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래목회 대 예언
■ 차 례
1부 교회 구조조정, 이렇게 정착시킨다. 1. 중앙집권적 목회구조에서 지방분권적 목회구조로 전환하라 2. 개교회주의에서 교회연합으로 전환하라 3. 세대 중심에서 간세대 중심으로 전환하라 4. 예전적 예배에서 축제적 예배로 전환하라 5. 산업 사회 구조에서 정보 사회 구조로 전환하라 6. 지배 윤리에서 공존 윤리로 전환하라 2부 목회부가가치, 이렇게 높인다 7. 심방 목회에서 교육 목회로 전환하라 8. 대중 목회에서 소그룹 목회로 전환하라 9. 주일 교회에서 매일 교회로 전환하라 10. 노동의 주일에서 안식의 주일로 전환하라 11. 구멍가게 교회에서 전문점 교회로 전환하라 12. 예배당 중심의 교회에서 주차장 중심의 교회로 전환하라 13. 오는 교회에서 가는 교회로 전환하라 3부 강단과 선포, 이렇게 리폼한다 14. 제목 설교에서 강해 설교로 전환하라 15. 선포 설교에서 이야기 설교로 전환하라 |
16.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전환하라 17. 고전 찬송에서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전환하라 18.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하라 19. 목회자의 권위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으로 전환하라 4부 구원과 윤리, 이렇게 조화시킨다 20. 교회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전환하라 21. 프로그램 목회에서 영성 목회로 전환하라 22. 교회 성장에서 사회 봉사로 전환하라 23. 제자 훈련에서 사도 훈련으로 전환하라 24. 생활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전환하라 25. 나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전환하라 5부 목회자원, 이렇게 캐내쓴다 26. 남성 중심의 교회에서 남녀 평등의 교회로 전환하라 27. 전통 교회건축 양식에서 새로운 교회건축 양식으로 전환하라 28. 만족하는 교회에서 감동하는 교회로 전환하라 29. 한국교회에서 세계교회로 전환하라 30. 분단시대의 교회에서 통일시대의 교회로 전환하라 |
저자 소개 이성희
연대철학과졸업, 장로회신대원졸업 미국Fuller(신학석사, 목회학박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 졸업(신학박사) 현 서울 연동교회 담임목사,
장신대학 교회행정학교수.
1부 교회 구조조정, 이렇게 정착시킨다.
교회 구조조정의 당위성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manda)는 명제 때문이다. 개혁정신을 가진 교회는 그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에 가장 순결하고 또한 적실하게 복음을 살고 전하기 위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둘째는 사회의 격변 때문이다. 변화의 물결, 그것의 유속(流速)과 강도가 그 어떤 시대보다 거세고 예측 불변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물쩡거리다간 우리의 알량한 전통과 함께 복음 그 자체가 외면당하는 비극을 맞을 수도 있다. 구조조정, 서둘러야 한다.
1. 중앙집권적 목회구조에서 지방분권적 목회구조로 전환하라
중앙집권적 목회구조는 미래 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개교회에서도 당회보다 부서나 자치기관 중심으로 목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분권적 지방화 사고구조로 굳어진 교인들을 중앙집권적 사고구조로 다스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총회와 노회 중 노회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미래 교회에서는 당회의 기능보다 각 기관의 기능이 극대화될 것이 분명하다.
총회 기능을 지방회로
세계화와 지방화의 역설적 발전이 교회 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는 교회도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지방분권적 구조로 전화해야 한다. 교단의총회보다 노회나 지방회나 속회가 강화될 것이 필연적이다. 교회정치도 중앙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회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지방회의 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지교회도 지방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것이며, 중앙회의 기능은 상징적이며 정책적인 면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단들이 그간의 총회 기능을 지방회로 이관하였으며, 지교회는 총회라는 한 단계 먼 기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기구인 지방회를 통하여 기능적으로 연결되어갈 것이다.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도 1996년 제81회 총회에 제출된 ‘기구개혁안의 당위성’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기구 개혁안의 당위성
1. 세계화와 지방화의 시대
세계화란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미래적 개념이며 지방화란 언어, 문화, 인종, 종교에 따라서 원심적 분권을 초래하게 될 지구의 미래적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세계화의 영향을 체감하고 있으며 동시에 작년 지방정부의 출범으로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세계는 국민 국가가 가졌던 통제력은 상실하고 지방공동체의 연대로서 역할과 기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지방화라는 국지적 변화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동시에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러한 지구의 변화는 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도 총회라는 중앙집권적 기구보다 노회라는 지방분권적 기구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정서가 점차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지방 정부에 집중되듯이 교회도 총회보다 노회가 동질성이 강한 공동체로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2. 총회와 노회의 역할 구분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노회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사업수행능력 강화를 위하여 총회와 노회의 역할을 구분한다. 총회나 노회의 역할 구분의 대명제는 총회는 정책 결정기관, 노회는 총회가 결정한 정책 집행기관이며, 다음과 같이 총회와 노회의 역할을 구분한다.
(총회) 총회는 정책을 수립하고 교단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 1) 신앙과 신학의 방향수립 2) 교리와 각종 예식의 제.개정 3) 헌법, 규칙 등 각종 예식의 제. 개정 4) 복음선교를 위한 장. 단기 정책 수립 5) 교회교육 정책의 수립 및 각종 교재 출판 6) 신학교육 정책 수립 7) 사회문제 대응에 필요한 정책의 수립 8) 교회 연합사업의 정책 수립 및 조정 9) 해외 동역교회와의 협력 증진 10) 노회간의 협력 증진 및 조정 11) 교단의 홍보정책 수립 |
(노회) 노회는 교회와 교역자 관리 및 총회의 정책결정에 따른 전도, 봉사사업을 관장한다. 1) 총회가 결정한 정책의 집행 2) 파송 선교사의 지원 및 관리 3) 지교회의 지도자 양성 4) 교회개척과 미자립교회의 지원 5) 지역사회 봉사의 특수선교 지원 6) 교회학교 교사의 양성과 훈련 7) 목사후보생의 추천, 지도, 관리 8) 해외 동역교단 산하 노회와 교류 및 협력 9) 교역자의 생활비 지원 및 은퇴목사의 위로 |
당회보다 부서 중심으로
개교회에서도 당회보다 부서나 자치기관 중심으로 목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중앙집권적 목회구조는 미래 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총회와 노회 중에서 노회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미래 교회에서, 의당 당회의 기능보다 각 기관의 기능이 극대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는 당회의 권위에 복종했지만 이후에는 이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당회원은 각 기관과 부서와의 대화를 통하여 교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당회가 지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민주적 대의정치 형태를 반영하여,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힘에 의하여 교회 전체가 좌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당회는 폐쇄성이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회기관인 노회나 총회도 언권회원을 두고 있고 방청을 허용하는 데 비해, 당회는 일반적으로 언권회원도 방청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비밀로 합시다.”, “이 말은 나가지 않도록 합시다.” 하고 지켜지지 않을 비밀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 비밀은 누가 그 제안을 했다는 말과 함께 새나가는 것이 상례이다. 교인의 대표자들이 모인 당회에 교인이 몰라야 하는 비밀이 있을 수 없고, 비밀은 당회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당회가 교인의 알 권리를 막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오히려 당회 운영에 필요하다.
