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관계’에 대한 Martin Buber의 관계신학과 대상관계이론 및 영성신학적인 조명

양정식 2012. 6. 17. 18:26

 

 

관계에 대한 Martin Buber의 관계신학과

대상관계이론 및 영성신학적인 조명

Perspective on ‘Relation’ of the M. Buber's Relations Theology,

Object Relations Theory, Spirituality Theology

 

 

 

 

 

 

김 홍 근(Kim, Hong-keun)

 

 

 

 

 

 

 

 

 

 

 

소속: 한세대학교 신학부

직위: 부교수

전공분야: 영성, 목회상담학

휴대폰: 010 2389 0207, 연구실: 031 450 5081, : 031 891 2040

E-Mail: shalomhong@hanmail.net

 

-------------

* “이 논문은 2005년도 한세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한글 초록-

본 논문에서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영역의 조명을 하였다. 첫째는, 마틴 부버의 관계신학적인 조명이다. 부버는 관계성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의 관계이다. ‘-그것의 관계와 달리 -의 관계에서 , 너에게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나는 너를 돌보며, 너에게 헌신하며, 활기를 주고받는 관계이다. 너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을 추구하며, 너의 자율성과 자유를 존중한다. 둘째는, ‘관계에 대한 대상관계이론적인 조명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본능의 긴장완화를 위해서 쾌락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그에게 있어서 대상은 본능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일 뿐, 관계적이지 않다. 하지만 대상관계이론은 견해를 달리한다. 페어베언은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 리비도는 대상 추구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인즈 코헛에게 있어서 자기대상은 자기의 응집력, 활기, 힘 그리고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대상을 말한다. 이는 부버의 -의 관계와 같은 의미이다. 부버는 하나님을 영원한 당신으로 본 반면, 코헛은 하나님은 자기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영성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영성을 대상과의 관계성으로 본다. 그러므로 관계신학, 대상관계이론, 영성신학은 공히 대상과의 관계성의 경험을 통해 영원한 당신 혹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세 가지 영역에는 관계성이라는 중요한 접촉점이 있다. 그러므로 관계신학, 대상관계이론, 영성신학은 관계성이라는 현미경을 가지고 드려다 보면, 상호 연결되는 접촉점이 많다. 이러한 연구는 관계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주제어: 대상관계, 영성, 자기대상, 나와 너, 대상추구적 리비도

 

-abstract-

This thesis is about study on three approaches about relation. Firstly, it deals with relational theology of Martin Buber. Buber insists that relation has two forms: 'I-Thou relation' and 'I-it relation.' In 'I-thou relation,' 'I' am related with 'you' emotionally, so 'I' cares 'you,' sacrifices myself for 'you,' and energizes 'you' instead using 'you' for 'my' purpose, 'I' respects your autonomy and freedom. Secondly, it deals with the perspective of Object-relation psychology. While Freud's position that "libido pursues desires for relaxing oneself" does not have any relational implication but only one for satisfying selfish desires, object relation theory is different from Freud's one as affirmed in Fairbairn's statement, "libido ultimately pursues relationship with object." That is, according to Fairbairn, libido is the reality of pursuing object. In Heinz Kohut, self-object is the object who makes possible cohesive self, vitality, power, and harmoniousness. It is in the same line with Buber's position of "relationship between 'I' and 'you.'" While Buber saw God as eternal 'you,' Kohut thought God as playing a role as self-object. Thirdly, while there are various definitions about spirituality, spirituality is also a kind of relationship with object. Thus relational theology, object-relation theory and spirituality are in common in that three approaches all pursue, in a sense, the relation with eternal or transcendental thee through the experience with the object. In these three dimension, there is a contact of point named relationship.

 

Key Word: Object Relations, Spirituality, Selfobject, I-Thou, The Object-Seeking Libido

1. 서론

 

사랑받을 만함과 수용 받을 만함이라는 주제는 어떤 관계에서나 존재한다. ,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주요관심사도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두고 있다. 이런 관심은 좋음나쁨에 대한 내적 갈등의 근원이 된다. 자기(self)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Ego)의 이미지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고, 대상과의 상호관계의 결과로 획득한 자기에 대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신체와 정신 조직을 포함한 한 개인의 전체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구자는 간략하면서 함축적인 표현으로 사랑받을 만하고, 수용 받을 만한 존재로서의 자기감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자기라는 말도 대상과의 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본 논문은 관계에 대한 마틴 부버(Martin Buber)-(I and Thou)의 관계’, 대상관계이론 중 페어베언(W. R. D. Fairbairn)의 대상과의 관계추구적 리비도개념과, 하인즈 코헛(Heinz Kohut)자기대상(Selfobject)’ 및 기독교 영성의 본질인 대상과의 관계경험을 통한 인식의 고양과 확장이라는 세 부분을 연결하는 데 대한 것이다. ‘관계에 대한 세 영역(관계신학, 대상관계이론, 기독교영성)은 놀라울 정도로 그 개념이나 주장이 일치된다. 그러므로 세 영역을 함께 연구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새롭고 확장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4장에서는 성숙한 관계경험의 결과물로써 긍휼의 영성의 삶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관계에 대한 세 가지 학문분야의 접근

프로이트(G. Freud)의 고전적 정신분석학은 리비도(libido)는 쾌락을 추구한다.”는 대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욕동구조모델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상관계정신분석학은 견해를 달리한다. 페어베언은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추구한다. 쾌락은 단지 대상과의 관계를 위한 촉매자, 인도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라고 했다. 페어베언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행동의 기본 동기는 쾌락과 긴장해소라는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본 장에서 관계에 대한 마틴 부버의 신학과 대상관계이론 및 영성신학적인 조명을 하고자 한다.

