히 8:12. 10:17)

셋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①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사람이다(고전 3:16-17. 고후 6:16, 18)

②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살전 4:3, 7)

③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후 7:1)

넷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로 사용하기 위해서 택하셨다(베드로전서 2 : 6)

②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택하셨다(출애굽기 19 : 5)

③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택하셨다(벧전 2 : 9. 시편 96 : 3)

다섯째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간다(히브리서 10 : 19-22)

②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로마서 8 : 15)

③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다.(히브리서 4 : 16)

④ 무엇이든지 아버지에게 담대하게 구할 수 있다(요한복음 16 : 23)

⑤ 지은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다(요한일서 1 : 9)

⑥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여섯째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을 받았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① 하나님의 자녀는 상속권이 주어졌다(롬 8 :17 )

② 하나님과의 관계는 호적 관계이다(롬 8 :15)

③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접 교제가 이루어 진다(히 10:19-20)

일곱째 나의 위대한 신분은 영에 속한 거듭 난 자이다.

(고전 2:14-15)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①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히브리서 10:19-20)

②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응답을 받는다(요 15:5, 7)

나의 진정한 가치의 신분 일곱 가지, 이것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이며 변할 수도 없다. 이 가치 높은 신분을 알고 내 것으로 삼는 것은 치유의 기초이며 성숙의 기반이다.

이런 가치의 신분증은 내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내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또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을지라도, 사회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지라도 결코 변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고 빼앗길 수 없는 신분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가치의 신분증이기 때문이다. 이 신분증을 깊이 인식하고 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야 한다.

8. 피해야 할 함정

매일 직장이나 사업 터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버리거나 변화하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런 덫을 알고 피할 준비를 해야겠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압박감, 순간적 편의, 두려움과 다른 요인이 우리가 알기도 전에 우리를 삼켜 버려 적(사단)이 쳐 놓은 덫에 우리를 빠뜨린다. 다음 피해야 할 몇 가지 함정이다

① 누구나 보통 잘못된 가치관으로 다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거의 잘못된 가치관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맞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며, 고치기가 싫어서도 그냥 그대로 다 살아가고 있다.

② 잘못된 가치관으로 살아가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살아가도 많은 사람들은 내 가치관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③ 남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살아가고 있고, 또한 잘못된 가치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되고 성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이다.

④ 타협 -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잘못된 가치관을 한번 실행해 보자.

잘못된 가치관이라도 별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 속에 실행을 하다가 결국은 잘못된 가치관속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⑤ 그들도 나의 잘못된 가치관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내 덕을 보고 있다.

나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어도 나의 일과 사업을 통하여 그들도 나의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함정에 빠져 헤어나기 힘들게 점점 깊이 베어들기 시작하면 다시 바꾸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9. 가치관(윤리, 정직)을 실제로 적용하기

1) 자기 개인의 가치관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관이 무엇인줄 아는가? 자신의 가치관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오면 자신 스스로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 놓은 다양한 가치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어떤 가치는 항상 다른 가치에 비해 우위를 차지한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재조정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적절히 응답하도록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집회의 일부를 가치관 활성화하는 시간으로 종이 위에 자신의 가치관을 적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실제 해야 한다.

2) 자기 개인의 행동 법규

미국사관학교 규범은 다른 많은 사람의 규범과 비슷하다. 단어로 정리가 되는데 “임무, 명예, 나라”이다.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각 군사 학교마다 행위규범이 있다. 이 규범은 우리의 안전성과 책임감에 대한 이해와 위험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도와준다. 우리의 개인적 행위 규범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사업가와 경영자로서 우리는 자신이 개인적 행위 규범을 갖도록 추천한다. 지금 자신의 개인적 행위 규범을 한번 설정하라.

3) 자기의 말이 자기 보증서이다(약 3:5-12)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말이 보증서였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자신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환경에 무관하게 그 말을 지켰다. 그래서 언약관계가 전쟁을 방지하고 보호를 베풀고 사업관계에서 도움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말이 보증서가 되는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자신이 비록 말에 책임을 진다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서명할 것을 원하고 증인을 세우고 공증을 한다. 이 보든 일이 사람들이 말로하든 글로 쓰든 그들의 말을 바꾸든지 철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업가들이 자신의 말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성경에서 극명하게 밝혔듯이 “우리의 고통에 맹세하는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희생을 치르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정직함의 기본이 된다. 우리가 하는 말은 행동과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 속담에도 男兒一言은 重千金이고 一口二言은 二父之子라.

* 성경에도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지마라고 하였다.

자신의 말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말고 환경과 조건에 무관하게 꼭 지켜라!

 

과정4 성경으로 본 바른 인간 이해(고전 2:9-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나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아가자”

(고전 2 : 9-16)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과정의 목적 -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바른 진단이 있어야만 하고, 마음에 대한 바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을 가장 바르게 이해시키는 지침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인간을 이해하지 않으면 바른 진단과 바른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 강의는 성경적으로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여 치료를 위한 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이것은 철학의 중심 주제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 그 현상을 안토니 후크마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인 실체 존재론에 관한 문제들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대신 인간 자체에 관해서는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인간에 대해 집중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근원 자에 대한 관심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새로운 인본주의적 인간관을 갖게 한다. 이런 태도는 출발부터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바른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인간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바른 인간론의 정립이 매우 중요하다. 바른 인간론의 정립이 있어야만 인간의 고장 난 부분에 대하여 바르게 치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론을 정립한다는 것은 나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나를 찾는다.’ 이것은 누구나의 목표이지만, 어떻게 찾는가에 대한 이 “어떻게”가 중요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나를 찾는 방법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 안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와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인간의 이성은 과학적 사고방식, 즉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한다. 증명되고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리고 이성의 범위에서 납득이 되는 것 외에는 믿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는다. 신의 존재 또한 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의 범위에서 납득 할 수 없으니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마치 하루살이가 이 세상에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 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손에 있는 수억의 세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일찍이 가졌다. 적어도 현미경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러다가 현미경을 통해서 세균의 존재를 확인한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에 대해서는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신을 배제한 채 인간을 알아보려 하는 모든 시도는 잘못된 인간관을 정립시키고, 잘못된 인간관은 잘못된 자신관, 그리고 잘못된 인생관을 만들어 낸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를 찾는 방법은 무엇인가?

또 다른 나를 찾는 방법은 성경에 있는 대로 뿌리를 찾아가는 ‘족보를 통한 방법’이다. 성경을 그 몇 천 년이나 걸린 인류의 족보를 어느 책보다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처음 출발이 어디에서부터인지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인간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라, 먼저 있던 존재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 사고방식으로 말한다면, 나를 알기 위해 시간상으로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알 수 있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일 자기보다 먼저 계신 존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현재 있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으니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면, 바로 나의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고 결국은 나의 존재 또한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그 이전 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순 속의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면 이런 사고는 어떤 결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현재 나의 존재는 인정하되 나보다 앞선 자들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인간을 스스로 존재하게 된 신과 같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지 않은 모든 신의 모습은 비슷한 공통성을 가지는데 하나같이 악하고 잔인하며 주고받는 것에 철저하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인간의 타락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찾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며 논리적이다. 모든 미신과 사교는 그 스스로의 모순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에 논리성이 결여된 반면, 성경적 사실과 진리들은 정확한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분이 성경을 쓰셨기에, 인간의 논리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뿐 모순은 없다. 당신이 당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 나가고 싶다면, 당신 마음 속 엉켜진 실타래를 기어이 풀고 싶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정함 객관적으로 정확히 알고 싶다면, 당신은 성경을 지침으로 당신을 찾아야 한다.

1. 정상적 인간이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척도는 어떤 것인가? 그 척도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적응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이 자랑하는 것은 “권력, 명예, 그리고 지혜와 재물”이 많을 때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살펴볼 때, 이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들 중에는 결코 정상으로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 많았다.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정상으로 볼 수 있을까?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 성경적인 척도는 어떤 것인가? 성경적인 척도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다림줄에 의해 재어진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인류 역사이래 오직 한사람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른 인간의 삶에 대한 다림줄, 즉 척도로 삼으시다.

2.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정상적인 인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인간 내면 모습을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타락 전의 인간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인간은 그 안에 있다. 영이신 하나님은 권위를 가지고 인간의 영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오는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혼을 다스리며, 혼은 또 몸 된 부분인 육을 다스린다.

이 사람 안에서 은 어떤 부분을 차지하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영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 안에만 두신 특별하고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중심이요, 근본이다. 이것은 영원불멸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짐승에게는 결코 없는 유일한 부분인 것이다. 이 영은 마음 안에 모든 바른 지혜를 제공해 주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한다. 마음만으로는 결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이 있기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 안에서 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몸이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부분이다, 이 몸이 있기에 같은 차원이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본능은 몸을 지탱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온도가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감지해서 온도를 높여 주는 조절기처럼, 본능은 우리 몸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채우게 한다. 몸 안에 물이 필요하면 갈증을 느끼고 음식이 필요하면 식욕을 느낀다. 만일 인간 안에 본능이 없다면 인간의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본능은 하나님의 지으신 몸을 위한 기능일 뿐,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을 다스릴 때 영은 마음을 다스리고, 건강한 상태의 마음은 몸을 잘 다스려서, 결국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이 사람 안에서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마음은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인간 안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차원, 즉 영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특이성이 있기 때문에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이 필요하다. 영이라는 차원은 도저히 몸이 속한 물질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영에 속한 것은 하나도 볼 수 없다. 마치 점이 선이라는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이 면이라는 자신보다 더 높은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물질에 속한 눈은 공존하고 있는 영의 세계를 전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더 낮은 차원인 육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안다.

(고전 2:11)“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고전 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

(고전 2: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인간 안에 영과 육이라는 두 부분이 공존하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신비다. 바로 이렇게 공존하는 두 개의 다른 차원을 이어 주는 부분이 마음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물질의 세계에 영적인 것들을 나타낸다. 영은 건강한 인간의 마음을 청하여 영적으로 건강한 것들이 나타나며, 부정적이고 사악한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영적으로 악한 것들, 즉 사단의 실제가 나타난다. 우리는 온 세상이 얼마나 환경적으로 파괴되어 가는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 하는지를 보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사단에게 점령당할 때 그는 세상을 파괴시키는 일은 자연스럽게 행한다. 과학자라면 과학자의 위치에서, 선생이라면 선생의 위치에서 세상과 인간을 파괴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일 수도 있고 다만 자신의 이기 성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나, 어느 것이든 결과는 같다. 나아가, 인간의 영이 사단에게 점령당할 때 훨씬 더 끔찍한 악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영적인 접촉을 엄중히 금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런 어두운 영적인 세상에 대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들은 지나친 관심들은 가지고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3.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내면은 다음과 같이 변화시켰다.

육적인 본능이 주인이 된 사람

혼적인 영역이 주인이 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는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한다. 육적인 본능이 그를 이끌어 가든지, 아니면 혼적인 부분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 크고 작은 점들을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인생의 일들이다. 하나같이 혼란과 무질서 속에 있다. 의자는 그의 중심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은 본래 영이라는 부분이 차지해야 하지만 이제는 육적인 본능이나 아니면 혼적인 부분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마치 호랑이가 없는 숲에 여우가 왕노릇 하는 것과 같이.............

이 사람 안에서 영은 어떻게 변화되었나?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한 즉시 인간의 영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다.(창세기 6:3) 그 결과 인간의 영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모든 기능 즉 자신을 돌 볼수 있는 기능과 능력을 상실해 버린 채 인간 안에 죽어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영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인간에 눈에 보이는 죽음은 인간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일 뿐이다. 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죽음이 이미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의미하지만,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혼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전도서 12:7)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이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돌봄이 없는 혼자의 상태에서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하는,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 비참함과 잔인함과 무서움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죽기를 구하여도 죽을 수 없는 곳이 그곳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 안에 영이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과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인간의 근본 핵심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인간의 마음과 몸은 마치 지휘관을 잃어버린 군대처럼, 운전사 없이 달리는 자동차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이 왜 존재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며 무언가를 결정하려는 마음의 수레바퀴는 돌아가지만 방향도, 기준도, 목표도 없다.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신이란 존재가 지금도 살아 있고, 움직이고, 말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마음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나의 이런 생각은 누가 알고 있는가?’ '나의 끝은 어디인가?‘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나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 간절한 물음은 있으나 대답은 전혀 없는 이 무서운 허무 앞에 인간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빈방의 거울 앞에서 타인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들! 왜 있는지 모르는 채 존재하는 자신을 위해서 혼자서 보고 있을 뿐인 인간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지은 창조주를 버린 인간이 당하는 가장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것은 인간이지만, 오히려 버림받은 느낌과 두려움 속에서 찢겨지는 것은 인간이다. 이 버림받은 비참함을 잊기 위해 인간은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사랑도 인간 안에 있는 이런 버림받은 느낌을 지워 주지 못한다. 분리되어 영원히 혼자 떠도는 인간,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전형적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이 나갈 길은 두 가지라고. 고독 속에서 죽든지 미치든지. 이런 인간의 곁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거짓된 메시지를 주입시켜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4. 총체적 인간에 대해 구속의 역사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그를 믿는 사람의 전체를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갖는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각각의 시간이 다르다.