가끔 공개 당회도 열자
더구나 미래 사회는 열린 사회이므로 당회도 열린 당회가 되어야 미래인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교인들에게 당회가 얼마나 정당하게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안건이 처리되는가를 보여주어서, 신뢰하고 결정에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일년에 몇 차례 정도는 공개 당회를 열어야 한다. 당회원들이 가운데 앉고 교회 각 기관과 부서의 대표자들을 초청하여 당회원의 둘레에 앉게 하여 당회의 운영과정을 보게 하고, 가능하면 언권을 주어 그들의 의사를 수렴하면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 그러나 결정은 당회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미래 사회의 모든 회의는 합리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2. 개교회주의에서 교회연합으로 전환하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세계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여럿이고, 우리는 ‘하나이며 하나가 아닌 세계’를 동시에 살 뿐 아니라,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미래적인 시각이다. 이러한 세계적 삶은 현실적 삶뿐만 아니라 미래인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는 다양성(diversity)과 통일성(unity)이 동시에 강조되며 양립하는 세계이다. 미래사회는 이 둘의 조화를 철저하게 요청한다.
일회성의 발달
여러 가지 미래 현상 가운데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로 일회성(dis-posability)의 발달을 손꼽을 수 있다. 미래 사회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일회용으로 만들 것이다. 이미 우리 주위에 일회용품이 갈수록 보편화, 다양화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활용품만 일회성이 되는 게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고유형 자체가 일회성으로 발달한다.
일회성의 발달은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사교유형에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특히 교회관에도 상당히 변화를 몰고 온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교회 건물에 대한 소유개념이 임대 혹은 일회성개념으로 전환될 것이다. 전통적 교회관이 사라지고 미래형 교회관이 발달하면서, ‘내 교회’라는 소아(小我)적 의식 대신 ‘우리 교회’라는 생각이 두드러질 것이다. ‘우리 교회’ 개념이 강해질 때 내 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아무 교회나 편의에 따라 찾게 될 공산이 크다.
미래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이동성 (mobility)의 발달로 개교회주의가 퇴조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대도시 교회들은 지역교회 개념을 이미 상실했다. 교회의 중심 구성원이었던 지역주민이 도시화 현상으로 흩어지고, 흩어진 교인들은 점차 지역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어느 임상실험 보고서에서는 원거리로 이사한 교인이 첫해에는 기쁜 마음으로 본 교회에 출석하고, 둘째 해에는 의무감에서 출석하고, 셋째 해에는 마지못해 출석하게 되고, 이후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지역교회로 옮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동성의 발달로 개교회주의가 퇴조하고 아무 교회에나 편의에 따라 나가는 편의성이 부각될 것이다.
연합, 교회의 생존방식
일회성과 이동성의 발달 그리고 제 4의 물결이라는 변천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전반적 흐름이었던 개교회주의가 크게 퇴조하고, 자연히 교회연합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가 쇠퇴하면 모든 교회가 함께 쇠퇴하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은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생존방식이다.
교회가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추구하고 변화를 당위로 받아들이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해야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변화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응을 위한 변형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영성과 사회성을 동시적으로 보존해야 교회일 수 있다.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을 이룬다면 선교와 교회행정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앞두고 한국교회도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시대적 요청
한국교회의 연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신학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보수와 혁신의 갈등, 교파와 개교회 중심의 교회이기주의, 기득권을 담보로 한 당파성과 폐쇄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우주적 보편성에 근거를 두고 이런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또 ‘일치와 연합’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한 교단 내에도 진보적 성향의 교회나 목회자, 보수적 성향의 교회나 목회자가 공존하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교회연합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에는 교회연합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협의회(KNCC)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가 회원교회가 되고, 한국장로교협의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화가 통합하는 등 새로운 흐름이 감지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시간을 앞둔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는 교회의 연합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급변하는 시대 가운데서 살아남는 생존수단이고,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적 교회에 대한 믿음의 재천명이다.
3. 세대중심에서 간 세대 중심으로 전환하라
95년 11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 인구 가운데 개신교인은 전체 국민의 19.7퍼센트, 천주교는 6.6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 인구 가운데 천주교는 30대 이하가 67.5퍼센트, 개신교는 72펴센트의 비중을 차지해서, 기독교는 젊은 종교인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교는 신자의 절반 이상인 53.2퍼센트가 5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섬기는 연동교회의 경우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교회라서 ‘늙은 교회’ 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30대 이하가 55.7퍼센트를 차지하는 ‘젊은 교회’이다(’97년 4월 현재). 신입교인의 비율을 보면 이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30대 이하가 66.5퍼센트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는 대체로 젊은 교회의 추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이 교회의 주류일 뿐 아니라 70세 이상도 8.1퍼센트로서 적지 않은 노인층이 교회 내에 공존하고 있다.
신세대와 탈구조주의
간 세대 목회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목회적 관심의 대상은 역시 신세대들이다. 흔히 X세대라고 부르는 신세대들은 탈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라는 사조의 공간에 사는 별종들이다.
최근의 10대들은 20대와 차별적으로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을 Y세대라고 칭한다. 20대는 이미 구세대로서 자신들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10대들은 헐렁한 힙합 스타일을 주로 입으며 “편해서 좋다.”고 한다. 반면 20대들은 몸에 착 달라붙는 복장을 선호하고 스스로 “멋있어서 좋다.”고 한다. 최근 신세대들은 X세대라고 불리던 여러 해 전의 신세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Z세대라고 부른다.
신세대들은 탈(脫)구조 속에 살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것들을 거부하고 기성세대에 종속되기를 싫어한다. 요즘은 다르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대학생들이 교수의 차 시중을 들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또, 기성세대의 독단적인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여러해 전 장로회신학대학교(서울 시내 광장동 소재)의 이전 계획이 논의된적이 있었다. 어느 건설회사에서 상당한 땅을 교외에 주고 필요한 교사를 건축해주며 100억원을 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는 조건이었다.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으므로 이사회는 검토 끝이 이전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결정 사항이 학생들에게 알려지자 큰 소요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교사(校舍) 이전을 반대했다. 결국 학교 이전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사회가 학생들의 반대를 무릎을 끓고 교사 이전의 호기를 놓친 것은 젊은 세대들의 의식을 제대로 읽지 못한 까닭이었다. 학생들이 이사회의 일방적인 결정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기성세대의 기득권 행사를 마치 불의처럼 여기는 까닭이다. 그때 나는 어느 이사에게 이런 수순으로 일이 처리되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건설회사의 제안을 그대로 전한다. 그리고 이전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 즉 통학 버스나 기숙사 확보안을 발표한다. 또한 발전기금 100억원 전액을 장학기금으로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공표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통학 거리가 너무 멀다는 문제로 이사회가 이전 결정을 부결했다고 발표한다.” 이렇게 일 처리를 했다면 아마 학생들이 이전하자고 데모를 벌였을 것이다.
천 원짜리 라면에 오천 원짜리 커피
탈문화의 공간에 사는 신세대는 기성세대가 이해하자고 힘든 면모를 가지고 있다. 호출기를 몇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전자상가를 빠짐없이 한 바퀴 돌면서도 유행하는 신발이나 옷을 사기 위해서는 비싸도 두말 않고 산다. 군소리 없이 천 원짜리 라면을 먹어도 커피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오 천 원씩이나 내고 마신다. 기성세대는 영양을 위해 식사는 비싸게 하고 커피는 적당히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은 이래서 다르다.