 

1) ‘관계에 대한 관계신학(Relations Theology)의 이해

 

마틴 부버(Martin Buber)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관계야말로 실존의 범주요, 남을 맞아들이려는 준비태세이며, 혼의 틀인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모든 존재를 관계로 인식하였다. 부버는 개인의 우위성보다 관계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부버에 따르면 개성은 개인의 단순한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적 경험의 산물로 보았다. 부버는 관계성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I-Thou)’-그것(I-it)’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 -그것의 차이는 대상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에 달려있다. ‘-의 관계에서의 -그것에서의 는 각기 다른 나이다. ‘-그것에서 나는 정서적으로 떨어져 있고,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단지 나는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하지만 -의 관계에서 나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나는 너를 돌보며, 너에게 헌신하며, 활기를 주고받는 존재이다.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있고, 너의 자율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나이다. 왜냐하면 대상에 따라 나는 다른 나로 관계를 맺기 때문이며, 대상을 향한 나의 지향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대상과도 로서 혹은 그것으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부버는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라는 기본어와 -그것이라는 기본어 안에 있는 가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견해는 페어베언의 대상 추구적인 리비도 이론과도 비슷하다.

부버는 -의 만남은 하나의 은총이며,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하여 근원어를 건네는 것은 나의 전존재를 건 행위 즉, 나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사이에는 어떠한 개념형태도, 예비지식도 그리고 어떠한 공상조차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회상조차도 단편적인 형태에서 전체적 통일에로 진전할 때에만 -는 성립된다. 모든 수단이 다 장애이며, 진실로 모든 수단이 무너질 때 비로소 -의 만남이 실현된다. 부버는 -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감정은 사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나에게 달라붙어서 너까지라도 자기의 내용이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너를 인격으로 보고, 이 세계에서 자유롭고 유일한 존재로 너를 보며, 이렇게 너를 볼 때만이 나의 실존을 느낀다. 미움은 너를 부분적으로 보게 하나, 사랑은 너를 전체로 보게 하며, 너의 전체를 긍정하게 한다. 부버는 인간의 정신도 너에 대한 응답이라고 본다. 정신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부버는 -의 관계와 -그것의 관계의 역전과 반복성을 설명코자 예술의 세계를 예로 들었다. 화가는 자연에 마주서서 진정으로 자연을 로서 만나 얻게 된 교감을 어떤 형상으로써 속박을 하며, 이처럼 속박된 형상은 작업과정을 통하여 작품이 된다. 작품이 된 이 자연은 이미 의 세계가 아니고 그것의 세계로 멈추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된 작품을 이용 가치로서만 묶어 둔다면 그때 그것의 세계는 썩는 세계로서만 머물게 된다. ‘그것으로서의 작품을 다시 로서 마주설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의 위대한 문화도 근원적으로는 만남에서 비롯되며, 너에의 응답, 곧 정신의 본질적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의 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자연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 둘째,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 셋째, 정신적 존재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삶이다. 첫째 영역의 경우는 모든 피조물들이 나와 마주서서 활동하고 있지만, 나에게까지 오지는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것에 라고 말해도 언어의 장벽을 넘기 어렵다. 한 그루의 나무나 자연경관과도 관계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그 나무는 그것이 아니며, 나에게 활기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가 된다. 둘째 영역, 즉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경우에는 말이 통한다. 여기에서 관계는 말의 형태를 취한다. 언어는 말의 주고받음 속에서 연속적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언어로 형성된 말은 상호응답을 하게 된다. 셋째 영역의 경우에는 관계가 구름에 덮여 있으나 스스로 나타나고, 말이 없으나 말을 만들어 낸다. 나는 라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그렇게 부름 받고 있음을 느끼며 대답한다. , 형상화하고 사유하고 행동한다. 입으로는 라고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존재를 기울여 근원어를 말하는 것이다.

부버는 모든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 유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주유소의 직원이나 톨게이트 직원들을 단순히 기계적인 관계로 맺는다. 그는 내 차에 기름을 넣고 나는 그에게 돈을 지불한다. 톨게이트 직원은 통행료를 받고 내 차를 통과시키면 된다. 주유원과의 관계하는 시간은 5분 내외일 것이고, 톨게이트 직원과의 관계하는 시간은 10초안에 끝난다. 그것이 문제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문명사회는 너무나 -그것에 연류 되어있기 때문에 나와 너로 관계하는 능력을 상실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참 영성의 삶은 보편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인들의 삶은 모든 관계에서 긍휼과 따뜻함을 가지고 -의 관계의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짧은 순간에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는 관계에서도 -관계가 가능하다.