1) 영 : 거듭남, 성령의 내주와 충만 거듭남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는 인간의 시간으로 잴 수 없이 즉각적이다. 죽어 있던 인간의 영이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즉시 살아나게 된다. 이 일은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선물과 같은 것이요, 온전히 그분에게 값없이 받는 것이다.(요 5;24) 또한 하나님은 예수를 영접한 자의 영 안에 성령님을 모실 수 있게 하였다.(요 14:16-17) 성령을 그 사람에게 놀라운 권능을 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키우는 일을 시작하신다.

2) 혼 : 마음의 치유, 새로운 건축 그 다음 인간의 혼에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 인간의 혼, 즉 마음은 부패하고 깨어져 있기 때문에 치유와 성장이 필요하다. 이 치유와 성장은 영의 변화처럼 즉각적이지 않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인간 안에 이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심으로써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 안에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열매가 맺도록 하신다. 아무리 깨어진 인격이라 할지라도 성령을 변화시킨다. 마음의 변화는 인간 안에 영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나타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육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령한 몸. 인간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 인간의 몸은 영과 혼이 죽어 가고 병이 들어감에 따라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약해지고 병이 들고 죄의 도구로 쓰여 졌다. 성령은 그 몸을 치료하시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되게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인 것이다. 영, 혼, 육의 모든 부분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그 분을 계획하셨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인간의 마음이다. 이 곳은 구원을 받기 이전에 나의 자아가 지배해 온 곳이므로, 마음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서는 자아가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만일 자아가 마음을 새롭게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를 계속 거부한다면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옛 성품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성품은 옛 성품을 그대로 지닌 채 말과 은사적인 능력만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게 되며, 결국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능력 또한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행복과 풍성한 삶은 다만 약속으로 존재할 뿐 자기의 것이 되어 누리지 못한다. 마음이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모두가 마음이 깨어져 있고 심히 부패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치유되어야 하고 고쳐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다. 마음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시는 내적 치유는 십자가 은혜의 결과이다.

5. 마음의 치유를 간과할 때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굴곡된 모습들

1) 얼굴은 웃고 마음은 우는 가면을 쓰는 신앙생활

수년 동안 내적 치유 사역을 감당하면서 실감하게 된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많은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주일이면 거의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고, 일주일의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여러 가지 질병과 신경성 증세로 시달리고 있었고,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랑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두려움이 그들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도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결국 비 그리스도인보다도 더 문제가 많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대로, 즉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고 사랑하기 싫으면 안 만나면 그만인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미워하고 싶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사랑할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깊은 갈등과 죄책감이 누르는 것이다. 예전에는 화가 나면 술 한 잔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나쁜 짓을 하면서도 아무 죄책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화가 나도 그렇게 풀 수가 없다. 화가 나면 그것을 주님의 방법대로 풀어야 하는 것을 배웠지만, 문제는 그렇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아는 것은 많아지고 요구도 늘어났는데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별로 없는 것이다. 이 안에서 가중되는 죄책감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한다, 계속되는 죄책감은 우리의 신경을 힘들게 하고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죄책감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자신 있는 결정을 하기 어렵다, 인생을 주도하는 자세가 되지 못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당연한 하나님의 체벌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운명론자와 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또한 신경증 증세가 나타나며, 신경의 피곤함과 예민함은 육체의 질병을 가져온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쉬지 못한다. 그래서 아예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쉽고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항상 느낀다.

2) 일반 심리학에 의존하는 교인들

마음의 문제가 발생할 때 교인들은 이제 교회보다도 일반 심리학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적인 부분을 도와주는 곳이다. 천국에 대해 말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곳이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하고 약한 자들은 정신과에서 맡아야지 교회의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고. 그들은 오히려 이런 전인(내적) 치유라는 부분에 대해 거부감까지 일으킨다. 이런 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은 태도일까? 물론 정신과를 찾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가 일반 병원을 찾는 것처럼 정신과 병원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의 태도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외치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만 유독 “그것을 정신과 영역”이라고 하는 태도는 참으로 모순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신학자 모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러한 현상은 복음주의 종교가 자기의 장자 권을 심리학이라는 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어리석음과 같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약한 것과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함이라 하셨다. 육신의 질병보다도 마음의 갇힘과 깨어짐과 상함을 치유하는 사역에 대해 더욱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육신의 질병의 원인 중 80% 이상이 마음의 아픔에서 온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마음의 아픔을 치료하기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을 고치는 성령의 이러한 사역이 교회 안에서 능력 있게 일어나지 못할 때 교회는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형식과 의식만 남은 껍데기가 되어 버리고, 결국 우리의 교회는 날 때와 죽을 때만 찾는 서구의 교회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서구의 교회가 GNP가 높아져 비어져 간 것이 아니다. 교회가 형식만 남느냐, 주님으로 충만 하느냐를 확인하려면 청소년을 보면 가장 예민하고 민감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를 이해한다면 마음을 고치시는 성령의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간과하고 인간의 행동을 판단한다면 인간을 보는 관점은 영적인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극단적인 눈으로 인간을 판단할 때 교회는 흔히 귀신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로 판단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자들에게 잘못된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누군가의 행동이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간단히 귀신의 역사로 보고 계속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만을 하게 된다. 내담자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이미 귀신들린 자의 말이 되어 신빙성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기에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야단치고 호령하고 판단한다. 문제는, 이런 과정 속에서 내담자가 스스로 귀신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은 더 큰 이차적 문제를 그의 마음 안에 던져 놓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안의 귀신과 싸우는 투쟁이 삶이 된다.

중세의 마녀 화형을 생각해 보자. 기독교가 교세를 크게 떨쳤던 중세 때에 많은 자들이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을 당했다.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버려졌다. 그들에게 마귀 들린 자라는 판단을 내린 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세의 암흑 시대에는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읽혀지지 못했던 시대였다. 결과는 신앙의 무지를 발생시켰다. 성경적인 신앙의 성숙 대신 교회의 권위가 성경을 앞지르고,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어 신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이 치러졌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볼 때 중세의 마녀 화형은 가장 미성숙한 신앙의 바탕 안에서 미신과 속임수가 신앙이란 탈을 쓰고 행한 어리석음이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마귀가 있고 귀신들린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이상하게 입은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옷도 멋있게 입고 많은 지혜를 갖춘 점잖은 모습의 사람 속에 더 많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그 시대의 뭇 백성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들에 대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가롯 유다가 얼마나 지혜로운 자였는가?

신앙이 어릴수록 흑백 논리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짙다. 조금만 미심쩍은 일이 있으면 귀신의 역사라 하여 귀신 쫓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귀신이 들렸다고 판단하는 것, 이것은 가장 조심스럽게 판단되어야 하고, 그렇게 판단되기까지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분별력 있는 마음으로 성령님께 물어 보아야 한다.

욥의 친구들을 우리는 좋은 친구들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욥의 곁에서 7일간을 밤낮 함께 있으면서 욥의 말을 경청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물과 같다,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 마음속의 깊은 우물을 아시고 그 눈물과 분노의 원인을 아신다. 우리가 우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이 상해 버린 것 또한 죽을 죄가 아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런 자를 위해 오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런 자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는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주님의 치료의 도구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심리학자들에게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들은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적어도 어떤 교회들처럼 자신이 가진 짧은 신앙의 상식으로 판단해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담자의 말을 들어보며, 왜 저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쌓아진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학설을 정립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에 대해 놓쳐 버린 교회는 그 심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에 대한 보고서를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자 할 때 교과서처럼 참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정신적 문제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더 잘 안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렸다.

이제 교회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심리학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 성급한 판단을 피해야 한다. 만일 정신병, 즉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병에 대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깊이 이해해 보려는 노력 대신에 교회는 단지 영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곳처럼 된다면, 결국 영적 해결도 온전히 도와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과 마음이, 그리고 육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대한 바른 치유가 없이 영적인 부분만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종교인들

신약 성경의 거인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 사울이었을 때,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율법 학자로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율법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삶을 오직 그 일에 바칠 만큼 어리석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지식을 쫓아다니는 자였을 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아니었다.

주님이 자신의 양들을 맡기실 때에 그 자격 기준을 무엇으로 삼으셨는가?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는 주님과 친밀한 친교를 가지고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나 사실은 하나님을 몰랐던 종교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멸시하고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도 알 수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 선물을 받을 특권이 있다. 그런데 왜 알지 못하는가? 자신 안에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부패한 생각과 마음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아 고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원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하게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기에 의원에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다만 그 분에 대한 정보만 가지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6. 우리는 마음의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첫째는 잘못된 죄를 회개케 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미움을 허물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치유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다. 성령은 이일을 어떻게 하실까?

1. 성령은 잘못된 것을 허무는 일을 하신다.

1) 아무리 오래된 과거 속에 숨겨진 일일지라도 직시하여 치료하게 원하신다.

기를

어둔

구덩이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아픔과 상처로 인해 깊이 패어진 부분을 가리킨다. 이 구덩이 속에는 감추고 싶은 모든 것들이 쓰레기처럼 들어 있고, 그 위에 단단한 바위를 덮어 두어 보이지 않게 깊이 감춘다. 그리고 그 일은 없었던 것처럼 건너 뛰어간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바위를 치우고 그 사건을 직시하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악한 힘을 가지고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제 우리 혼자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기를 원하며, 그것을 바르게 처리하여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잘못된 것을 숨기기 위하여 스스로 만든 거짓된 피난처를 파괴하기를 원하신다.

(예레미야 30 : 12-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함이어 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 이러한 파괴이기에, 그 상처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처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고 정직한 회개의 기도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스라엘의 거짓된 피난처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열심 있는 종교 행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기를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금식을 했기에, 자신들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 가장 은밀한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이셨다. (에스겔8:10)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말씀에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 그곳은 겉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었으나 아무도 안보는 깊은 밀실에서는 온갖 우상의 그림이 그려지고 영적 지도자들은 그것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마음에 품는다. 그것이 그의 행동 동기가 된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우상 숭배인가 아닌가 하는 판가름이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느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느냐에 따른다고 생각을 했다. 어느 쪽에서 하면 하나님은 더 좋아하시고 더 정통으로 생각할까? 그래서 사마리아의 목마른 여인은 주님께 그것을 물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이 암실, 즉 자기만 아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에 기초를 드러내시겠다고 계속 경고 하셨으나, 사람들은 계속 자신들의 우상 숭배의 마음에 회칠하며 평안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열망시켰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들이 멸망당한 것은 그들의 마음의 동기와 그 속의 숨은 죄악 때문이라고.

(겔 13:10-14)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우리의 집은 삶의 방식이요 밖에 나타나는 생활이라면 많은 자들이 자신의 지은 집을 자랑하고 주님께 와서 나는 이런 일을 했다고 말하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삶의 방식대로 그 기초석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면 무너짐이 심히 크다고 하신다. 우리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파괴하시기 전에 우리 자신이 우리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아가 거짓된 것을 회개하고,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다림줄의 기준으로 살기로 매일 결정하는 것이다.

전인(내적) 치유는 삶의 방식의 변화이다. 내가 상처를 받은 이유는 잘못된 삶의 방식을 갖고 권위자가 되어 행하기 때문이다, 방식 이 자체가 변하지 않는한 치유는 계속 되지 못한다, 독이 든 씨앗을 끄집어내 주신 이후에 주님은 양파 껍질 벗기듯이 우리를 계속 주님의 다림줄에 맞는 삶으로 살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파도가 치듯이 정신없는 흔들림과 괴로움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당한 괴로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괴로움은 점점 주님을 이해하고 알아 가게 한다

2. 성령은 바르고 새롭게 건축하신다,

1) 새로운 삶의 머릿돌을 놓아주신다.