신세대의 삶의 문화는 기성세대가 가진 삶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자동차공업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97년 6월 말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는 1,000만 대를 돌파했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이 승용차인데, 승용차의 소유주 가운데 30대가 40.4퍼센트로 가장 많고 다음은 40대로 22.6퍼센트, 20대 15.5퍼센트, 50대 13.6퍼센트 순이다. 이와 함께 10대가 소유한 승용차도 전체의 0.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즉 승용차 소유자의 55.9퍼센트가 20,30대인 것은 자동차의 대중화 추세와 함께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한다는 신세대의 풍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드리은 기성세대와 차별성을 가진 그들만의 문화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팬츠 신드롬
일반적으로 신세대를 논할 때 그 특싲을 ‘PANTS 신드롬’이라고 한다. 이 말을 풀이하면 개인주의적 (personal)이며, 흥미본위(amusement)이며,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며 (natural), 성별 구분이 모호하며 (trans border), 극단적인 자기 사랑(self-loving)에 빠진 세대라는 뜻이다. 신세대는 우선 형제가 적기 때문에 자신이 최종 결정자가 되어야 하며, 친구에게는 경쟁자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고민을 털어 놓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결정은 자신의 몫이며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신세대가 지닌 개인주의적인 특성이다.
극단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신세대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인색하지 않지만 남을 위해서라면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대려고 한다.
신세대는 외적 특성으로도 구분할 수 있지만 90년대 이후 신세대는 나이보다도 의식과 태도로 구분한다. 장종철 교수는 신세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첫째, 신세대의 개인주의는 근세 서유럽에서 강조되어온 이성에 근거한 개인주의가 아니다. 신세대는 인간의 합리성보다는 상황의 현재성이 강조되고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감각적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적인 신세대는 자살을 미화하고, 이 때문에 자살율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우리나라의 최고학교라고 하는 과학기술원생도 공부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목을 매어 자살하고 어떤 고등학교 학생은 컴퓨터가 없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고 비관하여 자살한다. 신세대의 자살증후군은 가정에서 과잉보호로 신세대들의 심성이 나약해진 데다 과잉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풍조와 입시만능의 교육 부담이 빚은 결과다. 지난 ’96년 교육부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자살이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다. ’94년에는 96명이었으나 ’95년에는 188명으로 배 이상 늘어났고 ’96년 1학기에만 115명이 자살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살율은 앞으로도 증가될 추세다.
둘째, 신세대는 획일주의나 권위주의, 전체주의를 배격한다. 전통적, 유교적 농경문화는 더 이상 신세대에게 강요할 가치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합리적 가치를 원한다. 그들은 상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며,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부교역자들이 휴가기간이라도 자신의 교구에 초상이 나면 모든 상례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휴가기간에는 초상이 난 것을 알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치관의 충돌
셋째, 신세대는 소비지향적인 생활 습관을 갖고 있다. 급속하게 우리 사회에 상륙하여 뿌리를 내린 외국 외식업인 티지아이 프라이데이스 (TGI Friday's), 코코스(Coco's), 데니스(Denney's), 씨즐러(Sizzler), 베니건스(Bennigan's)등은 음식값이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 음식점들은 저녁마다 만원을 이룬다. 주고객은 젊은 신세대들이다. 신세대에게는 불황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기업은 20대를 겨냥하라고 한다. 20대를 잡아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세대의 소비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적 규범인 근면, 절약, 검약한 시민생활을 강조하였지만, 신세대에게 근검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넷째, 신세대에게 컴퓨는 언어의 확장이요 신체의 일부다. 신세대들은 컴퓨터를 자유롭게 다루고 이를 이용하여 사회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은 컴퓨터를 통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구상하며 새로운 정보를 수집한다. 최근에는 컴퓨터 통신에서 유행하는 언어가 일반 언어보다 더 함축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컴퓨터 세대를 사이버 펑크(cyberpunk)라고 부른다. 인공두뇌를 의미하는 사이버테틱스(cybernetics)와 반항아를 의미하는 펑크(punk)의 합성어인 이 말은 신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다섯째,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볼 때에 반항하는 세대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적 불명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 들이는 그들은 기성세대의 사고를 무시하는 불순종과 부정도 서슴없이 표현한다.
실제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관의 시대를 대비하려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새로운 세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눈에 신세대는 불건전한 가치관과 문화를 가지고 있고 전통적 정서와 너무 거리가 먼 세대로 비쳐져 이러다간 우리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21세기의 우리나라와 교회의 주역이 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교회는 신세대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건전하게 순화(純化)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특히 교회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마련해주고 가치관의 기준을 설정하는 곳이므로 기성세대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신세대가 미래 교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힘을 기를 기회를 얻게 된다.
‘나 홀로’ 노인들
동시에 교회는 노년층 목회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노령화되고 있으며 노년층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환갑잔치를 하는 어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칠순이 환갑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흔히 노인이라고 하면 65세 이상의 연령의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록 인구고령화가 진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00세 이상의 장수자가 1,000명이 넘었으며 장수자의 수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의 장수자는 ’96년 1,151명을 시발로 1,000명 선을 넘었으며, 지역에 따라 65세 이상의 노인이 30퍼센트를 넘는 곳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96년 보건복지부 통계). 이러한 인구의 고령화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노인문제와 사회적 요인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가장과 직장에서의 역할 상실로 인해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감정이 노년기의 대표적 정신질환인 우울증(depression)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자신을 관여시키는 자아 에너지 투입이 약해지고 소극적이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데 적극성과 지구력이 약해지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한다. 노인 특유의 수동적 성향, 즉 경직성과 조심성이 자연히 증가하여 분명한 자신감과 보장이 없는 한 매사에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따라서 노인에게는 과거 회상과 추억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성향은 자신에게 친근한 사물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의 강한 집념을 보이는 편집증적 증세로 나타난다. 노인들이 낡고 유행이 지난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속에 추억이 담겨 있고, 그것이 삶의 실재와 접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고장난 재봉틀을 닦고 소제하며, 날고 유행 지난 한복을 입지도 않으면서 장롱 속에 간직하는 것도 다 이런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노인의 심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기 위해, 세대가 함께 사는 삶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노년기 최대의 적인 소외감과 자신감 상실을 극복케 할 수 있다. 노인문제는 이제 노인들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오늘의 신세대가 내일의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주역인 신세대들에게 관심을 갖듯이 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관심을 두어야 한다. 노인들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문제는 경제활동 참여와 경제적 빈곤 해결이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소외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부터 노인 스스로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교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노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대우하여 인격적으로 친밀감을 주고, 노인들의 활동과 참여의 기회를 넓혀야 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
미래 목회가 세대 중심에서 간 세대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첫째, 미래 사회의 중심은 특정 세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간 한국교회는 기성세대 중심의 성장 지향의 목회를 해왔다. 어린이, 청년, 노인틍은 교회 성장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기에 목회적 관심에서 고만고만한 등거리에 있다.
최근에 와서는 기성세대와 더불어 교회학교 목회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21세기의 주역으로 자라지 않으면 교회가 쇠퇴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교회는 간 세대 중심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세대가 중요한 목회적 자원이고 품어야 할 목회 대상이기 때문이며, 이제는 모든 연령층의 편차가 고르게 분포되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 세대 중심의 목회는 간 세대의 문화와 전통의 단절을 초래한다. 최근 들어 청년을 중시하는 청년 예배 등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목회자는 기성세대로부터 “목사님은 청년밖에 모른다.” 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우려는 기성세대가 청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니고 있고 그 동안 쌓아온 교회의 전통이 단절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표시이다. 문화와 전통의 단절은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것만을 수용한다고 해서 개혁이 일어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과 새로운 조류를 취사선택해서 조화시키는 것은 지혜이며 중요한 작업이다.