 

2) ‘관계에 대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의 이해

 

프로이트에 따르면, 유아는 어머니가 수유를 통해 구강적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에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대상이란 본능의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욕동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상 스스로 욕동충족의 가치를 갖고 있다. 초기 인간존재는 일차적인 자기애로 가득하지만, 발달단계에 따라 자신의 에너지를 타자와의 관계에 투자하게 된다. 성인기에서도 이런 관계는 쾌락 추구와 긴장 완화를 둘러싸고, 구조화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대상관계이론의 중요한 학자인 페어베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리비도적 목적은 대상-관계와 비교해 볼 때 이차적인 중요성만 갖는다. 충동의 만족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가 리비도적 추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의 동기이론의 주요개념은 첫째,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대상은 처음부터 본능의 충동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던 클라인의 수정된 충동이론에서 더 나아가, 원래 리비도 에너지는 대상을 추구하며, 쾌락은 충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수단, 혹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둘째, 충동은 정신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에너지와 구조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19세기 물리학의 영향을 받아 충동을 자아와의 분리된, 방향성 없는 별개의 에너지 덩어리로 간주하였으며, 초자아와 자아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활동을 하기 위해,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대리자로 여기었다. 하지만 페어베언은 자아 구조는 에너지를 가지거나 혹은 그 자체가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처음부터 대상을 향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페어베언의 견해는 자아를 기구로서, 에너지 없는 구조로서 보는 견해는 원래 에너지화(Energized)되고, 동시에 구조화된(Structured) 인간 활동을 언어적으로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 본능으로부터 분리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충동은 구조와 대상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아 안의 충동은 자아가 대상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준다. 페어베언은 그의 새로운 동기이론을 주장했다. 리비도는 대상을 통해 본능적 긴장을 해소하려는 성향보다는 대상 자체에 집착하는 성향이 더 크다. 부모가 어떤 돌봄을 제공하든 아이는 그것을 통해 부모와 관계를 맺는다. 그 후, 이러한 관계 형태는 아이가 타인들과 애착하고 관계를 맺는 유형으로 자리 잡는다. , 유아는 처음부터 타자들을 지향하며, 유아가 관계를 지향하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며, 유아는 개별적인 유기체가 아닌, 인간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동기가 타자와의 접촉과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면 페어베언의 동기이론에서 공격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페어베언은 임상적 측면에서 공격성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격성은 자발적으로 발생한다기보다, 타자와 접촉하고자 하는 일차적 목적이 좌절된 결과 발생하는 반작용이다. 따라서 공격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지 못한 실패한 대상관계에서 오는 이차적 결과물이다. 비록 페어베언의 체계에서 공격성이 일차적인 동기는 아니지만, 그 임상적 의미는 매우 크다. 어머니와 유아라는 단일체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문명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강렬한 공격성은, 좋은 대상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아가 해결해야 하는 결정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 동기를 관계로 보는 페어베언의 전제는 친밀감은 물론이고 공격성까지도, 관계를 향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 동기는 쾌락의 추구가 아닌 타자들과 접촉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있다.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쾌락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쾌락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요, ‘대상에게 가는 길잡이이다. 유아는 성감대를 통한 다양한 감각적 쾌락 추구 행동들을 한다. 이는 타자와 만나고 관계의 양식을 형성하게 하는, 대상에게로 가는 길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성감대는 일차적인 리비도적 목표가 아니며, 다만 대상 추구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통로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동기는 타자들과의 연결을 갖고, 유지하는 것이다. 쾌락은 대상 추구에로 인도하지 않지만, 대상 추구는 쾌락을 제공한다. 쾌락은 목표가 아니라, 만족스러운 관계의 결과이다. 쾌락은 일차적인 동기라기보다는 이차적인 것이며, 좋은 대상관계의 파생물이다. 충동은 대상을 추구하지 않지만, 대상은 정서적인 반응을 촉발시킨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정욕의 에너지가 방출의 기회를 기다리며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타자와의 대인관계적인 만남이 흥분케 하고 리비도를 자극시킨다. 그러므로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관계적이다. 삶은 긴장의 감소가 아니라, 연결의 확립을 둘러싸고 구조화된다. 페어베언은 인간은 때때로 긴장의 감소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쾌락 추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인간본성이 왜곡된 모습이며, 이차적인 또는 타락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순수한 쾌락추구 속에도 타자와의 관계성을 열망하는 끔찍한 고독이 도사리고 있기에 왜곡된 관계성의 형태로 관계성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성기적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만족스런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대상관계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스런 성관계를 즐길 수 있다. 성기는 타자와의 밀접한 상호 교류를 위한 가장 강렬하고 적절한 매기물이다. 페어베언의 발달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밀한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성기적 기능을 획득한다는 것은 친밀감을 형성하는 역량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 보면 리비도는 대상을 통해 본능적 긴장을 해소하려는 성향보다는 대상 자체에 집착하는 성향이 더 크다. 그리하여 페어베언은 이를 대상추구적 리비도라고 불렀다. , 인간은 대상과의 관계추구적인 존재로 본 것이다. 초기 부모가 어떤 돌봄을 제공하든 아이는 그것을 통해 부모와 관계를 맺는다. 그 후, 이러한 관계 형태는 아이가 타인들과 애착하고 관계를 맺는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3) ‘관계에 대한 어반 홈즈의 영성신학적 이해