(사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주님은 우리 삶의 머릿돌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은 마음에 모시고 있을 뿐 여전히 삶의 기초와 태도는 예전에 행하던 대로 산다, 이것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이다. 성령께서는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시고 건축하게 하신다.

(렘 32:37-44)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거짓된 평화의 환상, 즉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리고 절기를 잘 지켰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하시고 우리를 더 평안하게, 배부르게 해주시겠지 생각할 때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인 환난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반박했다. “아니다 우리가 잘 믿는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환상을 보이셨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기다리는 그날은 너의 복된 날이 아니라 재앙의 날이라고 하셨다, 결국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철저하게 죽임 당하고 비참하게 파괴되어 , 이제는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을 보면 희망을 가질 수 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다시 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왕도 끌려가고 땅도 적의 땅이 되어 버린 그곳에 밭을 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건축과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거짓된 삶의 방식과 기준이 무너질 때 이제 나를 감쌀 모든 것이 없어졌기 에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은 절망하고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낙담하지만, 오히려 그때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 바르고 새롭게 삶을 건축하도록 도우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파괴하시는 것은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요. 새롭게 건축하시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알게 지혜를 주신다.

(렘 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잠 14:8)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지혜를 받게 될 때 속사람은 성장한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의 선물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다.

3)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이 성장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이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과 정 5 쓴 뿌리 발견과 제거와 용서 (히12:14-17 )

 

“내가 용서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선포하자”

 

(히 12:14-17)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후 2:10-11)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인격 모독이나 통렬한 실망을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심겨진 사탄의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성품과 내면에 악 영향을 일으킨다. 이런 일은 가족들 속에서 시작되는 일이 매우 흔하며, 온갖 종류의 반역과 완악함과 이기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 쓴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용서뿐이다. 용서는 내면적인 상처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통과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에게 아픔을 준 자들로 말미암아 심겨진 마음에 쓴 뿌리와 그들을 향하고 있는 미움의 매듭이 풀어질 때에 성령의 빛이 우리의 내면 속으로 들어와 치유의 역사와 변화를 일으킨다. 이 과정의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가 다른 사람과 벽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묵상해 본다.

1, 용서 할 필요가 있는 마음이라면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있을 것이다.

1)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2) 용서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관심은 기대하지만 감사는 나타내지 않는다.

3)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판단한다.

4) 어떤 사람과 친구로서 우정 관계를 맺을 때 소유욕이 강하다.

5) 표면적으로만 행복할 뿐 내부적으로는 대단히 예민하고 까다롭다.

6)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데 대인 관계에 극히 조심성을 기울인다.

7)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고통을 받았던 때를 상세히 기억한다.

8) 그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분노와 고통을 느낀다.

9) 그 사건을 기억하며 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데 사용한다.

10)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2, 왜 용서 해야 하는가?

1)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나 자신에게 체험되지 않는다. (마5:24, 마6:12, 마 6:14-15) 미움이 내속에, 증오가 내속에, 저주가 내속에 차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 내가 남을 미워하고 분노할 때 아드레 날인이란 해로운 호르몬이 분비되어 나를 헤친다. 내가 남을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다.

2) 용서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로 말미암아 실의에 빠져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들의 불쾌한 행동과 태도가 자꾸 생각나서 우리 마음은 점차 나쁘게 굳어져 가고 쓴 뿌리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주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빛이 임할 수 없으며 어두움의 세력이 더욱 깊어만 가는 것이다. (시 37:1)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고 (롬 12:19)에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다. 나의 책임은 용서하는데 있다. 심판(진노)의 영역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3)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상대방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되기 때문에 결국 그를 닮아가게 되고 미워하는 대상은 결국 둘이 되고 만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면 결국 나도 상대방과 같은 사람이 닮아가는 내 자신이다.

4) 용서하지 않으면 죄의 파생을 끊을 수 없다. 부모에게 가장 싫다고 느꼈던 태도를 어느 사이에 자신의 자녀에게 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그 부모의 가장 싫은 태도를 그대로 닮은 것이다. 술 중독자인 아버지의 술 마시는 것을 증오하며 성장한 아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술에 의존하게 되고 술 중독자가 되어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리하여 대를 이어 그 가정의 비슷한 죄가 전해진다. 이것은 삼사 대 까지 저주를 받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필연적 자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5) 내가 용서하고 있지 않는 한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상대와 그러한 상처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환경 아래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거나 없어졌을지라도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입은 상처는 내가 용서하지 않은 한 내 속에 있는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분노가 떠오르며 잘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6)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모임이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킨다. 교회 안에 있는 파장도 분노와 시기, 질투, 보복,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일으키기 쉽다. 교회와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고 불의의 병기이다. * 교회의 총회, 노회, 제직회서 “법이요”라는 법 주장 이전에 자기 생각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생각하라!

7) 미움의 쓴 뿌리가 자라면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계속 계발되지 못한다. 은사가 적용될 부분이 없어진다. 나무는 접붙이는 시기(그루터기)와 때가 있다. 은사가 임할 터전이 있어야 한다. 쓴 뿌리가 있으면 은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결국 조금 사용하다가 식어지고 강하게 역사하지 못한다.

8)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갈5:22의 성령의 열매를 기억해 보라. 내면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 외적 사역은 할 수 있지만 이런 내면의 열매는 결코 맺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이 길가 밭, 돌작 밭, 가시덤불과 같아서 말씀은 듣고, 은사는 나타나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

1) 용서란 상대방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 때리는 것이나 타이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 것은 눈감아 주는 것은 피하는 것이다.

2) 잘못 행한 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3) 상대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고 자신만을 자책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단히 인격적이고 너그러운 태도 같지만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실생활을 보라 대개의 경우 그들의 속마음은 사람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 채워져 사람을 싫어하게 되며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느 경계선까지만 사람을 사귄다.

*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은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4, 용서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1) 상대에 의해 우리 자신에게 가해진 구체적이고 명확한 잘못을 직시한다.

즉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의미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먼저 그 가해자가 우리 자신에게 어떤 잘못과 해를 끼쳤는지를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2) 상대에 의해 내 마음에 생긴 상처와 고통을 직시한다.

이것은 그 일로 인해 나의 감정이 어떻게 상해졌는지를 직시하는 것이다.

3) 상처받은 나의 마음의 분노를 직시하고 인정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억압이라는 놀라운 작용이 있다.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분노조차 내지 못하고 그것을 마음 속 깊이 숨겨 버리는 것이다. 그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않을지 모르나 그 분노는 엉뚱한 상대를 향하여 표출되기 쉽다(속담. 남산에서 뺨맞고 용산 가서 화풀이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향해질 때는 극심한 우울증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과가 아주 좋지 않고, 해결도 어렵게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울해졌는지, 분노가 무엇 때문에 처음에 생겼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다만 분노 자체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사건과 그 가해자에 의해 내가 받은 피해를 직시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분노를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분노의 감정이 있다는 것 자체로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감정의 바른 처리이다

4)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생각하며 그 십자가 앞에서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겠다고 내가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고백한다.

5) 심판과 판단을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를 용서하겠다고 입으로 시인한다.

6)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주님께 자백하고 깨끗하게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라

5, 용서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① 나의 감정의 변화 감정은 생각의 결과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상대방에 대한 사건이 정리되면 감정은 결국 따라 온다. 용서하면 미운 감정은 사라진다. 감정부터 없애려고 하면 안 된다. 그 감정은 그를 보는 순간 다시 생기게 된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면 미운 감정은 자연히 사라진다. 감정은 즉시 따라 오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생각나기도 하기 때문에 용서했지만 즉시 미운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결국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남을 용서 할 때 상대방에 대한 미운 감정을 없애 주신다.

② 상대방의 감정의 변화(잠 21:1) 내가 당신을 용서했으니 당신도 나에 대해 좋은 감정으로 변해야 한다는 요구는 억지이다. 상대의 감정은 내 권한 밖의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상대의 감정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 하나님만이 상대방의 감정도 변화를 시킬 수 있다.

2)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상대가 잘못을 행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나 자신이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나의 감정이 변하는 것 또는 상대방의 감정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을 만들려고 노력하거나 이런 감정이 올 때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평생 쓴 뿌리를 마음에 가득 간직한 체 아무도 용서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하루에 일흔 번식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명령을 하신 것을 보면 내가 원해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감정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여 용서하기로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도우셔서 결국 감정까지도 완전히 그 미움과 묶임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상대를 보복하고자 하는 감정을 억제하고 용서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생명을 내려놓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르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은 더욱 큰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자유를 얻는 것이 축복이다.

6. 왜 용서하기 어려운가?

1) 상대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계속 자리잡고 있을 때 용서하기 어렵다.

2) 내 안에 같은 죄가 있을 때 정죄의식이 강해져 용서하기 어렵다.

3)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몰라 내가 하나님 대신 심판하려는 마음이 용서를 가로막는다.

4)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할 때 용서하기 어렵다.

5) 용서한 후 결과에 대해 불안하기에 용서하기 어렵다.

* 용서를 막는 두려움에 대해 로렌 커닝햄은 “이 두려움이란 내가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앞으로 더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용서는 당신이 장래에 받을 상처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용서의 행위는 정서적인 치유를 가져와 당신으로 하여금 장래에 받게 될 상처들을 견딜 수 있도록 당신을 충분히 강하게 해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용서라는 문은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 문이다. 하지만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치유와 성숙이라는 문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7. 용서의 3가지 방향

1) 하나님께 먼저 당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 (롬 5:8)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이 이미 용서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비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리스도인의 죄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더 깊은 관계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죄는 예수 영접하며 죄인임을 고백할 때 용서 받지만 매일 짓는 죄는 반드시 자백이 있어야 용서가 된다.(요일1;9)

2) 당신 자신을 용서하라

마 22:3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셨는데 당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만과 불 신앙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심과 같이 당신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당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학대하고 비하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서운 거역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악을 용납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당신도 자신을 그대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한다. * 어떤 자들은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한 교도관이 되어서 죄를 짓고 실수를 한 자신에게 마음의 채찍을 내려치고 고발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심과 같이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계속 죄책감에 머물러 자신을 비하시키고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신앙과 인격은 다 공사 중이다. 또 병든 사람들이다. 치료 중에 있다. 주님은 나의 이런 불완전한 모습을 용납하시고 치료하시기 원하신다. 자신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학대하는 것과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불 신앙적 태도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회복하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을 용서해야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한다.

3)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마 5: 43-47, 22 : 39. 롬13: 9하-10)

(시편 37: 7-11) “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 37:37下)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마태복음 18:21-35)

21-22절---형제가 범죄하고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24-34---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

35절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큰 용서와 사랑을 입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누군가를 용서해 줄 차례이다.

*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나도 남을 용서해야 당연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미움의 화살을 쏘면 나는 사랑의 대포를 쏘고 누군가가 나에게 미움의 쓴잔을 마시게 한다면 나는 사랑의 홍수로 쓸어버린다는 적극적인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8, 어리석은 자의 원망이 있다.

어떤 자는 나에 대한 권면이나 깨우침을 주는 진리의 말을 해 준 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원망하는 자가 있다. 이런 경우 만일 지적 받은 부분에 대하여 자신을 감추지 않고 직면하여 바라보며 새롭게 되기를 간구한다면 그 상처는 빠르고 깨끗하게 회복된다.

9, 지금 용서의 단을 쌓으라. (* 지금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갖자!)

1)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조용한 음악을 틀어 주며, 인도자는 맨트를 통해 어떤 사건들이 생각나게 되도록 도우라)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상대의 행동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를 향한 나의 태도를 지금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를 나 스스로 재판하고 판결하는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것이다. * 표면적인 사건보다는 지나가 버리고 깊이 묻혀 버린 사건들이 더욱 당신이 용서함으로 해결해야 할 사건일 수 있다. 이런 결박 된 사건들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기도하라.