셋째, 목회는 보편적이어야 하며 목회자의 관심이 어느 한 세대에 국한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성을 지닌다. 교회는 특정 집단의 교회이어서는 안 되며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이어야 한다. 아주 특수한 여건 아래서 보편성보다 특수성을 가지며 특정 집단을 위한 교회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교회는 교회의 일반적 의미에서는 벗어난 교회이다. 군인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며, 그 외에도 체육인들이 모인 교회, 공장 교회, 대학 교회, 병원 교회, 연예인 교회 등이 그렇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내면적 모습은 보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느 한 세대나 한 집단을 목회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특수성과 개연성을 강조하려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며 이러한 과제를 위하여 간 세대 목회에 지대한 중요성이 부여된다.
4. 예전적 예배에서 축제적 예배로 전환하라
예배 변혁이 시급하다.
예배의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예배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인간의 사고와 문화가 변천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형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미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축제적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모이면 축제적 예배, 흩어지면 소그룹을 통한 성숙”을 표어로 내걸고 성장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예배의 축제성을 중요한 목회적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의 전통적 예배는 경건과 회개는 강조했지만, 기쁨과 성결한 삶을 퇴조시켰다. 오래 전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던 몰트만 (Jurgen Moltmann) 박사는 “한국교회에는 십자가의 신학은 있으나 부활의 신학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한국 교회가 고통과 아픔은 강조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는 100년 전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서구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국교회 예배의 한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친다는 것이다. 왜 언제부터 이러한 예배 형식이 한국교회 예배의 매뉴엘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까지도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축도로 마치지 않으면 잘못된 예배로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예배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치는 순서가 성경에 예시된 예배 형식도 아니고, 더욱이 개혁주의적인 예배 형식도 아니다. 단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형식이 굳어졌고 여기에 우리의 신앙적 경직성까지 겹쳐 이를 절대화하게 됐다.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증인들이 된 제자들은 가정에서 예배하기 시작하였고, 가정뿐 아니라 성전이나 회당에서 예배하시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랐다. 오랫동안 그들에게 친숙하였던 예배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예배는 두 가지 단어로 표기된다. 하나는 ‘하스타하바’(histahabah)로서 존경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꿇어 절하다(bowing down)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아보다’(abodah)로서 섬김(service)의 의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존경과 겸손을 표시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아가서 진정한 예배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를 섬기는 것이다. 섬김의 삶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왜 바꿔야 하는가
구약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구약이 가르치는 예배는 철저하게 구원하시는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인간 최고의 행위이다. 구약의 예배는 형식과 내용이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신약에서 예배는 ‘경배’라는 단어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난다.
신약이 가르치는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예수님께 적용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배의 장소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며, 예배의 시간은 예수님과 함게 하는 때이며, 예배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예배를 통하여 예배 갱신의 내용들을 검토해야 한다. 첫째, 예배 갱신이 성경적이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인가 물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예배의 인간 중심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성경적 예배로 돌아왔다. 사제들의 예배놀이가 아닌 회중 모두의 경배로 전환했던 것이다. 둘째,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충실하고 우리 시대에 적절한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묵도로 시작하여 축도로 마치는 순서가 성경적인지, 이 순서가 예배에 필수적이고 적절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예배 인도자와 참여자가 함께 예배자로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또 듣는 예배에서 보는 예배, 나아가서 온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예배에 공동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행동에 대한 신앙고백이 항상 있었다. 우리의 예배에도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고백이 흘러야 한다. 다섯째, 우리의 예배가 예배시간만의 예배인지 일상생활의 예배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삶과 영적인 예배를 구분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몸으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전같이 시간적인 여유가 있던 때에는 수요일 저녁 기도회가 당연하고 불편이 없었지만, 요즘과 같이 여유가 없는 직장인들에게는 상당한 무리와 불편이 따르고,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죄의식까지도 겹쳐 괴로움을 더한다.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의 생활은 각각 다르다. 교회는 이같은 생활의 차이에 따라 예배 형식과 집회 횟수를 조정해야 한다.
예배관도 발전해야
요즘에는 예배학적인 분류에 따라 예배 순서를 조정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일반적으로 설교 중심의 예배이다.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회 예배의 특징이기도 하고, 종교개혁 전통을 전승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전이나 예배의 다른 요소에서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설교에서만 얻으려 한다. 그래서 설교와 예배를 동일시하고 목사의 역할 가운데도 설교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을 꼽으라면, 은사 경험을 중심으로 한 예배이다. 성령의 체험을 예배의 요소로 강조하며 이런 경험들이 예배의 특징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예배에서는 방언 사용과 병자 치유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예배 순서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하거나, 회중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표현들이 성령의 역사와 동일시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은사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들도 이제 예배 갱신을 신중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배 참여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예배 |
이후 예배 |
경직된 형식에서 설교 중심에서 은사 중심에서 |
유연성 있는 형식으로 전체 예배 내용 중심으로 균형잡힌 예배 갱신으로 |
새벽기도회를 재조명한다.
한국교회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새벽기도회이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야행성문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더구나 신세대들은 조기문화보다 야행성문화를 확실히 더 선호한다. 이런 문화 변천으로 새벽기도회가 점점 힘들게 되고 실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교인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어쨌든 예배에 관한 한국교회의 관행들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그 내용에서 너무 딱딱할 정도로 예전적이다. 기계적이고 예전적인 데 익숙지 않고 오히려 그런 형식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신세대는 당연히 예배를 낯설어 한다. 이런 면에서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갱신되어야 한다. 예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감하고 은혜받도록 형식에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여기서 갱신이란 무조건적인 탈피나 변혁이 아니라 예배회복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세대 출현은 우리 사회의 미래형 증후군이며 교회는 그들의 독창적 문화를 읽어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낭 뚜렷한 특징은 자연스러움 (naturality)을 좋아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성향은 미래 교회에 많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신세대는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하고 캐주얼한 삶을 원하며 캐주얼한 예배를 즐긴다. 그들에게 딱딱하고 기계적인 예배가 강요되어서 안 되는 이유는, 이런 예배 형식을 통해서는 더 이상 기본적인 영성 제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배, 어디가 취약한가
랑게(E. Lange)는 예배 유형의 3단계론을 제시하였는데, 그가 말한 3단계란 말씀 중심 예배의 기본적 구조로서 사면 (absolutio), 언약 청취 (promission), 그리고 세상으로서 파송(missio),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사면부는 예배의 첫부분으로서 하나님께 경배하려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첫부분은 참회와 죄용서의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약 청취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되는 구원의 말씀과 언약의 성취를 확인하는 부분이다. 한국교회에서 항상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부분이며, 설교가 그 중심에 자리한다. 세 번째 부분은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나됨을 확인하고 위로, 약속, 삶의 과제를 인식하고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준비를 다지는 부분이다. 위에서 랑게가 말한 3단계는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이며 예배에서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요소들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배 갱신은 예배의 요소가 아니라 예배 형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상실한 것들을 다시 회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예배 갱신의 초점은 오늘날 당면한 예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갱신과 회복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적의식과 감격의 상실이다. 무감각한 예배는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모스를 비롯한 구약 선지자들이 백성을 책망한 것도 예배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었다. 예배는 인도자나 참석자들이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준비와 관심이 부족할 때 무감각함이 잉태된다. 이런 문제는 철저한 예배 준비로만 극복할 수 있다
예배 참여자들에게 다각도로 예배의 감격을 느끼게 하며 감동이 깃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노력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예배에서 축제성을 회복하고 감격을 되살리는 노력이 예배 갱신 정신의 요체라고 하겠다.