 

영성에 대한 정의는 영성신학자들 마다 그 정의를 달리하고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영성을 관계경험으로 보는 것이다. 넬슨 떼이어(Nelson S. T. Thayer)영성이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의 영향아래 체험된 경험이라고 말한다. , “살아본 체험이 영성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살아본 체험이 영성의 중심이라는 말은 그 사람이 관계를 맺은 대상과의 체현된 경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특히 어반 홈즈(U. T. Holmes)는 기독교 영성을 관계경험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자세히 설명한다. 첫째는, 영성은 인간의 관계성 형성에 대한 보편적인 능력이다. 영적인 사람, 비영성적인 사람이란 없다. 영성이란 관계성을 향한 개방성이며, 이는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능력이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로 보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 실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 존재란 본질상 관계성을 요구하는 생물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영성은 시작된다. 영성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해 개방적이 된다는 것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내부에는 타자와의 합일을 원하는 타고난 열망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 열망은 에로스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애욕적(erotic)이란 단어가 나왔다. 그런데 이 욕망은 외설적인 감정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기본적인 요구이다. 이것은 개인 속에 있는 일종의 에너지이며, 그 본래 목적에서 다소 벗어나긴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성적 열망의 터 닦음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사실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그 무엇과의 관계를 맺고자하는 영성을 기대하게 한다. 과학적 분석은 모든 경험을 숫자에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객관성, 예측, 통제라는 가치에 중요성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로서는 인간관계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 영성에서 말하는 초월성 경험이란 자신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에 의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경험이다. 인간의 초월성의 경험은 일종의 에너지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유한한 마음과 대면할 때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적이며, 규범적인 가치의 궁극적 근원이 되지만, 인간이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에너지가 각자의 경험의 세계로 들어올 때이다. 이 초월적 에너지에 대하여 개방하고 있는 것이 영성적인 삶의 특징이다. 초월성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며, 또한 영성은 그러한 의미, 즉 하나님의 마음과 관계성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로, 영성은 고양되고 확장된 의식을 갖게 된다. ‘자기 소명의 명확성’,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영성은 습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성적으로 됨이란 그것은 일종의 수용성이요, 기다림이요, 신뢰함이다. 그런 면에서 영성은 능동적인 수동성(An Active Passivity)이다. 개인이 하나님을 알 때, 즉 초월성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그 감각된 결과로 인식이 고양되어지고 확장된다. 초월성과의 관계경험의 결과로 인식이 고양되고, 확장되면, 더 깊게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넷째로, 이것은 그러한 지식의 본체로 인도하며, 이 본체는 항상 역사적이라는 사실로 인도한다. 역사적이란 말은 지식을 담고 있는 내용적 형상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특성은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시간적이며 지리적인 편협성을 초월한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분명히 역사성을 띠고 있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가 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게 그 역사는 오늘의 역사이지 이천년 전의 역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안에 순간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자기 동일화(The Identification of God)는 모든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종의 초청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안에는 최고 극치의 순간, 즉 우주적 역사를 예기시켜 주는 사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역사이다. 또한 인간 개인의 역사성 안에서 각기 다른 영성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자기의 영성을 실현하는 존재이다. 다섯째로, 영성은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드러낸다. 어떤 결단을 내리는 일과 이 결단에서 나오는 행동은 자신의 인식의 산물이다. 만약 테니스 게임을 한다면, 먼저 테니스 게임이 있다는 것과 그 규칙을 숙달하여야 한다. 모든 행동은 자신의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행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행동은 세계를 향한 일종의 투사이다. 그리하여 전에는 몰랐던 일을 알게 된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한 영성은 사회적 행동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의도하고 있는 대로의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영성의 성취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측정된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열매로 그를 알리라고 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정의는 대상과의 관계경험을 통하여 인식의 확장과 고양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로써 세계 공동체 속에서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의 첫째 목적은 소원성취에 있지 않고, 관계성 형성(The Establishment of a Relationship)에 두어야 한다. 복음서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 확신을 주는 구절들이 있다. 그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성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리키고 있다.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바울의 권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맥락을 넓게 확장하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기도란? 우리가 행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는 행위이다.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대상을 추구한다는 대상관계이론을 기도의 영성에 대입해보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 기도가 소원성취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듯이, 리비도도 쾌락추구에 목적을 두지 않고 있다. 기도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성 형성을 지향하듯이 리비도의 진정한 목적은 대상추구이며, 그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함이다. 페어베언이 말한 리비도는 처음부터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을 기도의 신학과 좀 더 연결해 보자. 기도는 인간을 찾아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선성(the loving initiative of God)에 입각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선성이란?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셔서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자신을 나타내며, 약속을 한다.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잘 때, 하나님은 꿈속에서 나타나서 그에게 말씀하고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아시고, 모세를 통하여 해방의 역사를 준비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선성은 예수에게 와서 사랑의 아버지, 아바 아버지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여러 번 간청해야 겨우 응답하시는 인정 없고, 엄격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요구를 미리 다 알고 배려하고 있는 자상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기선성은 인간의 기선성에 대해 배타적이 아니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있어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기도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도 소중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이 당신과 보다 가까운 관계를 맺기 원하시고, 보다 성숙한 기도의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만남의 행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며, 쌍방 통행의 방식을 취한다. 기도란 우리가 행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는 행위 전부를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분명히 기도는 소원성취에 그 첫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형성에 있다. 전통적으로 기도에는 마음의 기도와 발성기도로 구분했다. 하지만 기도는 기도하는 자 편에서 집중하고 있는 지향성의 강도에 따라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됨에 따라 기도는 지향에 집중하는 농도가 희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 온전한 인간관계에서는 상대를 도구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관계성만을 열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리비도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상, 즉 관계를 추구하듯이, 기도도 자신의 욕동인 소원성취에 목적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추구해야 한다.