2) 그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직시하라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하였을지라도 어떤 경우에 감정은 여전히 그에 대한 미움이 씻어지지 않고 있을 수 있다. 그 감정과 상관없이 바른 선택을 지금하라. 이것은 결코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바른 행동이다. (이때는 음악을 좀더 크게 틀어서 자신의 감정이 남에게 의식되지 않도록 해 주고 맨트를 통해 감정이 더 우러나도록 해 주라)

*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잘못과 해를 끼쳤는지를 분명히 파악해야 무엇을 용서할 것이며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마음에 상처를 주어 나의 감정이 상했는지 직시해야 나의 그 상한 마음과 분노가 치료된다. 우리의 의식 안에는 억압이라는 작용이 있다.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조차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때로 엉뚱한 사람에게 표출되기도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향해질 때는 우울증과 혐오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의 상한 감정이 그대로 직시해야 치료가 쉽다. 감추지 말라

3) 그 대상과 그 행동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표면적인 사건보다는 지나가 버리고 깊이 묻혀 버린 사건들이 더욱 자신을 용서함으로 해설해야 할 사건일 수 있다. 이런 결박된 사건들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기도하라 !

(이때는 음악을 크게 틀어 주어 자신의 토설이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해 주어라 - 맨트로 도우라)

* 상대방이 나에게 가한 상처나 해를 주었던 것을 주님께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토설하라 그 당시 당했던 솔직한 심정으로 토설하라. 상처를 준 대상이 지금 자기 앞에 있다고 상상하고 그에게 그 상한 감정을 토설토록 하라 그리고 토설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되면 성령께 기도해서 예수님이 그 상처받았을 때 어디 계셨는지 물어 보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그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줄 것인가를 예수님께 물어 보게 하라.

4)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대상과 그의 행동을 용서하기로 선택하라 .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용서해야 할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라. 상처는 막연하게 생기지 않는다. 분명한 아픔과 사건의 요인이 있다. 용서할 때도, 그 사람 전체를 용서한다고 하기보다는 그 상대방의 어떤 태도, 혹은 어떤 일부분을 구체적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 어른이 된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받을 당시의 어린 그 상대를 용서한 것이다. 현재 자신이 보기에는 지나간 그 사건은 심히 유치해 보일 수 있으나, 그 당시 그 일을 겪은 것은 유약한 어린아이였고 그 아이에게 그 사건은 심각한 것이다. * 이때 상처를 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축복한다. 이때 용서가 도무지 안 되는 사람은 더 토설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말씀에 순종해서 억지로라도 용서해 주라. 그 사람 전체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를 용서하는 것이다.

5) 그 대상과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서 맡으셨음을 선포하라.

* 용서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마5:43-47)과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에 의해 입을 벌려 용서의 기도로 선포하라(요일5:14-15)

6) 믿으라. 행동하라.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주님의 시선으로 그를 보라.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라. 자신 안에 봉해진 채 썩고 있던 우물이 열려졌다. 어느 우물은 원망과 한이 많아 깊이가 깊어 그 속의 오물이 다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분명히 그 뚜껑은 열린 것을 믿으라. 성령께서 결국은 그 우물 안의 오물을 다 퍼내시고 맑은 평안의 물로 채우실 것이다.

과정 6.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 (행2:1-4)

“ 성령이여! 깨닫게 하소서 성령이여! 충만하게 임하소서. 성령이여! 역사하소서”

(행 2 : 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고 그의 권능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성령이 누구이신지 깨닫고 그 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자

1,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1) (창세기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특별한 피조물이었다.

2) 그러나 이 관계는 깨지고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다음의 사건을 묵상하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 (창 3:1-6) “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하나님의 신, 성령이 떠나고 육체가 됨. (창 6:3)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3)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든 혼란과 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타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근본적인 이유를 결코 이룰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엡 2:1)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5)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창 2:17)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6:3)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 인간의 거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가장 귀한 부분인 영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말았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든 혼란과 타락에 빠지게 되었고 이러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근본적인 이유를 결코 이룰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인간 창조의 목적을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계속 진행하셨다. 성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특별한 책이다. 구약은 성부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의 과정과 그로 인한 결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5) 신약의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인간의 회복을 위해 행하시는 역사를 보여 준다.

6) 부활 승천하신 이후 이제 예수님이 육체로 사시지 않는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누구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시고 난 다음 성경은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는 기록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경 각 부분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삼위의 하나님을 보라 구약에서는 인간에게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행전에서부터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님으로 표현되고 있다.

2,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약속을 남기셨다. 무엇인가?

(사도행전1:4-8)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 -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그 약속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이었다.

3,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약속은 제자들이 모여 기도한지 10일 후에 이루어졌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사도행전 2:1-4)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믿고 모인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하였다.

(사도행전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사도행전 5:41-4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변화는 시간이 지남으로서 자연히 되어진 것이 아닌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많은 부분이 변화되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제자들의 변화는 매우 특별하다. 주님을 부인한 시점에서부터 두달 동안의 베드로의 변화를 보라.

* 베드로는 가정과 가업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한계이고 인간이 가진 한계 일수 있다. 이런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전하며 매를 맞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으로까지 변했다. 이 변화는 자신의 인격의 성숙이나 결심이라는 차원과는 다른 폭탄적 변화이다. 그런데 이기간이 두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이루어진 변화라기 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바뀐 순간적인 변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부활 승천 오순절

3일 40일 ⇑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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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십자가 사건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때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설교함

베드로의 부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그 이후 베드로는 계속 변화된 모습을 보임

그림은 베드로가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기간은 불과 53일(실제는 10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은 그곳에 모인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는가?

만일 그 역사가 그곳에 있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후에 다시는 성령 충만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그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그것들을 찾아보자.

(행 8:14-25<17절까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10:44-48) “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 19:1-7)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 - -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위의 말씀을 볼 때 성령 충만의 사건은 예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현장이 계속 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약속은 지금 당신에게도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역사가 아니고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권능을 주시는 역사이다.

5, 성령님은 누구인가?

1) 그 분은 삼위일체의 제 3위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2) 그분은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3) 그분은 무한한 지성(고전 2:11)감정(롬15:30)의지(고전 12:11)를 소유하고 계시는 인격이시다.

6. 성령의 능력의 본질

1. 성령의 능력은 인격적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비례한다.(요15:5-7)

2.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다.(행2:17-18)

3. 능력은 일시적이다. 따라서 한번의 충만이 아닌 지속적인 충만이 필요(행2:4, 4:31)

4.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교만해서는 안된다.(행8:20, 고전4:7)

5. 성령의 능력을 주신 목적은 ?

1) 효과적인 복음 증거(눅24:48-49, 요20:21-23, 행1:8)

2) 교회를 세우기 위해(고전12:7, 엡4:11-16)

6. 각자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경험도 다르다.

7. 성령의 능력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나타난다.(고전12:4-6, 고전12:27-30)

8.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영안이 열린다.(왕하6:15-17, 욜2:28,29, 고전2:12-16)

7, 그리스도인은 왜 성령으로 충만을 받아야만 하는가?

1)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거듭났다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없이는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이룰 수 없다.

(롬 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 성령님만이 우리를 영적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요 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3)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신다.

(고전 2:11)사람의 사정과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4)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사도행전에서처럼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충만할 때 비로소 영향력 있는 영적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

(엡 5:18)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5) 성령님만이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신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6) 성령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7) 성령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힘과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 왜 성령으로 충만을 받지 못하는가?

1) 하나님의 약속을 몰라서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 모두에게 자연히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 받기를 구하라고 명령하셨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엘 2:28-32)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2)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교만 때문이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고전 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3) 욕심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다.

(행 8:18-21)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4) 고백하지 않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5)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특별한 자만 받는 것이 아니며 목회자만 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약한 하나님의 자녀 누구에게든지 보호자 되시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약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성령의 도우심의 3가지를 정리해 보고 지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지 점검해 보자

1)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순간적 사건이며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2) 거듭난 자녀에게 자녀답게 살도록 권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

이 일 또한 순간적 사건이며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고 말씀하셨다.

3) 성령과 순종의 교제 속에서 성숙되어 지고 계속되는 성령의 충만함

이것은 순간적 사건이 아닌 삶의 상태이며 성령께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른 당신의 선택에 의해 사람마다 큰 차이가 난다.

10,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1.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 행2:2, 행10:44, 고전12:11

2. 사모하는 마음 - 요7:37-38, 고전14:1

3. 기도하는 마음 - 눅11:9-13, 행4:31, 행9:17, 행19:6

4. 기다리는 마음 - 행1:4-5,14. 고전12:11

5. 기대하는 마음 - 엡3:12, 갈3:5, 막11:22-24, 요일5:14-15

6. 성령님께 순종 - 행5:32, 요14:15-17

1)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2) 마음을 비우고 용서를 받으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인간에 대한 원한이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말씀드려라. 이런 마음이 성령의 임하심을 가로막는다.

3) 구하라. (눅 11:13)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의 충만은 힘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며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자신의 왕좌를 내어 드리고 위로부터 임하시는 신령한 능력을 받는 것이다. 겸손히 요청하라. 구걸하지 말고 담대히 요청하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당신에게 임하실 것이다.

4)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명령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과 그의 약속을 믿으라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만일 당신의 연약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로 당신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세례요한이 소개한 예수님과 성령(눅 3:16)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고 했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성령 세례자이시다. “흘러내려 온전히 감싸다” “물밑으로 완전히 담그다” “힘차게 뛰어들어 빠지다” 라는 뜻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히 감싸지고 담그어 지며 그 속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이 경험은 딱딱하고 바짝 마른 스폰지가 물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영을 흡수하는 것을 방해하는 딱딱함이 있을 수 있다. 처음의 딱딱함이 없어지고 스폰지가 물을 가득 머금은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스폰지가 물에 가는 것(세례)과 물이 스폰지 안에 스미는 것(충만함)은 별개의 일일 수 있다. 스폰지가 물로 가득 차면 물은 스폰지에서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당신이 성령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실한 한 마디의 기도를 통해서도 당신에게 성령님은 임하실 것이다.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방언이나 외적인 체험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말씀을 잡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이것이 성령님을 성령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의심하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낫다.

5) 성령의 은사 및 성령을 체험하는 네 가지 방법

1. 안수 기도를 통해서 - 행8:17, 9:17, 19:6, 28:8. 딤전4:14, 딤후1:6

2. 성령의 역사하는 모임에 참여 - 고전14:26 모일 때에...

3. 본인이 사모해서 간구하는 가운데

4.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권적인 하나님의 은혜

11,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1) 자신이 처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면 그것은 완성이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다.

당신이 성령님에게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내적 성장,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적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2) 또한 내 안에 외적 은사를 성령께서 나타내셔서 나를 증인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통역, 사랑)그러나 내면적 순종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을 때 외적 은사는 언젠가 그쳐지고 당신의 성장은 멈출 것이다. 계속해서 성령님에게 순종하도록 하라.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그리하면 신령한 은사들을 당신은 받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3) 성령의 임재,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을 지식적으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알고만 있다면 나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다. 인격이신 성령님을 사도행전의 성도들처럼 체험하라. 경험하라. 능력이신 성령님이 당신 영혼 전체를 지배하고 그분이 살아 계셔서 지금 내 인격을 주관하며 내면의 모든 상처를 치료하시고 어둠의 세력에서 나를 풀어내시는 은혜를 받으라. 지금 성령님은 당신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원하신다.

4)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스스로 확인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한번의 기도로 일생 동안 계속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다

* 내가 만일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일생 동안 계속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 지속적으로 순종하며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삶은 성령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삶이다. 즉 성령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다. 그러한 삶은 한 순간 뿐 아니라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이루어 져야 하며 나의 마음의 왕좌를 그분께 내 드려야만 한다.

*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이일은 어느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고 오직 나 자신이 선택해야만 하는 일이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들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받고 기도를 받아 받을 수 있지만 성령 충만한 생활은 오직 자신만이 매일 매일 해 나가야 할 일이다.

* 예수님께서도 요단강에서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신 후 일생 동안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성령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고 또한 그렇게 사셨다. 그분은 일생 동안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사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다.

5)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묵상하라. 겸손히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서 배우라.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라.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 항상 성령님을 사모하고 그분에게 협력하라. 순종하라.

성령의 사람 그림 설명 ⇒ 나의 자리를 성령님께 드림

과정 7. 부모의 영향과 진단과 치유(누가복음 15:17-24)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내 눈에 씌워진 잘못된 안경은 반드시 벗어 버리자”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기쁨의 단계에 멈추어 있다. 그러나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이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성숙 단계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커다란 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기 어려우며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왜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와의 그러한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또 계속 성장되지 못하는가?

1,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 육신의 아버지는 인간이 처음 만나는 가장 강한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만나는 그 시기는 우리의 자아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 시기의 모든 경험과 사건 느낌은 우리의 성격 형성의 근본을 이루게 되고 이것은 우리가 평생 쓰고 다니는 마음의 안경이 된다.