신세대를 사로잡는 예배
요즘 미국교회에는 마케팅이론이 발달하고, 전통 예배 형식을 파괴한 예배가 확산되고 있다. 예배 형식도 예전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축제적 성격의 예배로 탈바꿈하는 추세에 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미래 교인들이 대화와 찬양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세 교회가 있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존 윔버(John Wimber)의 빈야드 교회, 빌 하이벨스 (Bill Hybels)의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릭 워렌(Rick Warren)의 새들백교회일 것이다.
위의 세 교회는 청중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과감한 예배갱신을 통하여 미국의 신세대들을 사로잡은 대표적 교회들이다.
위의 교회들은 흔히 구도자 예배 (Seekers' Service)라 불리는 새로운 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구도자 예배는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의 형태이다. 믿지 않는 젊은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 열린 예배는 그들을 위해서 ‘불편한 의자,’ ‘어색한 용어와 주제,’ ‘형식적인 복장과 순서’등을 과감히 바꿨다.
구도자란 영적 갈급함을 지닌 사람들로서 이들이 목회의 주요 대상이 된다. 구도자 예배는 결국 그들을 위한 예배를 지향한다. 구도자 예배에서는 예배의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음악이나 비디오등 미디어를 많이 사용한다. 환희와 기쁨, 축제의 요소가 많으며 예배 진행이 음악과 더불어 빠르게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늘 변화를 추구하며 따뜻한 분위를 제공하는 구도자 예배에 대해 심도있게 배우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현대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 (Harvey Cox)는 교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에는 구원의 감격, 감사와 축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함을 언급한 그는 나아가서,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死神神學)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래 교회의 예배는 예전적인 데서 축제적인데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 영감과 의미를 주게 될 것이다. 현재의 엄숙한 예배에서 재미있는 예배로 탈바꿈해서 살아있는 예배, 열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열리게 하는 요소들
반면 예배의 원래적 모형을 상실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예배 갱신이다. 갱신이란 본질의 회복을 포함하기 때문에 예배가 가져야 할 본질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축제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본질을 상실한 축제만 벌여서는 안 된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의 표현이어야 하고, 예배의 전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또 말씀은 성례전을 조명해주는 빛이다. 말씀의 빛이 없으면 성례전은 하나의 환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예배 갱신은 단순히 예배 스타일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예배 때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게 하고, 회개와 영성을 재충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흔히 예배 갱신이라면 각광을 받고 있는 몇몇 외국 교회의 예배 형태를 모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말씀과 의식, 성례의 말씀, 말씀과 찬양이 조화된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 갱신의 초점이어야 한다. 예배의 설교, 기도, 성찬, 찬송, 친교 등의 요소 요소가 회복되어 모든 예배의 요소가 참여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축제적 기쁨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배 갱신의 요점이다.
5. 산업사회 구조에서 정보사회 구조로 전환하라
두 가지 사회 패턴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의 저자 네그로폰테 (N. Negroponte)는 이전의 시대는 아톰의 시대였지만 정보시대는 비트의 시대라고 했다.
비트란 색깔도 무게도 없이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정보의 DNA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원자적 요소를 말한다. 아톰 시대에는 도서관의 책을 한 사람이 빌려가면 없어지지만 비트 시대의 도서관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정보를 빌려가도 없어지지 않는다. 책은 부피가 있고, 운송과 보관이 필요하다. 더구나 교과서의 경우 전체 가격의 45퍼센트의 비용이 운송 및 보관, 반품에 들지만 디지털 책은 그럴 필요가 없다. 또 책은 절판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책은 절판되지 않고 항상 남아 있다. 디지털화는 책에서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미디어에 신속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업사회 패턴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정보사회에 살면서도 산업사회의 사고구조를 버리기를 주저한다.
생산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이어령 교수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전환을 개미 시대에서 거미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0세기를 종점으로 사라질 산업사회는 개미의 시대로서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였다. 종전 이후의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다가올 정보사회는 거미 시대다. 거미는 허공에 집을 짓고 사는 유일한 생물로서 허공에서 먹이를 잡아먹고 산다. WWW(Word Wide Web)는 비유적으로 전 세계에 뻗어 있는 거미줄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 거미줄을 쳐놓고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걸리게 되어 있다는 뜻에서 정보사회를 거미의 시대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 그리고 천연자원이었지만, 미래의 신산업은 기술이 원동력이다. 앞에서 말한 거미줄은 결국 정보가 오가는 곳이다. 이때 정보란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기술이다. 비트 시대의 산업은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 분야에서 눈부시게 발달하며, 정보산업이 모든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로 발달한다.
그러므로 교회도 산업사회의 사고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정보사회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미래 교회는 정보사회의 사고에 걸맞게 목회 정보나 새로운 방법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보 공유를 통하여 결국 내 자신이 활기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살 수 있다. 미래 교회는 다른 교회와 공생하지 못하면 공멸한다.
정보화, 그 속뜻은 이렇다
교회는 물질적 형식과 그 자체의 목회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른 인간의 사고와 정신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정신세계에 응답할 수 있는 목회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정보화를 대변하는 용어로 멀티미디어라는 말이 회자(膾炙)된다.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기술이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고도의 기술 (hightech)을 가진 세력이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그래서 토플러(Alvin Toffler)는 기술이 제3의 물결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벨(Daniel Bell)은 기술의 무제한적 지배가 풍요의 기초라고 했다. 기술은 분명히 미래 사회를 지탱할 힘일 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의 원동력이며 세계를 지배하게 될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술 개발이 멀티미이더 사회의 생존방식이며 인간도 결국 기술적 인간, 도구를 만드는 인간 (homo faber)으로 변하고 나아가서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대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정보시대에 정보는 자산이고 힘이며 중요한 가치이다. 정보를 많이 가진 자가 이기는 시대이다. 정보의 중요성은 국가적으로 정보체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여 정보공급을 서두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보 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 건설을 위하여 44조 8천억 원을 투입하고 있으며, 2015년에 완공되면 모든 국민들이 초정보의 혜택을 받게 된다. 이미 세계 선진국들은 그보다 앞선 2,000년대 초반에는 완공하게 된다고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싱가폴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완공할 예정이다.
지난 ’97년 10월 25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미국의 세계적인 정보 통신 관련 시장조사 업체인 IDC사가 세계 5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정보화지수는 세계 22위로 나타났다. 정보화지수는 21세기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각국의 위상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이다.
정보화 순위 |
국 명 |
정보화 순위 |
국 명 |
1위 2위 3위 4위 5위 11위 |
미 국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일 본 |
… 15위 13위 14위 21위 22위 |
… 독 일 상가포르 홍 콩 대 만 한 국 |
세계 55개국의 정보화지수 (미국 IDC사 조사)
정보화와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
멀티미디어 시대의 공동체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공동체는 아니다. 긴장관계에서 만나는 이익사회이며, 사랑과 책임이 어우러진 게마인샤프트를 기대하기 힘든 곳이다. 유기체(organism)가 아닌 하나의 조직(organization)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 그 한 실례가 PC통신의 ‘채팅’이다. PC통신에서 운영하는 만남의 방은 인격적인 만남이나 스킨십이 없는 말의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은 결국 책임없는 말의 잔치에 불과하며 반사이익에 민감한 인격없는 인간이 되게 한다.