 

3. ‘영원한 너(Eternal Thou)’자기대상(Selfobject)'으로서의 하나님

 

1) 마틴 부버의 영원한 너(Eternal Thou)’

 

부버는 하나님을 영원한 당신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에서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영원한 너라는 것이다. 부버의 중심적인 신학적 금언은 영원한 당신은 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접근될 수 있을 뿐임을 가르친다. 부버의 하나님 이해는 -의 관계의 연장이다. 그의 주된 관심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원한 너라고 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의도하고 찾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하나님과도 하나 되어 살 수 있는 친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부버는 생활 속에서 매일 만나는 순간적인 너는, 영원한 당신에게로 가게 하는 작은 빛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한 너에게서 만난다. 모든 하나하나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게 하여 주는 창문과 같다. 이 하나하나의 너를 통하여 영원한 너에게 나아간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너는 죽을 수밖에 없기에 언젠가는 그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영원한 당신은 영원한 존재요,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영원한 당신은 그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정서적으로 거리가 있는 비관계적인 태도나 취약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취급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과 관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자리에 유한한 것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경건한 철학과 신학이라 하더라도, 부버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무신론을 향하는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직 관계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관념 또는 개념적 존재로서의 신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부버는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수용성을 필요로 하는데 그때 그가 수용하는 것은 어떤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이라고 한다.

부버는 자신의 저서인 예언자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야훼니라”(13:4)고 하여, 이스라엘에게 대화를 걸어온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앞에 가시고, 그 백성은 뒤를 따라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인도하시고,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어서 하나의 바른 길과 많은 잘못된 길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현실성 속에서 파악했고, 민족 개개인이 하나님께 고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을 걸어오는 관계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을 호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할 수 있는 그런 대화의 관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고, 너와 더불어 모든 만남에서 영원한 너를 만나게 되고, 인간은 전 존재를 바쳐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관계의 만남에서 하나님은 이 세계의 모든 것 속에 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타자와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순간순간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은 우리가 우리의 전체로 하나님께 응답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며,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책임이 인간의 결단과 책임성 속에 있다.

사람들은 절대존재를 만났을 때, 특별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 경험에서 경험하는 감정적 느낌이야말로 하나님과 사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만남에서 얻어지는 감정적 느낌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감정은 만남에서 파생되어진 부차적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혼에 의해서 극단적이거나 모순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감정이나 느낌과는 반대되는 우연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 속에서 그에게 의존함으로써 완전히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부버는 신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체, 즉 진정한 삶은 매일의 생활과 느티나무 잎사귀에 비치는 태양의 광선속에서 영원한 당신인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불가사의한 신비한 수수께끼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의 본질, 신비의 실체는 인간의 삶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아의 황홀 경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인간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매일의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과 장면 속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영원한 당신은 항상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2) 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Selfobject)’