* 어린이의 마음은 하얀 백지 종이와 같아서 환경과 가르치는 대로 형성이 되어지게 되어 있다. 특히 태아 시기에는 완전한 백지이다. 태아 때에 지능이 25% 두뇌가 50% 6세까지 지능이 50% 두뇌가 80%형성이 된다.

2)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보편적인 증상들은 어떤 것일까?

* 첫째는 막연한 불안감이다. 이 불안감이 늘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에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은 더욱 불안해 진다. 이 기쁜 일 뒤에 갑자기 괴로운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도 허전함을 느낀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으며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조급함과 죄의식 그리고 정죄 감으로 항상 기분이 좋지 않다.

* 둘째는 긴장감이다. 긴장감이란 보호자가 없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책임지려 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3) 육신의 여러 유형들의 부모와 그런 부모의 모습으로 인하여 아이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들을 생각해 보자.(유대인들은 부계 못지 않게 모계의 혈통을 중요시한다. - 디모데)

* 아버지의 영향이 중요하지만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의 영향도 중요하니 한정을 짓지 말고 부모의 영향으로 !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두 번 속임 ☞ 이삭의 똑같은 거짓 ☞ 야곱의 꾀보(속임수의 명수)

1) 좋은 부모 - 좋은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쉽게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육신의 아버지의 양육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이해하게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부모 밑에서 양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이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이 접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 주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본래의 마음을 모르고 혼자 오해하는 가운데 상처를 받기 쉽다.

* 예를 들면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멀리 가서 직장 생활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결코 아이에게 아픔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아이는 그 아버지에 대해 자기를 돌보아 주지 않고 무책임한 아버지로 여기고 상처를 받기 쉽다. 하지만 아버지와 대화를 편하게 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깊이 나눌 수 있으며 아버지에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녀라면 그가 하나님을 바로 보는데 크게 지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2) 화를 잘 내는 부모 - 언제나 화를 낼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도 무엇을 잘못하기만 하면 때리기를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용서보다는 질책과 때리는 하나님으로 인상지어 진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벌벌 떨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잘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실수가 많아 자기 자신을 용납 못하고 남도 용납을 못한다. *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넘어짐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분이시다. 화를 내고 불만과 짜증 어린 눈으로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시145: 14)

3) 거리감이 있는 부모 - 정서적 감정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다. 슬퍼하지도 웃지도 않고 언제든지 가족의 통치를 위해 거리를 두고 한 발치 뒤에서 위엄 있게 있는 아버지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동료들과 술 마시고 돌아오는 아버지다. 그래서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 외에는 나눌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자란 사람은 자기도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나누지 못하며 하나님에게도 자신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나눌 수 없으며 친밀감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죽고 사는 문제나 중요한 문제만 다루시는 분으로 여긴다. *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도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세밀하게 보시고 사랑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4) 연약한 부모 - 육체적으로, 성격적으로 약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아버지다. 이런 가정은 반대로 어머니가 강하며 어머니가 집안의 권위를 갖고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한다. 재정의 권리도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녀들은 모든 필요를 어머니에게 부탁한다. 이런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수 없다. 이런 자녀들은 나중에 결혼 생활을 원만하게 꾸려 나가기가 어렵다. 아들들은 대개 그 아버지처럼 약하다. 그리고 자기가 어머니처럼 강한 여자를 싫어하면서도 막상 결혼은 그런 여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가 깨뜨려진 가정으로 그 자녀들은 아픔을 갖게 되고 자기의 결혼 생활 속에서는 어머니처럼 강한 부인에 대한 분노를 가진다. 딸들은 아버지를 멸시하고 어머니에 대해 화를 낸다. 자기의 남편이 아버지처럼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런 남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남편을 지배하려고 한다. 연약한 아버지는 온유한 것과는 다르다. 연약하다는 것은 마음속 두려움이 커서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시지만 연약한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누구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주에서 가장 강한 분이시며, 어린아이 앞에서도 자신을 굽힐 수 있는 부드러운 사랑이 있으신 분이다.*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면서 가장 강하시다. 영원한 힘이 있으시기에 얼마든지 자신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5) 안 계신 부모 - 아버지가 군인이거나 다른 나라에 취업해서 장기간 가정에서떠나 있는 가정이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가정, 이혼 등으로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개입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도 믿기 어렵고 관계를 갖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여된 분이 아닌 실제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그곳에 같이 계셨던 아버지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다. 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목적지가 아님을 표현한다.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품이다. 그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나중에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잘 믿지만 아버지에 대한 개념이 결여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마음은 아직도 길에 서 있는 것 같은 감정 상태가 나타나는데 주님은 우리가 길에 서 있기를 기뻐하시지 않고, 그 목적지로 데리고 가기를 원하신다.

6) 알콜 중독에 빠진 부모 - 이런 자녀들은 자신의 괴로움과 수치심을 남에게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낼 줄 모른다. 이들은 정서적인 미성숙 때문에 자신들의 감정이 존중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남의 기분에 따라 가고 자기 의견은 없게 된다. 반면에 이상한 어른이 되어 자신이 참견하지 않을 일도 참견하고 쉬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충성스럽고 열성적으로 섬기며 자신을 희생한다. 하나님의 로봇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잘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고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자기 같은 사람의 기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독불장군이 아니며 우리는 그의 로봇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 변화에 대해 매우 민감하시고 우리의 의견을 깊이 존중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존중히 대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개성이 살아나며 각자의 인격이 성장된다.

7) 나를 버린 부모 - 현재 보육원 및 아동보호소의 아이들 중 70%는 부모가 생존해 있다고 한다. 이런 자녀들은 부모도 나를 버렸는데 하는 마음으로 자포자기하며 하나님도 자기를 버렸다고 하나님에 원망을 하며, 자기의 꿈이 실현되지 않으면 쉽게 자포자기를 하며 자기 자신을 쉽게 죄에 내어 주고 만다.(시 27 :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8) 나를 부끄러워하고 나를 용납 못하는 부모 -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부끄러워하고 그 자녀에 대해 속으로 화를 내며 실망하고 있는 아버지. 자신의 부족을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다. 가치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혹은 자신의 죄로 인해 몰래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공개적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은밀히만 표현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모르는 체 하는 아버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극악한 죄를 지은 부패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히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뿐만 아니라 우주에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아버지고 너는 나의 자녀다”라고

9) 나에게 해를 끼친 부모 - 세상의 죄악아 관영함에 따라 가장 놀랍고 무서운 죄악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이다. 성폭력 같은 행동으로 시작하여 온갖 행할 수 없는 죄악을 자녀에게 행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버지에게 이런 해를 받은 자녀의 마음에 받은 상처는 너무도 치명적이다. 이런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해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자녀를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그분은 결코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분이 다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도 아니시며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시는 분이시다.

2, 인생의 위기 속에서 받은 상처

인생의 위기 속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쓴 뿌리와 원망을 가지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다가 만나게 되는 삶의 고통과 위기를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때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뿌리가 생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단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지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할 때 원망의 쓴 뿌리가 작용해 하나님을 원망하며 실망해 한다.

하나님은 이런 원망의 삶 대신 감사하며 살라고 하셨다(살전5:18). 성경의 대부분의 주인공은 환난과 역경을 통과하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서 쓴 뿌리를 갖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이다.

3,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축복을 가로막은 나쁜 영향의 끈과 굴레들에 묶여 있을 때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도박, 혈기, 음란, 시기, 도적질, 저주의 말들, 악독, 알콜 중독, 거짓말, 점치는 것 등은 자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죄악의 끈이다. 성경은 이 영향이 4대째 이어진다고 했다.(출 20:5) 마술, 성적인 음란함, 우상 숭배의 죄악, 질병, 우울함..... 등 이런 죄악의 끈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죄악의 끈을 끊으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죄악의 끈을 끊어 버리기를 원하신다. 자신 안에 자기의 부모에게서 발견된 죄악들과 같은 죄악들이 발견되지 않는지 살펴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죄악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대적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그 민족과 조상들의 죄악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 안에서도 동일한 죄악이 있음을 보고 회개하며 그 죄악을 끊었다.(느 1:6-7)

4, 모태 안에서 받은 상처와 영향이 나의 굴레가 되어 있을 수 있다.

* 우리가 태아 교육을 말하지만 실제로 태아가 지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성경은 태아에게 지정의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눅 1:39-44 세례요한의 태아 시절) 토마스 바니는 그의 책 ‘태아는 알고 있다’에서 “ 놀랍게도 그들은 어머니의 사고와 감정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과학적 자료를 제시하며 부부 싸움을 한 가정의 자녀가 부부 싸움을 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보다 2,5배나 정신적 육체적 장애자가 태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포심과 신경질에 사로잡혀 태어난 아이의 장애자 출산 확률은 5배나 된다고 하였다. 태아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내적 이유에서 드러나고 있다.

5. 자라면서 부모의 부부 관계의 영향으로부터 바르지 못할 수 있다.

1) 침묵 부부 - 부부 사이에 침묵은 금이 아니라 금이 간다.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으로 그들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대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발표력도 부족하다.

2) 퉁명 부부 -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퉁명스러움이다. 짜증이 결국 부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자라나는 자녀들도 짜증을 잘 낸다.

3) 돈돈 부부 - 무엇이든 돈과 연결시키는 부부는 곤란하다. 결혼 생활의 행복에 있어서 돈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자녀들도 부모나 사람들의 기준을 돈에 따라 정하고모든 인생을 돈으로 환산을 하고 결국 돈이 없으면 끝장을 내고 만다.

4) 달달 부부 -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각자의 영역과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꼬치꼬치 캐묻고 달달 볶지 말라.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잔소리 또는 이론가이다.

5) 험담 부부 - 부부 서로 간에도 상스런 말을 해선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의 흉을 보아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남의 흉을 잘 보고 결국 참소하는 자가 되어 어떤 그룹에서나 결국은 소외(왕따)를 당하게 된다.

6) 외도 부부 - 바람피우는 것만이 외도는 아니다. 가정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남편이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외로움을 곧잘 느끼고 부모의 사랑 결핍으로 자신감이 결여되고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을 하다가 안 되면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7) 따로 부부 - 상대방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달달 볶는 것도 문제지만 무관심 무간섭의 부부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위험하다. 이들 부부는 결국 자녀에게도 무관심을 하고 자신들의 일만 하기에 자녀들은 고아처럼 자라나는 외톨이가 된다. 문제아가 많이 발생을 하게 되고, 결국은 부모의 의견을 무시하고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을 한다.

6, 이런 문제들을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된 사고방식들

1) 예수 믿고 거듭나면 과거 모든 것들은 현재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우리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습관적인 행동이 고쳐지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되고 성화가 잘 안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려면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롬 12:1-2) 그래야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우리 마음은 모태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치료할 때만이 그의 삶이 변할 수 있다.

2) 정서적 장벽과 성격의 이상들이 신앙과 성경 지식이 쌓여 가면 자연히 없어지리라는 생각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나 성격의 이상들, 그리고 죄에 특히 약한 어떤 특정 부분은 대부분 아주 어린 시절 유년기에 획득한 것들이다. 그리하여 계속 반복 실행하여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것들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고침 받을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움 안에서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으며 치료하는 단계가 있어야만 한다. 무의식 안에 있는 상처로 인한 것들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고치기 어려운 부분이다.

3) 부모가 우리의 잘못된 삶에 영향을 끼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죄스럽다는 생각 우리가 부모나 조상의 수치를 드러내자는 것이 절대 아니고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던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이것은 수치라고만 보면 안 되며 그렇게 생각을 할 때에 결코 치유는 되지 않는다.

4) 지난 시절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행위라는 생각 우리는 다 자식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무도 자식이 그렇게 잘못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다. 다만 모르고 하는 실수들이기 때문에 죄를 부모에게 돌려 서도 안 되고 또 그 죄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한 저주의 끊을 끊어서 다시는 후대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죄지 않는다.

5) 부모와 과거의 가정 문제를 말하는 것은 나의 체면과 자존심을 손상시킨다는 생각 내적 치유는 누구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존심의 손상이나 체면의 손상이 다소 될 것 같으나 나중에 보면 결코 손상이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된다.