정보사회의 신산업을 주도할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컴퓨터와 로봇으로 이 두 요소가 새로운 비트 시대를 이끌어간다. 컴퓨터는 소위 미디어 혁명을 일이킨 주역이다. 이제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컴퓨터 없이는 하지 못하는 일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컴퓨터가 저장하고 기억하여 처리하는 데이터나 정보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현대를 지식사회라고 하는데, 이 많은 양의 지식과 정보를 인간의 두뇌로는 저장이나 기억이 불가능하겠지만 컴퓨터로는 가능하다. 우리가 체감하는 정보사회로의 변화는 국가의 기간산업에서부터 작게는 가정생활에까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오래 전에는 원고를 청탁할 때 ‘200자 원고지 50매’라고 원고분량을 명시했지만, 얼마 후에는 ‘A용지 8매를 팩스로’ 보내라고 했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 디스켓’을 보내라고 했지만 이제는 ‘E-mail로’ 보내라고 한다. 정보사회로의 도약은 교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시대에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 패턴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사회의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 패턴은 그 자체가 정보사회의 정서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현대인, 그리고 미래인에게는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한다.
정보화, 작용과 반작용
정보화가 교회에 주는 또 다른 영향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확산과 은사 중심 교회의 성장이다. 정보와 기술의 극단적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신의 세계를 제공해주며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애착보다는 감성과 초과학적인 데 가치를 두는 신비주의가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많은 기독교의 종파들이 동양적인 신비주의 혹은 열광적인 신비주의 경향을 따르게 될 것이며 자연히 은사 중심으 교회 (Charismatic church)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통계적으로도 지난 ’81년에 9천만 명이던 은사 중심의 그리스도인(charismatic Christian)이 ’94년에는 4억 명으로 증가하였고 지금도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이 통계는 은사 중심의 그리스도인이 전 기독교인의 24퍼센트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97년 10월 미국의 잡지 「미니스트리 투데이」(Ministry Today)지에 따르면 ’96년 현재 전체 기독교 인구 19억 5천만 명 중 24.5 퍼센트인 4억 7천9백만 명이 오순절파 교인들이며, 이 수치는 2000년이 되면 전체의 26퍼센트인 5억5천4백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2025년에 이르면 약 30억 명의 전체 기독교 인구 가운데 37퍼센트인 11억 4천만명으로 증가하여 오순절 교단이 세계기독교계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1900년에 전체 기독교인의 0.66퍼센트에 불과했던 오순절 교단의 교세와 비교해볼 때에 괄목할 만한 증가세이다. 사회의 정보화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만,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교회의 보수화, 은사 중심적 신앙 회귀 현상 역시 반작용으로 왕성하게 나타나게 됨을 잊지 말하야 한다.
정보바다의 격랑, 교회는 어디로?
무자비하게 다가오는 정보의 물결 속에서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 물결을 수용하여 사회에 이바지할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정보사회에서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체계화해야 하는데, 우선 정보사회에서 윤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이의 말대로 기독교는 마르크스 이래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생명문제, 섹스문제, 가정문제 등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가치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이나 CD롬 등을 통하여 음란물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안방과 아이들의 공부방을 잠식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보를 다루는 일에 전력을 다하여 정보 정의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성경적 환경 조성으로 이런 윤리적 도전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기관보다도 건전하고 도덕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대해야 한다. 인터넷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인터넷 자료도 얼마든지 다른 홈페이지에서 연결하여 (link)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정보사회는 공유사회라는 또 다른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정보야말로 미래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기에, 정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이 결국 미래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산업사회가 제품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정보사회는 서비스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미래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전환됨에 따라 교회도 그 구조적 특징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제품의 제조에서 점검까지 한 공장에서 처리하는 새로운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인터넷이나 국내 정보통신망, CD롬을 통한 정보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재 전 세계 인구 중 약 1억 명이 인터넷에 가입하고 있지만, 금세기가 가기 전에 10억의 인구가 인터넷의 ID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앞으로는 인터넷ID가 없으면 소외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이 하나의 생활도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시대를 전망할 때 교회는 인터넷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고 정보를 순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6 지배윤리에서 공존윤리로 전환하라
지배의 이면
우선 미래교회는 환경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여 지배가 아닌 ‘환경과 인간의 공존윤리’를 정립해야 한다. 교회가 환경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 즉 하나님의 명령 차원에서 살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주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창1:31)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마6:10)라는 주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처음 하나님이 만드셨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그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환경보존을 가르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며 환경보존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지배윤리에서 공존윤리로의 전환은 목회, 특히 선교정책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국내 개척교회 정책이나 해외선교정책에 지나치게 지배논리를 가지고 대응했음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 대도시에 편중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시 교회들은 인력 (manpower)이나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소도시나 시골의 교회는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의 성장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시 교회의 성장은 지방 교회를 희생시킨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도시 인구는 지속적인 성장을 보인 반면 지방 인구는 상대적 감소를 보였다.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에서 이주하는 교인들로 성장하였지만 지방 교회는 쇠퇴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 와서는 도시 인구와 지방 인구의 비율이 60년대 초반에 비하여 완전히 반대가 되었고, 도시 교회 교인의 수와 지방 교회 교인의 수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교회의 지배논리
도시 교회의 성장이 지방 교회의 쇠퇴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에 대해 상당히 지배적인 성향를 갖고 있다. 흔히 개척교회를 세우며 미자립 교회를 지원할 때에 도시 교회는 지배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지원 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일방적이며 지배적이다. 도시 교회가 경제력이 있어 지방 교회를 지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시화 현상에 따라 도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 지방 교회의 간접적 도움 때문이었고, 한국 경제력의 신장,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도시 교회가 지방 교회를 지원할 때 고압적이라는 인상을 씻기 어렵다.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를 지원할 때에 완전히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보고 요청이 지나치게 많다. 이것 때문에 지방 교회 목회자는 목회보다는 지원 교회에 대한 보고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지원 받는 교회가 지원하는 교회에 대해 행정 보고를 철저히 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지원을 중단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런 폐단을 없애려고 지원 정책을 바꾸었다. 지방의 한 교회가 도시의 여러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겪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하여 다른 교회로부터 지원받지 않아도 될 수준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현재 상황이나 전망을 볼 때 지방 교회가 3년 혹은 5년 후에 자립하리라는 기대는 극히 힘들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송금하기 때문에 영수증을 보낼 것도 없고 선교 보고에도 신경 쓰지 말고 목회에 열중하라고 했다. 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도 계속 지원해달라는 청원서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또한 지원 교회라는 말 대신 ‘협력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지원하고 지원받는다는 일방적이며 지배적인 개념보다는 양자가 함께 협력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협력의 한 방안으로 지방 교회는 좋은 먹거리와 향토 특산품을 보내고 도시 교회는 교인들에게 이를 연결시켜주는 농촌. 도시 교회 협력 장터 개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원하는 도시 교회는 지원 받는 지방 교회가 동반적인 관계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밖에서 배워 안을 살찌운다
한국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세계교회로부터 선교를 배워야 한다. 선교는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에는 정책이 있어야 하고 축적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규모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세계교회로부터 선교를 배우고 물량적, 지배적인 선교가 아닌 공존적이며 협동적인 선교로 자세를 전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배적인 자세에서부터 공존적인 자세로 하루 속히 선교관을 전환해야 세계교회로서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
2부 목회부가가치, 이렇게 높인다.
미래 경제는 ‘저비용 고효율’을 지향하게 될 것이고 미래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경제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의 파장을 볼 때 목회에서도 거품을 빼는 일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심방으로 대표되는 한국목회의 전래적 패러다임은 미래사회의 이동성, 편의성, 임시성 등을 따져볼 때 결코 효율적인 목회 방법만은 아니며, 오히려 근거없는 자부심과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아울러 덩치만 컸지 자기정체성과 사역자원의 가용성(可用性)이라는 면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메가교회도 빨리 기민한 사역단위인 소그룹으로 돌아서야 한다.