코헛에 의하면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살다가 죽는다. 그는 자기는 자기대상의 모체 바깥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코헛이 말하는 자기대상은 자기의 응집력, 활기, 힘 그리고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대상을 말한다. 코헛은 성숙한 자기대상관계의 예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가 조용히 어깨에 팔을 올려놓을 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능력, 음악을 들으면서 힘이 나고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반응해주는 자기대상으로서 청중으로부터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창조성의 산물을 즐겁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다. 코헛의 이러한 주장은 마틴 부버가 말하는 -의 관계와 맥락을 같이 한다. 부버와 마찬가지로 코헛에게 있어서도 자기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음악이나 특별한 문서, 자연경관일 수도 있다. 종교적 전통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들, 예컨대 경전, 나무, 조각물, 음악 등은 자기대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부버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자기대상이 되는 것은 대상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과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 때문이다. 코헛은 자기대상의 경험을 주변에서 끌어올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서적 성숙도를 판단하다. 다시 말해서 반영적 자기대상(Mirroring Selfobject), 이상화 자기대상(Idealizing Selfobject), 그리고 쌍둥이 자기대상(Alter Ego or Twinship Selfobject)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진 사람이 바로 자기의 본능을 조절한 능력을 갖추게 되고, 동시에 안정된 정서적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와 자기대상과의 관계는 자긍심의 기초가 되며,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의 토대가 된다. 자기대상이 이상화된 힘과 고요함의 원천으로서 본질적으로 그와 같으면서 고요히 그의 곁에서 현존하며, 그의 내적 생활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그의 일생을 통해 그의 경험과 연결되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 자신을 응집력이 있고 조화로운 굳건한 존재로서 경험하게 만든다.” 생존에 산소가 필수적인 것처럼, 아동의 심리적 생존을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자기는 타고난 아기의 잠재력과 아기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 유아에게 있어서 자기대상은 한 사람이 성숙하면 스스로 담당하게 될 그의 정신구조의 기능을 유아 시절에 대신 맡아주는 사람을 말한다. 유아는 대상이 수행하는 것이 심리적 기능으로 경험되는 것이지, 대상의 특정한 인격적 성품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유아는 대상이 심리 구조인 자기의 일부분으로 경험한다. 대상이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경우, 대상을 자신의 손과 발의 하나로 또는 몸의 한 부분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상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심리구조는 형성되기 어렵고 따라서 병리의 원인이 된다. 코헛은 자기의 부분으로 경험되는 대상들을 자기-대상들이라고 했으며, 19781029일 어네스트 이라 월프(E. Ira Wolf)의 집에서 ‘-’을 떼어 자기대상이라고 했는데 이는 대상이 자기와 분리된 존재로서 경험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심리구조는 전에 자기-대상들이 수행하던 기능, 즉 마음을 진정시키고 긴장 조절과 적응 기능들이 내재화된 것이다. 이 구조는 이상화된 옛 대상에게 투자된 자기애의 점차적 철회의 결과로 발달된 것이며, 자기-대상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기능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다.