7,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1) 부모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부모를 배반하거나 그에게 욕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바른 진단을 내리는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건너뛰어 가거나 은폐함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 깊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2)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악을 용서하는 것이지 은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힘은 주님께서 나온다. 우리가 부모를 바로 알 때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커진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뒤돌아보게 하시는 것은 잘못을 캐려는 것이 나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4) 우리는 부모를 바로 알아야 그들이 나에게 끼친 영향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 때 우리의 잘못된 굴레를 벗고 부모로부터 건강한 독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5) 부모로부터 건강한 독립이 있어야 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8,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느 9:2) “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자기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 느헤미야는 자신과 현재 자기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연결된 조상부터 내려오는 죄악 된 생활들을 회개하고 자기 대에서 끊기로 결심하고 있다. 조상 탓이나 다른 사람 탓하지 않고 바로 나도 동일한 죄악을 허용했음을 통회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다음 4가지 부분을 깊이 적용해 보자

1) 나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해 가지 어렵다는 말을 받아들여라.

2)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으라. 강의 시간에 깨닫게 된 것을 놓치지 말고 붙잡아 하나님께 말씀 드려라.

3)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부모라도 용서하고 사랑을 고백하라.

4) 조상들로부터 온 굴레들에 대해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끊어서 더 이상 나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유전시키지 않도록 기도하라.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 예수의 이름은 창조와 기적을 일으킨다.

* 기다리시는 아버지 (누가복음 15:17-24)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찾으시는 아버지 (요한복음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보내시는 아버지 (요한복음 5:24-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과정 8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

“보이지 않은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자만이 보이는 세계를 다스린다.”

이 과정의 목적 -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는 자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군사이다. 군사는 싸워야 할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적은 세상에 있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 적이 가장 노리는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상처받은 마음이다. 그는 그 마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그러므로 온전한 마음의 치유와 성장을 위해서 두 가지의 태도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단이 발판을 삼으려고 하는 상처 입은 마음의 치유이며, 둘째는 그러한 사단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매일 삶 속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궤계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대적함으로써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전쟁터이다.

(엡 6:10-13)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

내가 준비가 되어 있든지 않든지, 내가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투 가운데 있다. 왜 이러한 전쟁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성경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악의 영이 존재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요일3:8). 악한 영은 인간과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접근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해 줄 수 있다. 악한 영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 그들의 생각을 속이고 사로잡는다. 사실 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이미 사단이 점령한 곳이므로 오히려 싸움이 없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어 영적 전쟁터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전쟁과 상관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마귀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해서 마귀가 날 비켜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특별히 나를 주목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인간이 공격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들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고 있거나 무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권세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포로가 되어 있을 수 있다.

2. 영적인 세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극단적인 두 가지의 태도

극단적인 두 태도는 마귀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하는 것과, 또 하나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1) 지나친 부정

‘내가 관심이 없으니 그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라고 마귀의 존재를 관과 하는 경우.

이런 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자들에 대해 때로는 혐오감까지 가지고 바라본다. 그들은 마귀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복잡한 문제가 야기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예 그런 문제를 교회 안에서 야기하는 것조차 꺼린다. 다만 마귀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예수님께서 이미 마귀를 이천 년 전에 멸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에 대해 바로 알고 자세히 안다고 하는 것이 결코 문제를 만드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모르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마귀는 결코 우리가 그를 내버려둔다고 해서 결코 우리를 가만히 두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 마귀의 속임수와 거짓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 유케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마귀에 대해 바로 안다면 우리는 더 깊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 지나친 관심

이런 자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귀신의 영향이고 귀신 때문이라고 귀신을 강조한다. 아내가 성을 내는 것도, 자동차가 접촉 사고를 내는 것도, 아픈 것 등 모든 것을 믿음 안에서 해결을 할 수 있는데도 귀신의 장난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기회가 닿는 대로 귀신을 내어쫓는다. 이런 자들은 심지어 자신이 믿음이 없어 선택을 잘못하여 그르친 일이나 고의적으로 또는 이기적이고 악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마귀가 시킨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마귀에게 떠넘긴다. 이들의 삶의 대부분은 귀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다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갈등을 갖게 된다. 이들이 혹 어떤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을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 지나친 과신과 교만에 빠져, 어디서나 이런 초자연적이 역사를 일으키기 원하고 그런 것을 드러내기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며 악의 영들을 향하여 영적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사역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축사사역은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에 이르는데 필요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우리 안에서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쓰여 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전체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영적 싸움에 대한 바른 태도는? ⇒ 바르게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마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해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에 대해서 회피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 그것은 바르게 알지 못했을 때나 충분히 알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또한 능력을 받고 두려움에서 자유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묻고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 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인격적 교제를 의미한다. 어떤 현장에 대해 이것이 마귀의 일인지 아닌지를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거나 마귀에게 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대해서 마귀의 행동으로 보는 잘못된 극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신분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들을 속이고 미혹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때 그는 우리에게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본 치유 과정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을 잘 통과했다면 사단은 결코 당신에게 신분을 속이지 못할 것이다.

4. 사단을 어떤 자인가?

1) 그는 어디서 왔는가? (사 14:12-15, 겔 28:5,12) 모두 하나님께 반역으로 내어 쫓긴 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자가 아니다. 그는 사실 직접 하나님과 대적할 수도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을 대적한다.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꾸민 모든 전략은 예수님이 이미 깨뜨리셨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2) 그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사14:12-15)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의 말씀을 참고로 해보라.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은 그의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었다.

3) 그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교만하여 속이는 거짓의 아비다. 그의 성격인 잔인성은 전세계에 행해지는 악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용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잔인한 고문, 생체 실험, 자식을 죽이고 강간하는 부모,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자녀 등등, 그 잔학함은 상상을 할 수 도 없을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성품을 인간 안에 집어넣기 위하여 모든 매체를 동원한다. 음악, 영화, 예술, 책 등등 모든 매체 안에 그는 자신의 성품을 반영시키고 인간은 이것들은 접하면서 점점 그이 사고방식을 닮아 간다. 폭력 비디오를 보고 모방하여 같은 죄를 짓는 청소년을 보라.

4) 인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떠한가?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성경 구절에 나오는 “크게 분내어”라는 의미는 사용된 단어는 일반적인 분노가 아니다, 이것은 분노라는 감정 중에서 가장 극악한 광기와 원한에 사무친 분을 뜻한다. 마귀는 지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지금 그리스도인의 겉에서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벧전 5:8).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을 보는 눈에는 이런 잔혹하고 사무친 저주의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당신이 위기의 순간이나 고통스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공격하고 좌절시키려 한다.

5) 현재 그의 세상에서 위치는? 그는 세상의 지배자다. 본래 세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드시고 그리고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위임하신 곳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면서 인간을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잃었다. 결국 인간 스스로 사단에게 이 세상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단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문화, 정치, 종교 모든 분야에 그의 모습을 심고 있다.(엡 6:12)

5.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세 가지 싸움터

그것은 생각의 싸움터, 감정의 싸움터, 입술의 싸움터이다.

1)생각의 싸움터에서 악한 영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기능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자신의 뜻을 말하실 수 있다,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악한 인격체인 사단 또한 우리의 생각 속에 말한다.

저주의 말을 통하여 - 가족, 친구, 이웃, 혹은 무당이나 사주, 관상쟁이를 통하여 우리를 일생 동안 묶는 저주의 말들을 심는다. 또한 무지의 부모나 친척들의 지나는 말들도 심는다.

제안하는 방법을 통하여 - 그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처럼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제안을 해줄 수 있다.(마 16:23)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에 죽지 마시라고 제안했을 때 주님은 그 제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시고 즉시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지만 베드로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 제안은 사단의 것이었다. 사단도 우리에게 매일 무언가를 제안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갔는데 마침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순간적인 제안이 들어온다. ‘저 물건 하나만 백에 넣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저 물건은 부피도 작지 않니!’ 만일 그 사람이 그 제안대로 그 물건을 백에 넣어 들키지 않고 집에 가지고 왔다 하자 절대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즉시 그에게 말한다. ‘너는 얼마나 나쁜 사람이니, 너 같은 것이 좋아질 수 있겠니!’ 이런 식으로 그는 덜미를 잡아 우리에게 무자비하게 정죄 감을 넣어 주고, 그 정죄감은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등감을 갖게 하며 자신은 싫어하게 하여 결국 죄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자신은 싫어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때 죄를 쉽게 짓게 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상상력을 이용하여 - 무서운 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 생활 속에 비참한 일들이 계속 상상되게 하는 것… 이런 부정적인 상상은 인간의 감정 안에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만들어 낸다. 두려움과 공포는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생각의 싸움터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생각은 우리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과 같다.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의식하지 않고 한입 먹는다. 그러다가 그 음식이 상하거나 맛이 이상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뱉어 낸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같다. 우리 안에 생각이 들어올 때 이것의 맛을 알아서 주님이 주신 맛이 아니면 그 즉시 뱉어 낼 줄 알아야 한다. 계속 먹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그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며 그 생각은 계속 번져 나간다.

2) 감정의 싸움터에서 악한 영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악한 영은 감정을 부정적으로 자극한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분노, 고통, 오해가 일어나도록 자극시키는 것이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극이 올 때 분을 내는 것은 정상적이며 죄가 아닐 수 있으나, 그 분을 마음에 품고 하루 이틀..........기한은 넘기면 분노는 우리의 마음에 쓴 뿌리를 만들어 마귀가 사용하는 거처가 되게 할 수 있다. 이 분노는 두려움과 완고함, 교만, 불신, 냉정함 등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날 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핑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런 것들을 우리의 삶 속에 계속 허용하는 한 우리는 결코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없다.

감정의 싸움터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어떻게 물리치는가?

(벧전 5:6-9)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감정 안에서 역사하는 적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위의 말씀에서 우리의 감정과 태도를 다스리는 비결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겸손과 염려를 맡기는 삶의 태도이다. 겸손함과 염려하지 않는 것, 이것은 감정을 지키는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춤으로 교만을 다스리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불신과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 되는 다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겸손인지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적은 인간이 아니다. 당신의 적은 마귀다. 어떤 자들은 마귀, 혹은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 모든 사람의 삶에 침투하기는 하지만 실제 개인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귀의 가장 성공적인 공격은 전체를 공격할 때 보다는 항상 개인에 대해서 공격함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악한 영은 우리의 입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는가?

자신과 타인을 실제로 공격하는 무기를 만든다.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말은 비평과 험담이다. 이런 말로 인한 상처는 칼로 받은 상처보다 더욱 오래 가고 아프다. “비평적인 말, 불평하는 말, 다른 사람에 대한 은근한 험담” “그 사람은 위해 기도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는 이런 사람인 것 같아요 그는 훌륭한 지도자예요, 하지만 이런 소문이 있더군요...” 등등 우리는 다른 단체나 교회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에 대한 나쁜 선입관을 만들어 주는 마귀의 심부름꾼이 될 수도 있다. 말 한마디로 심어진 선입관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단체와 교회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경쟁하고 미워하는지 보라. 하나님의 말은 믿기 어려우나 이런 악한 말은 너무도 쉽게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더럽히는 힘을 가진다. 또한 자신을 공격하는 말은 부정적인 자신의 영상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나는 안돼.’ ‘나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하나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모두가 나를 미워해’ ‘모두가 내가 없어지길 바래.’등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말로 구체화될 때 무섭게도 이 말은 .현실화된다.

우리의 입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은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약 3:14-15)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즉 우리는 말을 하기 전 마음의 동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가진 말이라도, 걱정하는 빛이 담긴 말이라도 그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은 숨길 때 그 혀 속에는 날카로운 식도(食刀)가 숨겨져 있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의 베는 악한 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이 아닌 미움과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좋은 교훈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다. 또한 자신을 해치는 부정적인 말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은 우리의 긍정적인 말의 선포로 이길 수 있다, 매일매일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신다.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 있게 만드셨다. 이 세상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내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다. 나로 인하여 우리 가족과 이웃이 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입술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계신다.....”등등의 긍정적인 진리의 말을 선포함으로써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 짝을 지어 칭찬 5가지 이상!, 긍정적인 말 5가지 이상!. 시가집 식구 나쁜 말 안하고 10가지 이상 칭찬하기! 시가집 흉을 보면 입을 통해 죄를 지음과 자녀들의 시험과 형제간의 이간이다. 시가집을 칭찬하고 자랑하자!