7. 심방목회에서 교육목회로 전환하라
가지 말고 오게 하라
’97년 4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에서 발표한 ‘한국장로교인들에 대한 의식 조사’에 따르면 목사 역할의 우선순위는 설교(67.2퍼센트), 기도(12.1퍼센트), 성경연구(8.07퍼센트), 심방.상담(4.04퍼센트)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장로의 역할에 대하여는 치리(29.15퍼센트), 심방.상담(19.28퍼센트), 전도(8.52퍼센트), 재정.모금(8.3퍼센트)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직도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재래적 목회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기대 변화와 사회의 질적 변동은 목회 패러다임에 가장 큰 변화 요인이 될 것이고, 목회 패러다임 변혁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미래 사회의 한 특징은 이동성(mobility)의 발달이다. 명절의 대이동을 비롯한 주말 이동은 이동성을 가중시키고 이동성이 생활애 한 패턴으로 자리잡게 했다. 도시화현상과 사회변동으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심방목회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심방목회의 한계
심방은 상당히 소모적인 활동이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볼 때 심방목회는 투자한 시간에 비하여 성과가 그다지 높지도 않고 명시적이지도 못하며, 상대적으로 목회자가 탈진하는 비생산적 요인을 지닌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날로 도시 교통 사정이 악화되기 때문에 심방에 치중하기가 갈수록 힘이 든다. 만일에 심방 중심의 목회를 한다고 가정하면, 일주일 중 월요일은 쉬고 토요일은 설교준비를 한다고 할 경우 심방할 수 있는 날은 나흘간이 된다. 나흘에 다섯 가정씩을 심방하면 스무 가정을 심방할 수 있는 셈이 된다. 일주일에 스무 가정을 심방하기 위하여 목회자의 거의 모든 시간을 소모해야 하며 이 외에도 새벽기도회의 인도나 수요기도회를 인도해야 한다면, 독서나 목회자 개인의 영성을 위한 시간은 전혀 얻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적 재충전이나 목회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목회의 패러다임은 변혁되어야 한다. 최근에 와서는 예전과 달리 심방을 원치 않는 추세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증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심방의 대안으로서 목회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시간의 전략적 사용
또 다른 의미에서 심방은 자위(自慰)적 목회이다. 목회자는 심방을 하면서 자위한다. 교인들을 위하여 종일 섬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목회자가 교인을 위하여 종일 뛰어다녔어요 그게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백성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시간을 소모한다. 그러나 이 일로 모세의 지도력은 약화되었고, 우선순위(priority)를 잃어버리는 결과만 초래했다.
지도자의 우선순위가 뒤집히면 지도자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위기가 온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종일의 시간을 소모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권위를 확립할 때에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얻었다. 하루 종일 짬없이 백성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한 탓으로 탈진한 모세를 방문한 그의 장인 이드로는 “내가 보니 네가 하는 일이 선하지 못하다.”고 했다. 아무리 백성을 위하여 종일의 시간을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목회자의 진정한 영적 지도력이 세워지지 못한다면 선하지 못하고 현명치도 못한 일이다.
교육목회가 심방목회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교육목회를 통하여 비로소 구비된 그리스도인, 온전한 양으로 양육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목회는 가장 힘든 목회 스타일이지만 목회자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목회이다. 교육목회는 교인 양육의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을 두는 목회이므로 가장 진솔한 목회이며, 유동적이며 미래 교인들에게 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목회이다. 그리고 교육목회는 미래 사회의 변동과 목회자의 목회관을 가장 쉽게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므로 목회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심방 중심의 목회는 교육 중심의 목회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렇게 전환할 수 있도록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나갈 의지가 필요하다.
8. 대중 목회에서 소그룹 목회로 전환하라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산업사회는 소비자가 생산자를 위해 존재하던 시대였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가 하나가 되는 프로수머(prosumer)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교인들은 예배의 단순 참여자가 아니라 예배 순서의 동참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목회에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목회로의 전환을 요청한다.
왜 소그룹인가
근래에 와서 기독교교육학을 중심으로 소그룹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교육적 효율성을 위하여 소그룹을 도입하는 목회 방식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제자훈련을 목회에 도입한 교회들은 소그룹 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대형교회 중심의 한국교회는 교인 관리나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이미 소그룹을 도입하여 구역(속회)활동이 발달하였고, 중.대형 교회들 가운데도 소그룹을 통한 상담과 교육이 효과를 보고 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최근에 와서 소그룹을 통한 상담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목회적 효과와 보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대중 목회와 소그룹 목회를 겸하셨지만 기본 목회는 소그룹이었음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세의 능력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웠다. (출18:13-27) 예수님도 사람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친히 제자를 세우심으로 보여주셨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모델은 소그룹 목회의 근거가 되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한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사람을 첫째 그룹으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를 둘째 그룹으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를 셋째 그룹으로 나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베드로, 빌립, 야고보는 각 소그룹의 리더로 세우시고 나머지를 그룹 멥버로 만드신 것이다.
그룹핑 (Grouping)
열두 제자를 세 그룹으로 나눈 것은 예수님의 ‘소그룹 만들기’였다. 예수님께서 소그룹을 만드신 이유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기 위한 의도였다.
첫째 그룹의 제자들은 상당히 재능이 많은 자들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첫째 그룹은 재능도 많을 뿐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었고, 둘째 그룹은 재능이 많지만 적지도 않은 보통 인물들이었고, 셋째 그룹은 재능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측근에 두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는 특정한 재능을 가진 자만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만일에 베드로와 같은 재능 있는 인물만 제자로 삼으셨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더 효과적이었을까?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은 덜 효과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부류의 사람을 다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그룹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제자 훈련의 방법이었고 초대교회 구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재능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 세 그룹에 차별 없이 자격과 은사를 공통적으로 주신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달란트 비유도 소그룹의 모델이다
제자 모형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소그룹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
1) 소그룹은 가장 좋은 제자훈련 구조이다.
2)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달란트에 따라서 네 사람씩 세 그룹으로 나누셨다.
3) 예수님께서 세 그룹으로 나누신 것은 재능에 따른 분류이다.
4) 제자 모형은 재능에 관계없이 제자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5) 제자 소그룹은 재능에 따른 분류일 뿐만 아니라 효율적 훈련 방법이다.
6)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의 재능은 다르지만 주신 권능에는 차등이 없다.
7) 실제로 이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사도)들이 순교자가 되었다.
8)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다른 점은 재능을 극대화한 것과 극소화한 것의 차이이다.
9) 예수님의 제자 삼으심은 소그룹 만들기와 일치한다.
10) 예수님이 만드신 소그룹은 제자훈련이나 인사관리의 효율적 방법이다.
11) 소그룹은 효율적 제자훈련의 방법이지 소외나 차별의 의미가 아니다.
소그룹을 받쳐주는 사회적 변화들
미래교회가 대중 목회에서 소그룹 목회로 전환해야 하는 당위성은 소그룹 그 자체가 전문성을 제공하며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전인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 사회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노래방 문화는 정보사회의 또 다른 가치 이동을 설명한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변천은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개인 모두가 연기자(performer)가 되는 방식이다. 소비자 중심 시대, 청중 중심 시대에는 개인이 직접 해보기 원하는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욕구 충족은 소그룹을 통하여 가능하다.
스몰 이즈 뷰티풀
세계는 산업사회 구조에서 정보사회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규모가 큰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라 작고 전문성을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언표(言表)는 실로 정보사회에 적합한 구호인 바, 실제로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오고 있다. 거대한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세계에서 가장 개인 소득이 높은 나라는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순으로 결코 큰 나라가 아니다. 이들 나라의 주요 생산품은 꽃, 시계 등 아주 작은 것들이다. 정보사회는 모든 사회 구조가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작은 것의 가치를 재고해야 한다. 교회도 작은 알찬 교회가 많아져야 하고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작은 그룹들이 많아져야 한다.
