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은사 신학 3 - (이천수 목사)
은사 신학 3
(이천수 목사)
8. 은사의 발견 방법
은사와 성품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은사를 진단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성품을 통한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은 각각 다른 성품의 소유자였다. 베드로는 의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하루에 3000명, 5000명씩 회개시켰다. 의지적인 사람은 밀어붙이는 믿음으로 큰일을 할 수가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치기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기도 한다. 부흥강사들이 대체로 의지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속된 말로 깡패 스타일이 많고,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특유의 강한 성격으로 많은 역사와 기적을 나타내곤 한다.
베드로는 말씀 면에서는 다소 부족했다. 소위 ‘불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부흥사들은 메시지 자체보다는 능력을 통해 역사를 일으킨다. 목회자들도 대체로 믿음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크게 목회를 한다. 이에 비해 바울은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바울도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도 고쳤다. 그러나 바울의 주된 은사는 지적인 은사, 말씀의 은사이다. 바울이 신약시대에 복음신학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받은 말씀과 지혜의 은사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요한일, 이, 삼서는 모두 ‘사랑’에 관한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모든 교인들도 의지적, 지적, 정적인 은사들을 가졌다. 그들이 받은 은사는 거의 성품과 관계가 있다. 성품과 직업도 대체로 관련이 많다. 보통 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데, 그 중에 체육교사들은 의지적인 사람들이고, 군인들이나 사업가들도 의지적이다. 교단에 따라 대체로 말씀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보면 의지적인 성품에 능력을 받은 목회자들이 많은데도 교단 특유의 교육적인 분위기에 그대로 젖어서 능력 있게 효과적으로 목회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니게 답답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목회는 자신의 성품과 은사에 따라 해야 한다.
목사라고해서 모두 말씀의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을 따라 해야 할 사람,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할 사람이 다 따로 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의 성품과 은사대로 일할 수 있도록 직분을 주어야한다. 은사를 발견하려면 그 사람의 과거의 영적 체험을 물어보면 그의 은사가 무엇인지 진단 할 수 있다. 예전에 기도를 통해 마귀를 쫓아낸 경험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은사를 계속 활용하지 않아서 소멸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은사는 일생 동안 변화하지 않는다. 지금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다시 회복 될 수 있다.(롬 11:29) 앞에서도 말했지만 은사는 전도하기 위한 것이다. 은사가 나타나면 전도하는데 써야 한다. 교인 중에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사람은 열정 훈련기간을 거친 후 반드시 전도하도록 권하라! 부작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역사를 일으키고 기적을 보인 것은 모두가 전도의 현장이었다. 몰론 야고보서에 병든 자를 위해 장로를 청하라고 했지만, 대부분 교인들끼리 서로 안수하고 기도할 때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는 형장에서 더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교인들 가운데 은사자가 나타나면 훈련시켜 전도하는 현장으로 내보내라! 그래서 계속 성장하게 된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
은사를 개발하려면
첫 번째 인위적인 모든 제약에서 은사자를 놓아 주라! 다른 교인들이나 제직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소명감을 가지고 충성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격려하고 통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두 번째 지적의 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지적인 제약이란 ‘무지’를 뜻한다. 은사의 필요성이나 그 가치에 대해서 모르면 구하지 않게 되고 자연적인 것으로 은사가 소멸되게 된다. 정적인 제약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눌려있는 상태로 ‘이런 일은 목사님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하면 안돼’라고 자신을 움츠린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면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다. 정적으로 눌려 있으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다.
의지적인 제약은 베짱이 없고, 훈련을 받지 못해서 전해야할 때 담대히 나서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방전도는 전도의 효과 그 자체보다는 전도자는 담력과 의지를 강화시키는 훈련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성령께서 감화를 주실 때 훈련을 해야 한다.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 의지를 강화시키는 훈련으로써 매우 효과적이다. 의지적인 훈련을 통해 성령의 감화가 올 때 마다 주저 없이 순종하는 교인을 만들어야 한다.
세 번째, 아무리 작은 영적인 체험도 무시하지 말고 포착하여 은사를 키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은사는 반드시 각자 체험을 통해서 나타남으로 작은 체험이라도 세밀히 정리하여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네 번째, 교인들에게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병 고침의 은사가 나타나면 우선 가족부터라도 자꾸 기도해 주어서 정말로 병이 낫는 체험을 갖게 하고 그 후에 이웃에 다니면서 전도를 위해 기도해 주어 역사를 체험하는 실습을 시키는 것이 좋다.
다섯 번째, 은사자 스스로가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체험들 잘 정리 하도록 한다.