6. 내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1)나의 귄위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에 기반은 둔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나 자신에게 힘이 있어서 귀신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교통순경과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교통순경의 지시에 따라 8톤 트럭이 멈춘다. 그 순경의 힘으로 자동차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제복의 권위로 그 자동차가 세워진다. 왜냐하면 그 제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 트럭 운전사는 알기 때문이다. 그 제복을 준 국가의 권위 앞에 트럭 운전사는 순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도 제복이 입혀져 있다. 그 제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 제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을 알기에 악한 영들이 순복하는 것이다.

2) 사단을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그 자신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3)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권위를 사용하여 사단의 역사를 꾸짖지 않는다면 마귀는 어디서도 꾸짖음을 받지 않으며 공격받지도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며 그의 지배에 속하지 않는 권위를 가졌다.

4) 귀신의 존재는 인정하고 귀신의 능력은 부정하라, 빛이 임하는 곳에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간다. 그리스도인이 귀신을 인정하면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속임을 당하게 된다. 귀신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높은 분, 창조주 하나님 그분으로 우리가 충만해져 갈 때 그의 놀라운 속임수는 드러나게 되고 대적함으로 쫓겨가게 된다. 귀신의 능력은 별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쫓겨 간다.

7. 실제로 악한 영을 향해 권위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방법

1) 예수의 이름과 보혈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너는 더 이상 이곳에서 역사하지 못한다.”하고 대적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나니 악한 영은 물러가라.”하고 대적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보혈에 힘입어 명한다.

2) 하나님의 말씀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신다고 하셨다, 성경에 기록되길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하셨다. “너는 나를 참소하지 못한다. 물러가라.”하고 대적할 수 있다.

3) 성령의 능력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내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근심케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여섯 번째 문을 기억하라.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4) 진리를 선포하는 것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안에서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 선포하신 나에 대한 사랑, 이런 진리들을 선포하여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결코 그분이 나를 저주하려고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나를 속이는 악한 귀신이 물러가라.”라고 대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영을 대적하고 승리하는 것은 다른 신령한 자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며 어느 날만 해야 되는 것도 아닌 매일의 생활의 태도로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신다.

이상 우리의 세 영역에서 매일 바른 태도를 배워 나가서 결국 나의 일상생활이 될 때, 즉 부정한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내 입의 습관이 바뀌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히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의 악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처럼 악을 쓰고 폭력을 사용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하며 아무리 악을 써도, 그 사람 안에 불의와 거짓과 음란함 등등의 어두움이 그대로 있다면 사단의 결코 공격을 받지도 않고 권위에 복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약한 아이라 할지라도 그의 중심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권위 앞에 악한 영은 두려워 떤다. 거짓된 생활로는 결코 사단을 속일 수 없고 대적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정9 나의 치유와 회복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꼭 찾아내고 만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가시가 빠지고 아픔의 자리가 아물게 된다. 많은 치료의 사건들이 이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 과정 속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계신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과 같은 인간으로 계신 그 분을 느끼고 만져 보아라. 그래야만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것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그분을 찾아보아라.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요” 당신은 그분을 열심히 찾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실까요?

이 과정의 목적 - 내 아픔과 고통을 과연 예수님이 이해하실 수 있을까? 그 분은 내 아픔을 치유하실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와 개인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며, 숨어있는 부정적인 속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기 위함이다. 미천한 계집종을 통하여 말구유에 핏덩이로 오신 예수님, 마른 땅에 돋아난 연한 순 같은 예수님, 사람 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적인 아픔을 치료해 가시는 지 그 현장을 체험케 하는 데 이 과정의 목적이 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과의 치유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깊은 상처로 인한 성장하지 못한 속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이 속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고통의 종류가 다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본질은 비슷하다. 그것은 거절과 멸시에 대한 것이다. 어떤 종류이든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절, 그리고 나의 인격이 무시당하는 멸시란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그 상대가 나와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 상처는 더욱 크고 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주위 사람들이 거절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 안에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만큼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혼자 있는지에 대한 의미가 더 나를 괴롭힌다.‘라고 어떤 사람은 그 외로움을 토로한다. 거절 받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그럴 듯한 것으로 포장하는 인생. 그런 인생은 마치 ’쇼‘와 같다. 겉은 웃지만 그의 내면에는 두려워하는 속사람의 울음이 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 말을 듣는 인간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는 그 말을 듣고 감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언가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대상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나 감정을 서로 주고받는 친밀한 대상으로는 결코 느껴지지 않는 답답함이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랜 기간의 단절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단절된 시간 속에서 사단은 마음 놓고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거짓말을 해댔다. 환경을 통하여, 부모를 통하여, 사회를 통하여 그는 인간 안에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거짓말을 심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본 모습을 왜곡시키는 사단의 거짓말을 깨뜨리지 못했다. 이런 결과로 인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잘못된 두려움이 쌓여 갔다. 이런 원망과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예가 있다. 어느 날 ‘존스 콰이어즈’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내의 딸을 찾아 달라고 사설 기관에 의뢰했다. 아내는 자신과의 결혼이 두 번째였고, 처음 남편은 한국동란에서 전사했다. 그 아내는 자신의 딸은 여덟 살 때 고아원에 맡겼고 아이는 곧바로 입양된 후 소식이 끊겼다. 이제 12년이 흘러서 아이를 찾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기관은 아이를 찾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클로디어라는 가수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님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격렬히 분노를 하며 그 청을 거절했다. “장님이 되어가는 어린 자식을 버린 어머니는 어머니도 아니다.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나를 찾느냐!”하는 깊은 원망과 분노가 그 딸 안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 거절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양부모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마음으로 한 번의 만남을 허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마음에는 친어머니에 대한 깊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막상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장님인 클로디어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것은 그녀의 어머니도 장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 그녀의 마음에서 어머니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자신의 마음을 열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 품에 안겼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도, 내용은 분명 다르지만 이런 비슷한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득 안고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그 시간! 지성소의 휘장은 찢어지고 우리는 이 법적인 원칙 변해서 인간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길이 열렸다. 그러나 우리의 속마음이 치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상해 버린 속마음이 치료되기 전까지 인간은 하나님을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며 성전 마당을 뱅뱅거릴 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우리의 창조와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다만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 아닌 아버지와 사랑하는 자식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가지는 그러한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가지기 원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고, 그리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법적인 변화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실직적인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의 상한 감정을 치료하실 수 있을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알게 하고,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어떻게 만드실까? 용서할 수 없어서 굳어진 마음을 어떻게 그 사람 스스로 자발적으로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실 수 있을까? 해답은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을 온전히 이해할 때에만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은 바로 그 해답을 우리 자신에게 체험시키고자 함이다.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에서 하나님께 속한 영의 분별 기준을 성경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사실은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두고 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1. 먼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살펴보자.

1) 그는 삼위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나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3) 구약은 이 죄에 대한 해결로 제사 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4) (히브리서 5:1-6)의 제사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조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제물과, 제물을 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제사장이다.

5) 예수님은 제물이시며 제사장이다.

(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6) (히브리서 5:1-6)을 통해 나타난,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는 자신도 연약한 자였기에 저가 무식하고 죄에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하고 중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히 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2:16-18)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구약의 모든 제사 의식은 주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표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그 죄를 씻을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의식이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죄를 해결하는 제사 의식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제사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일년에 한 번씩 온 나라의 죄를 회개하는 제사였다. 그때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맡았던 대제사장이 있는데, 그는 그의 손에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에게 고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말씀드림에 있어서 힘을 다하여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알기에 다른 무식하고 죄에 미혹된 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능히 용납할 수 있었다.

구약의 제사 의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시기 위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행한 것과 같은 일을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셨고 그리고 그 대제사장의 손에 묻혀진 제물의 피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다 체험해 보시고 인간들이 당하는 시험을 당하신 것이다.

2. 인간의 모든 것을 체험했다고 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그가 인간의 진정한 모습, 즉 나약하고 상처받을 수 있고, 마음에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 되어서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인생의 길을 걸으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3. 이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한가?

1) 그가 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시고 체휼하시며 도우실 수 있는 분인가를 믿을 수 있게 된다.

2)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예수를 의지하고 담대히 나아가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부끄럼 없이 보여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3) 또한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자라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받는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1) 전능하신 창조주가 물질, 시간, 공간의 모든 제한을 받으실 필요가 있는가?

“그가 구원자라면 인간과는 다른 아주 탁월한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배도 고프지 않고, 쓸쓸한 외로움도 없으시고, 고통도 느끼시지 않고 등등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의 성품은 없고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만을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도 있다.

3) 이런 의견들의 결과 ⇨ 이러한 사상의 결과는 인간과 예수님의 사이에 거리감을 갖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성령님 이 모든 분들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갖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즉 예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나 결론은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결과를 볼 때에 이런 사상의 배후에 사단의 궤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음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은 성령의 사상이냐, 악령의 사상이냐 하는 분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4) 그리하여 두려움과 소원한 기분 때문에 별세한 성도를 중보자로 대신 세워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성도 경배가 생겨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의 이런 사정을 다 이해하지 못하시지만 나와 같은 엄마의 삶을 살아본 마리아는 내가 자녀 때문에 슬퍼하는 이 마음을 더 이해하실 것 같다. 또한 신이었던 예수님보다 가난하게 살았던 성 프란시스가 더 나를 이해해 줄 것 같다”라는 마음을 만들어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하기 시작한다.(칼 아담의 저서『우리 형제 그리스도』에서)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안 계신다고 말한다.

5)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어떻게 하나님이신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실 수가 있는가?. 그분은 신성을 가지시고 또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 분 안에 신성은 인간이 되셨어도 없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성령에 의하여 태어났고 공생애가 시작이 되었고 모든 기사와 이적이 그렇다. 그분은 자신의 뜻대로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성령의 힘으로 행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 생애를 사신 것이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조건이 아닌가?.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을 하면 우리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너희는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품과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라.

1) 출 생(눅 2:7) - 출생한 곳은 아주 더러운 짐승들의 마구간이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드물다. 주님에게는 우리와 같은 고통스러운 가난함이 있었다. 성탄 카드에 그려진 낭만적인 태어남이 아니다. 어느 여인이 가장 불결한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할까?

2) 장성하심(눅 2:40, 막 6:3) - 그는 자라면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듣고 자란 것 같다. 나중에 주님이 기적을 베푸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일을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을 알았던 고향 사람들은 그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성경은 부성을 따라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데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결혼전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한 부정한 여인의 아들로 불리고 사신 것이다. 그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출생의 배경과 가난한 목수 아버지를 둔 평범한 시골 사람이었을 뿐이다.

3) 시험을 겪으심(마 4:1-11) - 물질과 명예, 사람 앞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 권력은 인간이 가장 보편적으로 당하는 3가지 시험이다. 유혹하는 자는 그 유혹의 미끼를 고를 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고른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던진 미끼는 우리 인간에게 던진 그 미끼와 같기에 예수님은 참으로 진짜 인간이 되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와 다르셨던 것은 아무런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욕구보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원하는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분은 인간으로 사시면서 우리처럼 죄를 짓지 않으셨다. 최초의 아담은 자신이 지혜롭게 되고 싶어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님은 아무리 자신이 지혜롭게 되고 싶어도 그 욕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아래 있었다.

4)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마 27:39-44) - 멸시와 천대의 죽으심이다. 흉악한 인간 강도의 취급을 받으신 죽으심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인간들의 죄를 전부 짊어지시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신 버림받고 지치신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이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이시다.

* 찬양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6. 이사야 53장을 통해 그에 대해 묘사된 모습을 보자.

1) 연한 순(2절) : 세상에서 얼마든지 핍박을 받을 수 있는 방어 능력이 부족한 모습.

연한 순은 자라면 단단하지만 연한 순이었을 때는 어린 갓난아이가 손으로 만져도 꺾여질 수 있는 연약한 상태이다. 주님은 이렇게 세상에서 누구에게든지 핍박을 받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방어 능력이 부족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었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시며 계셨다.. 주님은 강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힘이 없는 가장 가난한 서민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무시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연한 순의 모습이었다.

2) 마른 땅(2절) : 광야와 같이 환경적인 도움을 얻지 못하는 삶.