아동의 초기 심리구조는 자기대상의 발달된 심리구조와 융합된다. 그렇게 해서 아동은 자기대상의 감정 상태를 경험한다. 아동은 촉감, 목소리의 음조 등과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기대상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낀다. 자기대상은 유아의 욕구에 공감적으로 반응해 줌으로써 자기가 발달하는 데 필요한 경험들을 제공해 준다. 아동은 자기애적 욕구에 따라 자기대상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대적 자기와 이상화된 부모원상이다. 첫째는, 아이의 과대주의와 과시주의의 욕구에 대해 공감적인 반응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이며, 그러한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주목받고 관심과 인정과 찬사를 받고자 하는 자기애적 욕구를 가지는데, 부모는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제공하고 충분한 찬사를 제공함으로써 아이로 하여금 과대주의와 과시주의의 욕구가 충족되는 경험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애적 욕구가 충족되는 동안 아이의 자기는 힘 있고, 자신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경험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초기의 응집력이 없던 자기는 차츰 응집력을 지닌 자기로 변형된다. 또한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원시적인 과대주의와 과시주의는 차츰 길들여지고 조절되고, 보다 현실적인 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자기감 또는 자존감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과대주의와 과시주의가 공감적인 반응을 받지 못하면 자기애적 상처가 생기게 되고, 고착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러한 개인의 과대주의와 과시주의는 발달과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그대로 원시적인 형태로 남게 되며, 그의 자기는 충분한 응집력을 지니지 못한 파편화되기 쉬운 취약한 자기로 남게 된다. 둘째는,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아이의 시도를 수용해 주고, 이상화된 대상으로서 아이를 과도하게 실망시키지 않고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이상화하고, 그 이상화된 대상으로부터 보호받고 긍정 받는 경험을 통해서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결함과 좌절에 직면해서 무력감과 공허감을 느끼지 아니하고 강한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이러한 이상적인 자기대상들과의 연합이 유지되는 한, 강하고 충만하고 안전함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이상화된 부모상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고, 차츰 그 이상화된 부모상을 내면화하여 자기 이상으로 삼게 된다. 이 자기 이상은 그가 인생을 살면서 보다 가치 있고,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상화의 시도가 좌절되거나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는 결국 자아 이상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을 목적의식 없이 낭비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자기심리학에서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대상이다. 하나님은 전능하며, 사랑이 충만하시며, 완전하게 반사하는 부모(Perfect Mirroring Parent)로서 경험될 수 있다. 코헛은 이상화된 부모상과의 관계는 진실한 신자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유사점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 “약하고 겸허한 신자가 융합하기를 원하는 완전하고 전능한 하나님은 아주 오래된 전능한 자기대상, 이상화된 부모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대상이 되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이상화된 신성의 현존의 환각적 마법(Hallucinatory Conjuring)”은 개인에게 탁월한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원천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관계적 종교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고 이해된다. , 기독교 신앙의 기본 전제는 그 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안에서 만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피조물을 초월해 계시는 전적 타자로서 존재하시며, 동시에 피조물과의 관계성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와 삶 자체를 관계적 모체로부터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관은 그 근원적인 차원에서 코헛의 자기심리학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전능한 창조적 능력으로 만물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 안에 자신의 가치를 불어넣으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며 감탄하시고 칭찬하시며 복 주신 창조 이야기는 코헛이 말하는 자기의 탄생과정에 대한 서술로도 읽을 수 있다. 아기의 자기가 자신을 감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긍정해 주며, 찬사를 보내는 부모를 경험함으로써 그 탄생과정을 시작하듯이, 인간의 첫 경험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긍정적인 눈빛과 찬사가 담긴 축복이었다. 이것은 비단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만 해당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피조 세계, 인간과 피조 세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진실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그대는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2:23)라고 감탄어린 소리를 발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이 철저하게 관계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자기 대상이시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을 위한 자기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 준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양육 받고 강건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성장과정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단순하고, 어린 아이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가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관한 이야기는 자기대상으로부터의 갑작스런 단절과 상처 입은 자기가 드러내는 병리적인 모습과 관련된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은 자기애적 병리가 드러내는 교만하고, 거만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관계의 파괴는 인간의 교만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코헛은 관계 파괴의 원인이 자기 대상의 실패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론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결과와 또한 파괴된 관계의 회복 과정에 대한 서술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존재한다. 타락에 따른 직접적인 인간의 반응은 수치심과 공포였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과시주의가 반영되지 못한 채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첫 반응이기도 하다. 타락의 두 번째 반응은 책임의 전가였다. 아담은 하와에게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각각 그 책임을 전가했다.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이들은 각각 투사를 사용하여, 상처 입은 자기가 느끼는 수치심과 공포를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어적인 투사는 점점 더 편집적인 체계를 형성하게 되고, 거기에는 의심과 박해 불안, 그리고 증오의 분위기로 가득하게 된다. 인간의 자손은 뱀의 머리를 칠 것이고, 뱀은 인간의 뒤꿈치를 물것이며, 하와는 해산의 진통을 겪게 되고, 땅은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저주 안에 담긴 내용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교리는 철저하게 관계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인간의 결단을 요청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회개의 과정은 자기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이 그의 자기의 핵심에 깊은 부조화와 파편화의 위협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치료과정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며,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그 동안 자신이 세워 놓은 방어체계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 대상과의 신뢰와 의존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구원교리에서 기독론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갭을 메워 주고,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중재자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인간의 현재의 죄 된 모습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인간성의 모습, 모두를 보여주는 거울의 기능을 갖는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자신의 죄 된 모습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되어야 할 참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그 분은 우리가 날마다 바라보고, 배우며 닮아가야 할 모델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코헛의 자기 심리학적 용어에서 변형적 내면화(Transmuting Internalization)’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변형적 내면화란 내재화와 비슷한 과정으로 아이의 자기 속에 자기대상의 한 측면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에서 부딪치는 사건들을 직면하고 좌절과 실망을 견디어 냄으로서 자기대상의 기능적 특성들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의심과 자신의 연약함, 좌절 속에서 성화되어진다. 코헛의 자기대상 개념은 힘주시고, 생기와 조화로움과 안전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하나님은 더 없이 좋은 자기대상이 된다.

 

4. 성숙한 대상관계, 영성적 관계경험의 결과물로서 긍휼의 삶

 

성숙한 대상과의 관계, 영성적 관계의 결과물로서 긍휼의 삶을 살게 된다. 부버의 -의 관계, ‘영원한 당신’, 페어베언의 대상 추구적 리비도’, 및 코헛의 자기대상의 관계경험 안에는 긍휼이 핵심으로 존재한다. 성숙한 대상관계과 영성적 관계는 긍휼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자기대상과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랑을 경험했다면, 긍휼의 마음이 체득되어 질 것이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이 내재되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긍휼을 동정심’, ‘부드러운 마음’, 특히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형제애로 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설명한다.

연민(Pity)은 측은히 여기는 것이라면 긍휼(Compassion)의 의미는 와 함께 아파하고’, ‘와 함께 겪고’ ‘와의 일치를 공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긍휼은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그래서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바라보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정신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2:6-7)라는 말씀은 긍휼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삶은 인간과 함께 겪으셨고, 함께 공유하신 것이다. 나아가서는 인간을 향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기신 것이다. 그 선물은 긍휼에서 시작되고, 긍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긍휼에 의해 오늘도 이어지는 것이다.