여섯 번째, 은사가 크게 나타나더라도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한 것처럼 그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영웅시하지 말고 그가 겸손히 계속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영웅시할 것도 무시할 것도 없다. 다만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끼리 정리시켜 주고 잘 성장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한 은사자를 키우려면 반드시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므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참아주어야 한다. 아기 하나를 키우는데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성인이 된다.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시행착오를 용납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를 도움으로써 교회 전체를 세울 수 있게 된다.
9. 은사별 지도 방법
(1) 생각의 은사
생각의 은사는 말씀으로 영감이 오는 은사이다. 영감이 말씀에 부합되고, 듣는 이가 문제를 해결 받고, 은혜를 받으며 더욱 사명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는 은사가 생각의 은사이다.
(2) 의지의 은사
의지의 은사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해야겠다’와 같은 감이 온다. 이 은사는 믿음의 은사이므로 감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능한 것도 믿음이 오면 입으로 시인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역사한다. 성경에 “믿음으로 산에게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것도 입으로 시인함을 통해 우리의 상식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서 이루도록 하라는 뜻이다(막 11:23). 우리 몸은 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역사가 나타나지 못한다.
믿음의 은사를 가진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교인들도 믿음을 갖도록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교회적인 역사가 일어난다. 눈에 즉시 보이는 응답이 없을 지라도 입으로 계속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차차 역사가 나타난다. 어떤 목사님은 진단해보니 병 고치는 은사인데, 본인은 여태껏 그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그렇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시인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고 순종하는 것은 역사가 일어나도록 다리를 놓는 것과 같다.
(3) 말의 은사
말의 은사에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있다. 방언과 통역, 그리고 예언은 교파에 따라 신학적으로 많은 견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논란과 문제가 많지만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은 현재 교회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고, 그로 인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시하기보다는 올바른 이해와 바른 활용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고 방언과 통변, 예언에 대하여 가르쳐야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 14:1-2)
방언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오르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세상의 말과 세상의 운동력들은 사람의 귀와 눈, 그리고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 성경은 마귀가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성령과 마귀로부터 생각을 받을 수 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은 세상적인 악한 생각이고,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생명을 영감으로 준다. 기도하지 않고 머리를 쓰는 것만큼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쉽다. 머리를 많이 굴리는 것은 세상 지혜(선악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헛것으로 아신다고 하셨고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은 자기 올무에 빠지기 쉽다고 하셨다. 말은 영이 역사하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말을 하면 마귀가 역사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2-6)
우리에게서 나가는 말이 사람의 말이면 사람이 움직이는 통로가 되고, 세상의 말이면 세상의 마귀가 움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면 성령이 움직이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말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다. 말은 생각이 쌓였다가 나오는 것이므로 세상 생각이 많이 쌓이면 세상 말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영광의 의식도 마음으로 들어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그들에 대한 의식을 마음에 담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은 우리를 흐뭇하게 한다. 사람의 영은 기도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영이다.
교인들이 기도하지 않아도 성가대나 청년회로 모이면 사람의 영으로 흐뭇하고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 것 같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열심히 모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운동회, 야유회다, 등산대회다, 단합대회다 하는 것들이 모두 사람의 영으로 교인들을 묶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주의 목회는 반드시 문제를 야기 시켜 교회를 깨지게 하거나 욕에 속한 교인들만 양산하게 한다. 그러나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면 다른 감이 들어오지 않고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혀만 움직이게 된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영이 차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 14:2)
방언을 많이 하면 생각이 없어진다. 교회 안에서 시험에 들고 마귀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근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다 생각과 과대망상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방언을 하면 생각이 예민해지지 않으므로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난다.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두렵지 않고 덤덤하게 대처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방언을 많이 하면 사람의 영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면 할수록 내게 유익한 은사이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
사도 바울처럼 지적이고 유식한 사람이 왜 방언을 많이 했겠나? 방언을 말함으로써 세상의 영광 사람의 영을 차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늘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는 사람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거나 어울리는 것이 싫어진다. 목회자들 가운데 다른 목회자들과 어울리거나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기도를 등한히 하는 분들이다. 사람에게서 떨어져야 영적인 사람이 된다. 사람이 좋고, TV가 좋으면 영성을 개발할 수가 없다. 의식적으로라도 골방에 들어가서 눈감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오락 좋아하고, 영화보기 좋아하고, 다방에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영적인 목회를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과 다른 영이 우리 안에 같이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과 가증한 것을 버려야한다.(약 4:4) 교인들을 영적인 교인들로 만들려면 교인들이 많이 기도하게 해야 한다.