물이 부족한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는 튼튼하지 못하고 약하기만 하다. 우리는 가정적인 배경과 연줄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가난과 어려움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이 세상에 사실 때는 아무 연줄과 배경이 없이 삶을 사셨다. 그를 온전히 이해하는 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가장 힘들고 연약한 순간에 그는 철저히 혼자 되셨다. 광야로 쫓긴 어린양처럼 그는 홀로 인생의 길을 걸으셨던 것이다. 이 세상 어떤 자도 예수님처럼 철저히 혼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3) 멸 시(3절) :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삶.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기에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이 있지 않았다고 그에 대해서 기록한다. 주님이 무슨 일을 해도 서기관들은 주님을 멸시했으며 고향 사람들 역시 멸시하였다. 그의 외모와 배경이 전혀 흠모할 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여 그가 전혀 흠모할 사람이 아니면 마음놓고 업신여기며 무시하고 멸시한다. 멸시받은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멸시받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며, 악착같이 살아간다. 놀라운 사실은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심한 멸시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멸시받은 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실 수 있다.

4) 질고를 아심

(이사야 52: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②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낮아지심

(시편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즉 문둥병자와 같은 모습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레13:45)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 이처럼 성경에 묘사된 그 분의 인간적 모습, 외모는 결코 화가 등의 그림에 나타나듯 완벽한 모습이었을까 ? 놀랍게도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 분은 흠모할 만한 외모를 갖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그를 무시하고 멸시했다. 그는 마치 문둥병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7. 이렇게 친히 낮추시고 체휼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1) 나의 완전한 중보다, 치유자, 구원자가 되시기 위함이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히브리서 2:17-18)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3) 사람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아신다. 그리고 우리의 그 아픔,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4)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과정10 치유가 회복과 성장으로 이어지기(사 1:18-20)

“치유는 회복으로 ⇨ 회복은 성장으로 ⇨ 성장은 열매로 ⇨ 열매는 씨뿌림으로”

(사 1 : 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단은 조롱한다. 저들이 건축하는 것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듣고 두려워 기가 꺾였다. 이것은 이 일이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성된 것임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6:16

1. 스스로 독백하지 말고 주님과 대화하라

1) 독백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하는 것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답을 내리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2) 대화와 독백이 어떻게 다른가. 대화는 하나님과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종교는 안된다). 겸손한 사람이 대화를 한다.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스스로 독백하는 시간에 우리는 나도 모르게 주님이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오실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치유의 시작과 성숙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4) 우리는 대화를 함으로 주님이 나에 대해 말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한다.

당신 생각의 흐름을 잘 살펴보라. 당신의 생각은 주로 독백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자신을 이야기하는가?

5) 독백하는 사고 습관은 절망의 회전망을 우리 안에 구축한다. 다음의 회전망을 살펴보라. 이것은 깨뜨려지기 전에는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 진행되고 생각을 고정시킨다.

독 백 󰀥 나는 정말 괴롭다 󰀨

나는 기도가 안 된다 내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기도를 해야 한다 󰀢

하나의 잘못된 증상의 기도이다.

독 백 나는 ..... 같아요

󰀥 나는 부족하다 󰀨

못 하겠다 잘 할 수 없을 까요?

어떤 일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부족하지 않으려면 .... 일을 잘해야 하겠다

결과가 결코 좋지 않다.

고정된 생각 정말 관심이 없으세요?

󰀥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셔 󰀨

왜 나는 느낌이 없을까?

그런데 느낌이 없다 기도해도 아무 느낌이 없기 때문에

󰀧 기도하면 나도 느낌이 있어야 한다 󰀢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잘못된 관념을 깨뜨려라.

사탄의 속임수 어떤 .... 생각이 들어요

󰀥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실 거야 󰀨

왜, 나는 감사가 안되죠?

감사가 안 된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니까?

󰀧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

하나님 마음에 들려면 범사에 감사해야 돼

6) 독백의 습관을 깨고 주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새로 세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은 투쟁과 같다. 어떻게 이런 새로운 습관을 굳게 할 수 있을지 서로 나눠 보자

대 화 󰀥 하나님 나는 왜 괴로울까요? 󰀨

하나님 기도가 안 됩니다. 하나님 나는 왜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 하나님 기도를 하게 해주세요. 󰀢

내 마음에 뿌리 내리고 있는 부정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 잘못됨을 용서를 빌고 긍정적으로 변화됨을 선포하자. (끝장이다. 할 수 없다. 자신 없다. 무능하다. 절대 안돼. 사랑 못해. 용서 못해. 나밖에. 잘되면 안돼) * 찬양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2. 의식 속에 자리잡은 악한 개념들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이 개념들을 거부해 나감으로 생각과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라.

1)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지만 우리의 머리가 공백 상태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다.

머리 속에는 옛날 것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의 지식, 체험, 철학이 지배를 하고 있다.

2)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진 지식들은 가나안 땅의 부족들처럼 우리의 내면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속사람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의 것이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신다. 만일 그것을 남겨 둔다면 그것은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결국은 우리의 사고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데 사용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의 뿌리가 악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스쳐가는 자극적인 말, 부정적인 말을 빨리 잊어버려라. 망각하라. 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내 생각 속에 내 자신이 악한 개념들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4) 이런 지식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기에 강력한 진(토치카)을 만들어 우리의 속사람을 그 속에 가둔다. 그 진은 속사람을 속이는 진이요, 사단의 진이기에 그 안의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음을 모를 수 있다.

5) 우리의 속사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잘못된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세상의 헛된 철학과 사상, 사탄적인 지식들을 몰아내야 한다.

6) 이런 지식들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이 자신을 차지하고 있는 악한 지식인지 알지 못하는 한 그 지식은 우리 안에 계속해서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다.

7)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말씀 앞에서 볼 때 옳은지 살펴보라. 옳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생각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보라. 당신을 격려하며 더욱 성결하게 하는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는가? 이런 분별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드러나게 된다.

8) 당신 안에 있는 생각들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분별이 된다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런 생각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 지식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맛이 이상하면 버려라!. 잘못된 생각은 버려라!. 분별은 주님의 도움을 구하라. 신앙 성장의 반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생리통도 결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님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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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화살표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다. 수직 화살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 사실이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선포되어지고 있고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대각 화살은 내가 실제로 믿는 것, 마음속에 있는 거짓 진리이다. 가변적인 생각들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생각들을 따르고 살게 된다. 두화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고 안정감이 결여된 생활을 하게 된다.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하는 거짓 교훈은 불안하게 한다

3. 하나님과 대화할 때 감정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표현하는 기도를 하라

1)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게 된다. 의지적인 기도 혹은 만들어진 기도문을 외우는 것 같은 지식적인 기도에 치중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감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보여 드리는 태도가 중요하다. 원망하는 태도가 아니라 한나처럼 괴로움을 토하는 것이다.

2)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또한 시편을 참조하여 그 속에서 시편 기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아라. (시7편. 35편. 58편. 59편. 109편. 140:6-11. 10:15. 58:6.)

4.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마음의 치유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

1) 치유의 목표는 내가 의인이 되고자 함이 아니다.

2) 치유는 나의 마음에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3) 치유의 주체는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다.

4)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을 뒤로하고 나 자신이 더욱 중심이 되어 자신의 치유에 집중되는 자세를 가지게 될 수 있다. 이런 태도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해보자

5. 우리가 예수님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켜 치유를 구할 때 치유는 중단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존재이다. 무슨 조건과 대가를 요구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거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아무 조건이 없이 죽으신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이신 자신을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보다 나 자신을 집중하면 그리스도는 나타나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나의 치유를 통하여 나타나시도록 그 분에게 집중을 해야 한다. 지금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숨기고 3일 만에 어두움과 사망권세 이기시고 영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만 집중을 하라.

6. 치유는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마음의 상처는 나 자신의 죄든 상대방의 죄든 죄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죄는 용서되어져야 하며 십자가로 처리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병이 십자가로 수술되는 것과 같다. 마음의 병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들어온 것처럼 치유 또한 구체적이라야 한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의 위대함이 어떠한지 체험해 가도록 기도하라.

7. 내면의 깊은 상처치유 세미나에서 당신이 내면 속의 어떤 문제가 치료되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이제 당신의 속사람이 성장되는 문이 열린 것임을 기억하라.

속사람의 완전한 성장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미성숙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힘들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성령께서 이 일을 계속 행하실 것이다.

8. 느헤미야서를 묵상해 보라.

무너진 성벽을 새로 건축하는 과정은 우리의 마음의 건축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 이미 건축의 완성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건축하게 하신다. 바로 그 분 하나님께서 - - - - - 산발랏의 비웃는 방해, 백성들의 불평 - - - - - 그러나 대적들의 음모를 물리치게 하시고 성벽 건축의 완공이다.

9.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을 구하고 찾으라.

소수의 사람이 기도하는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은 시작될 수 있다. 바른 성도의 교제는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변화를 반드시 일으켜야만 한다. 그런 교제의 장을 위해 기도하자.

* 내면의 치유는 보이지 않으신 분이신 하나님의 실제적인 치유 사역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치유사역이기에 보이지 않는 치유를 반대하는 보이지 않는 사단의 공격이 심하다. 그러므로 성도 간에 서로의 돌봄과 격려가 매우 필요하다. 이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속에서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지속적인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통하여 성숙되어져 가는 복된 신앙의 소망을 갖자

과정 11 내적 치유 이후의 조치(눅 11:24-26)

(눅 11 : 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 1달간 생활 지침(무당이나 불도 보살 정도는 3년)을 잘 지켜야 이길 수 있다.

1. 치유 이후 즉시 그 사람의 영혼과 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악한 영이 쫓겨난 그 자리엔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은 반드시 예수님께서 좌정하셔야만 채워 질 수 있는 공간이다(마12:43-45) 즉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 악한 영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에게 늘 붙어 다니는 <죄의식>을 완전히 없애 주어야 한다.

3.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은 애초부터 악령이 침입하는 빌미(발판)를 제공해 주었던 자신의 습관적 행동 양식을 바꾸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즉 영적 성숙을 도와주어야 한다.

(예)1. 절망과 자포자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영성훈련에 참석하도록 권유한다.

(예)2. 음란에 빠졌든지, 도박에 미쳤던 사람이라면 그런 친구와 교제를 끊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 권을 형성하도록 배려한다.

(예)3. 악령이 달라붙을 수 있는 환경(삶과 죄)에 빠지지 말도록 강력하게 경고해 주어야 한다.

(예)4. 버려야 할 습관, 태도, 행동(분노, 용서하지 않음, 정욕 등), 만나지 말아야 할 친구, 가지 말아야 할 장소 등

4. 악한 영을 대적하는 기도를 가르쳐 준다 (약 4:7)

그리스도인의 권세를 다시 확신하고 그 권세를 매 순간 사용하는 것을 훈련시킨다(눅9:1)

(예) 분노로 가득찬 사람이 분노의 영을 축사한 후에도 분노를 또 일으킬 수 있다.

5. 매일 경건의 시간, 성경 읽기, 암송과 묵상, 교제, 정기적인 예배와 성례전 등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6. 소속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하며, 사역자는 그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7. 이른 아침에 말씀 또는 찬양테이프(특히 하나님과 그의 성품을 찬양하는 내용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찬송들)를 틀어 놓는다(저녁 잠자는 시간에도 틀어 놓으면 참 좋다)

8. 아침마다 (엡6:10-20)에 의한 영적 무장 기도를 하도록 한다(특히 사역자로 섬길 때는 필수)

9. 치유 사역 이후 - 대체적으로 의심하는 영, 미혹케 하는 영이 찾아온다.

(이런 사역을 한후 과연 내가 정상적인가? 성경적인가? 혹시 내가 홀린 것이 아닌가?

혹시 불건전한 신비적인 것이 아닌가? 체면 술이 아닌가? 명상이나 요가가 아닌가? 등 이런 것은 사단이 생각 속에 주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

10. 가능하면 집안에서 TV를 켜지도 말고 시청도 안한다(TV는 나를 멍청이로 만든다. 참조) 시청을 하더라도 유익하고 꼭 필요한 내용만 선정하여 보도록 한다.

11. 잘못된 습관을 고친다(언어순화, 도박, 술, 담배, 게으름, TV와 VTR의 과다 시청, 음란 등)

 

치유 이후 치유를 지킬 수 있는 7가지 방법 (베니. 힌)

 

1.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십시오(렘 17:5, 17:7-8)

2.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십시오(잠 4:20-22)

3. 죄를 고백하십시오(약 5:14-16, 요일 1:9)

4.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잠 12:18, 13:3)

5. 기도에 열중하십시오(시 91:22-24, 91:10-11)

6. 마귀를 대적하십시오(약 4:7-8)

7. 자연의 법칙을 지키십시오(고전 3:16-17)

출처 : 생명선교회
글쓴이 : 생명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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