참된 긍휼은 기쁨을 포함하며, 기쁨과 축제는 긍휼을 둘러싸고 있다. 긍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일체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체감에는 큰 기쁨이 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일체감만 있다면 그것은 축제가 된다. 축제는 자아, 문제들, 어려움을 잊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다. 긍휼 역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공통의 기반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완화를 마음에 그리기 위해 자아를 버리고, 문제들을 버리고, 어려움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제 없는 긍휼은 없고, 긍휼 없는 축제도 없다. 축제를 벌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긍휼의 범위는 우주적이다.야훼의 긍휼은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145:9)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에까지 미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넘치고(103:11), 긍휼을 사람들에게 베풀겠다고 약속하며(30:3), 이 약속대로 구원을 베푸시며(13:17). 하나님의 자비는 다함이 없고,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이다(3:22).

긍휼은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기사랑과 대상사랑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타주의는 자기를 희생하여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과 타자를 함께 사랑하는 대신, ‘이타주의라는 용어의 변질된 용법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이타주의를 생각하는 기본적인 관념이다. 하지만 긍휼은 이타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긍휼이 뿌리박고 있는 온전한 통찰력은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지 않고, 나는 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나 자신의 가장 좋고 가장 크고 가장 충만한 자기-관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픔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는 데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기쁨이 된다. 오늘날 긍휼이 모든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왜냐하면 공동지구촌의 생존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긍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생존의 가능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에 스며든 동일한 사랑이다. 이와 같이 긍휼은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태어난 열정적인 생활방식이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창조주가 같기 때문이다.

긍휼은 모든 대상에 대할 때, 따뜻한 친절과 사랑의 마음과 태도를 갖는 것이다. 사랑 속에 노출되어졌다면, 귀하게 여겨지고 가치 있게 돌봐졌다면, 사랑의 빛을 받았다면, 그 빛은 자신의 삶에서 작든 크든 다시 반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은 손 내밀어 긍휼과 상호연결의 풍요로움 속에 거하기를 원한다.

5. 결론

 

지금까지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영역의 조명을 하였다. 첫째는, 마틴 부버의 관계신학적인 조명이다. ‘에 의하여 대상을 -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만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둘째는, “리비도는 대상추구적이다.”라는 관계에 대한 대상관계이론적인 조명을 하였다. 셋째는, 영성의 의미를 관계적으로 보았다. , 영성은 대상과의 관계경험을 통해 인식의 고양성과 확장성을 갖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로써 공동체 가운데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관계신학, 대상관계이론, 영성신학은 공히 대상과의 관계성의 경험을 통해 영원한 당신, 혹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설명했다.

부버는 하나님을 영원한 당신으로 보았다. 그는 매일의 생활과 느티나무 잎사귀에 비치는 태양의 광선속에서 영원한 당신인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 모든 관계경험은 하나님을 영원한 당신으로 경험하도록 이끈다. 하인즈 코헛은 하나님을 자기대상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전능하며, 사랑이 충만하시며, 완전하게 반영적 부모처럼 경험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과 장면 속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므로, 영원한 당신은 항상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기독교는 관계적 종교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고 이해된다. , 기독교 신앙의 기본 전제는 그 분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안에서 만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피조물과 초월해 계시는 전적 타자로서 존재하시며, 동시에 피조물과의 관계성 속에 있다.

참고문헌

 

김외식. 현대교회와 영성목회.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미국정신분석학회 편, 정신분석 용어사전. 이재훈 외 역.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2.

최한구. 마틴 부버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Bollnow. O. F.실존철학과 교육학. 이규호 역. 서울: 박영사, 1967.

Buber Martin. 나와 너. 김천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_____________.예언자의 신앙. 남정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

_____________. Between Man and Man.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1966.

_____________. I and Thou. W. Kauffmann trans. New York: Scribners, 1970.

Fairbairn W. R. D. 성격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이재훈 역.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3.

_____________. An Object Relations Theory of Personality. New York: Basic Books, 1954.

Fox Matthew. 영성-자비의 힘. 김순현 역 서울: 다산글방, 2002.

Hinshelwood R. D. A Dictionary of Kleinian Thought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89.

Holmes U. T. 목회와 영성. 김외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Hughes J. "Fairbairn' s Revision of Libido Theory: The Case of Harry Guntrip" In Fairbairn and the Origins of Object Relations, ed. Grotstein J. and Rinsley D. New York: Guilford Press, 1994.

Kohut Heinz. How does analysis cur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____________. The analysis of the Self.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____________. The Restoration of the Self. Madison: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7

Mitchell Stephen A. & Black Margaret J. Freud and Beyond. New York: Basic Books, 1995.

Nouwen Henri J. M. 긍휼. 김성녀 역. 서울: IVP, 2002.

St. Clair Michalel, Object relations and Self Psychology: An Introduction, Belmont, CA: Books/cole, 2000.

Thayer Nelson S. T. 영성과 목회. 백상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Wesley John. "Upon our Lord's Sermon on the Mount", John Wesley's Fifty-three Sermom, ed. Edward H. Sugden. Nashville: Abingdon Press, 1983.

출처 : 한국정신영성치료연구회
글쓴이 : 김홍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