새벽기도나 기타, 다른 예배에 올 때 교회버스를 이용하는 교인들이 예전에는 쓸데없는 세상이야기나 하고 자랑이나 해지만, 이제는 타면서부터 내릴 때까지 기도하면서 오게 해야 한다. 예배를 통해 충만히 은혜를 받았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말을 통해 다 쏟게 된다. 예배가 끝나도 금 새 돌아가지 않고, 그 시간에 받은 은혜를 되새기며 기도 받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 교인들의 영적인 수준을 높이려면 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영을 차단시키고 주님의 영으로 채우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시켜야한다. 영감이 쌓이면 속에서 영적인 음성이 들린다. 이것이 바로 방언이 통역되는 현상이다. 기도를 할 때 마음에 문득 응답이 오는 것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이다. 그것이 계속적으로 착착 오는 것이 통역이고 예언이다.
(고전 14:1-2)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예언 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언은 앞날의 비밀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즉 설교가 예언이라고 말한다, 라고 하지만 예언을 설교라고 해석하면 성경의 앞, 뒷말이 맞지 않는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 14:6)
예언이 설교이면, 가르치는 말은 무엇인가? 가르치는 말이야말로 설교인데, 굳이 설교를 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 14:26)
계시가 곧 예언이고, 가르치는 말이 설교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고전 14:29)
설교할 때 둘이나 셋이 설교하나? 또 먼저 사람이 한 설교를 다른 사람이 분변하나? 예언을 설교라고 해석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예언은 분명히 예언이고 계시다. 사도행전 21장 9절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딸이 4명 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였다. 초대교회에서는 여자가 설교할 수 없다. 그들은 처녀로서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할 것을 말했다.
예언이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고전 14:24-25)
예언은 숨은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숨은 일이 드러나면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언은 성경이 말하듯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함으로써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살전 5:20-22) 또한 예언은 부분적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에게 받아서 말씀으로 정리해야한다.(고전13:9, 14:37) 이런 점이 신약시대의 예언이 구약시대의 예언과 성격이 다른 것이다.(신 18:19-22)
또한 예언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현재 영적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롬 12:6) 성경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2)고 하셨듯이 받은 예언들 중에서 기도하고 생각하여 좋은 것을 택하여야 한다. 예언과 관련하여 보다 성숙된 자세는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언을 하면서 ‘올라가지 말 것’을 권했지만 바울은 어떻게 했나? 그는 예언을 듣고 울라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미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닥쳐오는 환란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행 21:10-14)
우리는 여기서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은 기도하지도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없이 그저 예언은사 자에게 가서 “집을 팔려고 하는데, 파는 것이 좋나요?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라는 식으로 점치듯이 기도를 받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완전히 기복전인 미신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면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언은 책망이나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으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통로이므로 함부로 무시하지 말고, 은사 자들을 영적으로 잘 키워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섬김의 은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은사는 일정한 대상을 찾아 섬김을 통해 전도하고 키워 주는 은사이다. 섬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섬길 수 있는 상대를 정해주고 섬기고 전도하도록 해야 한다. 섬김의 은사를 키울 때는 사랑이 가는 대로 손으로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 주거나 만져주거나 말로 위로하거나 구제함으로써 사랑을 표현해야한다. 그럴 때 성령의 역사로 상한 마음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 받아 주심을 믿게 된다. 성령은 성도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이나 재물도 전체가 사랑이 전달되는 매체로 이용되어야 한다.
10.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들
은사의 개발 및 활용을 통한 올바른 영성목회는 기본이 되는 것으로 영적인 교회관의 토대 위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8-12)
오늘날 확실한 교회관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관이 미약하면 능력 있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 이 영적인 교회에 대한 이해는 본인의 저서(교회신악)를 꼭 읽으시기 바란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절대로 교인들이 와서 교회가 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다.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님은 사도나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교사와 목사를 세우셨다.
사도는 무엇인가? 사도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요, 선지자는 영감을 전하고 회개시키는 자이며, 교사는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있다. 오늘날 목사님들은 설교를 통하여 가르치고 영감을 전달하여 회개시키는 교사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는 심령을 키우는 사람이다. 교인들이 있어야 목회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때부터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을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로 세우시고 사람들을 붙여 주신 것이다. 이들이 곧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들이다.
그러면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들의 책임은 어떤 것인가?
첫째, 성도를 영적으로 무장시켜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어서 마귀들의 영통인 세상을 쳐들어가도록 무장을 시키는 것이다
둘째,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성경의 번역 상 ‘봉사’는 마치 밥을 하고 커피를 끓이는 일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봉사가 아니라 목회가 곧 봉사이다. 목회자들의 첫 번째 책임은 교인들에게 목회를 시키는 것이다. 주님을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하고,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바치는 것이 곧 예배이며 목회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목회자로 훈련시키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비유하자면 운동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코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밤잠 못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 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해삼처럼 꼼짝도 않고, 오로지 목회자들만 안달하며 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교회 상이 아니다. 참다운 목회는 교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개인목회를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개인 혹은 구역 단위로 목회를 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교인들이 목회를 하게 되면 자연히 은사자들이 나타난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 은사자들이 가정에 제단을 쌓거나 기도원을 개척하고 돈을 받으며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흐려 놓는 일이 종종 있다. 은사자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나타내는데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에게 순종하면서 충성해야한다. 담임 목회자가 우습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 은사자는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목사님을 도와 그를 세워 주고 뒤에서 돕는 것이 은사자의 바른 모습이다, 책임이다. 성도들이 아무리 은사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인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인도자를 따라 충성할 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영광이 된다.
하늘나라는 질서의 나라요, 계급의 나라이다.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중하신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자기 마음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나타내시며 일하신다.(요16:14)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룹 천사와 스랍천사가 있으며, 그 외에 여러 계급의 천사들이 있다. 천사들은 자신의 계급과 위치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마귀의 종이 된다. 가정에서도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이 각각 자기들의 위치를 지킬 때 가정이 복을 받는 것이지 이탈을 하면 마귀의 소굴이 된다. 교인들이 마무리 능력이 많다 해도 권세와 질서를 무시하면 그는 마귀의 종이 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도관을 세운 박장로가 담임 목회자 아래에서 성장하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몸을 세웠다면 절대로 타락하지 않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교인들이 목회자들을 우습게보기 시작하면 곪아서 타락하는 것이다. 능력을 많이 받은 교인들은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위에 있는 권세자에게 복종함으로써 자아를 죽이고 복종해야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6)
목회자를 우습게 보는 교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저는 한 교회에서만 거의 40년 목회를 했는데, 그 동안의 경험을 보면 제게 반항하고 괴로움을 준 사람 중에 복 받고 잘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질서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 인도자들에게 주신 권세이다.
목사의 권세는 교인보다 더 많이 아는 성경지식에서 오는 것도, 유창한 설교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권위가 서는 것이다.(엡 4:11) 목회자보다 교인들이 더 많은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교인의 위치에서 받은 은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형들이나 아버지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목회자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사실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목회자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교인들을 인위적으로 누르거나 목에 힘을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목회자는 다만 자신을 가지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목회를 하기만 하면 된다.(벧전 5:2-3) 영적인 목회의 시작은 목회자를 통해 전달되는 말씀에 있다. 교인들의 부족함을 단번에 고치려는 생각은 위험하다. 말씀으로 잘 먹이기만 하면 은혜 받은 교인들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사역자가 생긴다.
목회자는 이들을 잘 살폈다가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자리를 주고 교회의 전체적인 영적 분위기를 주도하게 한다. 자주 앞에서 나와 간증도 하게하고, 그들에 미지근한 중간 다수의 무리들이 영적인 소수의 사명 자들에게 감화를 받고 이끌리게 된다. 이때 당 짓기 좋아하고 목회에 비협조적인 반대파들은 제약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교회체질의 개선과 개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도회나 남전도회, 청년회와 같은 부차적인 기관들은 개별적인 목소리를 갖는 독립적인 성경에서 탈피하며 담임 목회자의 결정권 하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그들의 목표는 목회자의 사역을 돕고 후방에서 물질과 기도로 후원하는 것이므로 자체 모임이나 결속, 기타 외부적인 행사들은 자제해야 한다. 대개 오늘날의 여전도회는 교회 내에서 밥을 하고, 커피를 끓이며, 바자회 등을 하느라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뒷전에 밀어 놓고 있는 실정이다. 여전도회는 밥하기 위해 모여진 것이 아니라 전도를 위해 조직된 전도특공대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각 기관들은 기존 교회 내에서와 같이 교회 예산을 들먹이는 이익단체로서의 그릇된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해야한다. 평소에는 구역을 중심으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기도에 힘스고, 교회적인 차원에서 필요가 있을 때에만 기관별로 활동하게 한다. 여전도회가 평소에 쓸데없이 모여서 밤낮 회의나 하고 놀러 다닐 계획만 세우며, 청년회는 등산가고 야유회 가는 일을 의논하는 일에나 신경을 쓰고 예산을 타내는 데만 골몰한다면 교회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관을 강화 기키지 말고 대신 각 구역을 영적인 작은 그룹들로 키우는 것이 은사 목회의 한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