미래교회는 소그룹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소그룹의 교회 혹은 소그룹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비록 대형교회라 하더라도 소그룹 교회는 공룡처럼 비대하거나 둔하지 않기 때문에 세포가 제대로 활동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이 말단 신경조직까지 스며들 수 있다.
결국 소그룹 교회는 사이즈가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아니라 훈련을 통한 소그룹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미래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회의 경쟁력과 세계화를 가능하게 할 중요한 요인이다. 소그룹 중심의 교회라고 할 때의 소그룹은 교회의 액세서리 프로그램이나 목회 수단이 아닌, 교회의 본질로서 이해해야 하며 교회의 소그룹화를 의미한다.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대표적 소그룹 교회인데 2,000개의 소그룹을 가지고 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훈련 책임을 담당한 도나휴 (Bill Donahue) 목사는 “소그룹 모델을 교회에 도입하는 이유는 교회의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소그룹은 많은 교인을 가진 대형교회에서 목양과 돌봄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모델이다. 성도를 제자화하고 새 교우들을 교회에 글어들여 연결시켜준다.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사역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주며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예수 안에서 서로 격려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윌로우 크릭 교회 소그룹의 다섯 가지 유형
① 제자양성 그룹 : 잘 짜여진 제자훈련과정을 찾는 신자들로 구성되며, 영성훈련, 성경 외우기,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기 강조.
② 공동체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공동체 형성, 새 그룹원 초청을 강조.
③ 봉사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사역의 완수, 새 그룹원의 초청을 강조.
④ 구도자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전도, 새신자 훈련을 강조.
⑤ 후원 그룹 : 그룹원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을 강조.
소그룹, 교회의 본질
이 소그룹은 단순히 성경공부 모임을 넘어서는 친밀한 가족관계를 이루고, 일상의 삶 속에서 말씀을 철저히 적용하는 데 존립 목적을 둔다. 또 삶 속에서 경험한 자신의 간증을 함께 나누고 좀더 효과적으로 서로를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권면하는 한편, 복음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봉사를 적극 권장한다.
소그룹의 특징
첫째, 성도의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현대교회, 특히 대형교회에서 소그룹은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해준다.
둘째, 실천신학자 힐트너(Seward Hiltner)는 목회의 세 가지 기둥을 전달 (communicating), 목양 (shepherding), 조직 (organizing)이라고 했는데, 전달의 하나인 설교는 질문이나 토의 등이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을 통한 훈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셋째, 일반 목회에서는 목회적 관심에서 소외되는 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소그룹 목회는 개인에게 목회적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양질의 목회를 제공할 수 있다.
넷째, 소그룹은 상호 격려와 후원을 통하여 교인 상호 간의 신앙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섯째, 소그룹은 목회자 자신이 개인의 신앙성장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소그룹 훈련뿐만 아니라 설교나 심방 등 목회 전반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섯째, 소그룹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전도할 수 있게 하고, 피전도자도 소그룹을 통하여 빠른 시간에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일곱째, 임상적으로 볼 때에 소그룹에 참석한 교인들이 소그룹에 참석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다.
여덟째, 소그룹은 모든 교인들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할 수 있다.
일반 목회 |
소그룹 목회 |
교제 결여 질문, 토의 불가 소외되는 교인 발생 협력 부족 적응에 오랜 시간 소요 목회 지침 전달에 장애 |
친밀한 교제 가능 질문이 가능해서 말씀 실현 도움 개개인에 관심 가능 상호 격려와 후원으로 교인간 신앙 성장에 도움 정착 및 성장이 훨씬 빠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 가능 |
이렇게 소그룹의 특징과 장점들을 이해하고 소그룹으로 목회의 방법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그룹 활동은 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이미 임상적으로 소그룹의 중요성이 확인되었으며, 목회자에게는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발전시키는 자세가 요청된다. 예디 깁스(Eddie Gibbs)는 소그룹의 존재 그 자체가 교회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교회는 미래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소그룹을 통한 교인의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지속적 성장을 꾀할 수 있다.
9. 주일교회에서 매일교회로 전환하라
목회 중독증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민족이다.
한국인들이 일을 많이 하는 이유는 첫째, 전통적으로 채식을 주로 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육식 동물들은 한번 먹이를 잡아 먹으면 사흘씩 먹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초식동물들은 쉴새 없이 우물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채식동물과 같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런 연유도 무시할 수는 없는 듯, 채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열심히 일하고 많은 일을 한다.
둘째, 우리의 농사는 주로 벼농사이다. 벼농사는 기후에 상당히 민감하고 기후에 쫓겨 쉴 새가 없다.
셋째, 우리나라는 기독교나 회교와 같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안식의 종교관행을 갖지 못했다. 쉬는 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일만 하는 노동 중독증(workaholic)이 많은 편이다. 노동 중독증은 목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목회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목회자이다.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는 교인들의 의존성이다. 한국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도 목회자에 대하여 상당히 의존적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샤만(무당)이 있어야 신과 사람이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중간매개자가 없으면 종교행위 자체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샤머니즘에서는 샤만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심하다. 이러한 의존성이 목회자를 분주하게 만들고 노동 중독에 걸리게 한다. 외국 목회자들은 한국 목회자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목회하는 목회자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노동관의 격변과 교회
노동관과 노동시간의 변화는 주일 예배에도 상당히 변화를 가져왔는데, 미래 사회에는 변화 폭이 더욱 커지게 될 전망이다. 노동시간 변화로 인한 주일 예배 참석 행태 변화는 이미 구미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 문제이며, 한국교회로서도 강 건너 불 구경은 아니다. 이미 주말이면 야외로 여가를 즐기러 가는 행렬이 행락철 구분없이 연중 이어진다. 사람들은 연휴나 징검다리 연휴를 어떻게 하면 잘 즐길까 고심한다. 교회는 이러한 여가 이용 추세를 어떻게 극복하며 활용할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
대체로 국민 개인소득이 5천 달러를 넘어서면 종교적 관심이 둔화되기 시작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이어서 사회적,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종교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종교적 박탈감이 강할수록 종교를 찾고 종교성이 강해진다. 요즘은 그 반대로 경제 성장 탓에 박탈감이 줄어들어서 종교회귀 의지를 약화시킨다. 종교 의존성이 약화되면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주일성수를 소홀히 하게 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안정감이 종교 의존감을 둔화시킨다. 한편 내적인 요소로서 교회의 영적 능력 쇠퇴와 신뢰감 저하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주일성수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었다.
도그마(Dogma)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방법(Method)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세기를 앞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변화는 도그마가 아니라 방법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지만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시대에 적응할 수 있고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회 여건이 날로 다양하게 늘어나면서 교회에 새로운 주일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주일에 대한 도그마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주일 준수 방법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주일성수, 새시대의 새요구
우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전제를 확인해야 한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여건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 철저한 신앙훈련을 통해서만이 미래 사회의 변동에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거룩과 경건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거룩은 ‘구별되다’라는 의미로 구별된 삶의 형태를 말하는데, 주일성수와 연결시켜 보자면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사는 태도를 뜻한다.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날과 같은 자세로 살아서는 안 된다.
현대인은 조금의 여유도 없이 각박하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이런 형태에 성도의 교제 운운하는 것이 배부르게 느껴질 지경이다. 주일에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 거룩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 다음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거나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 아니면 자녀들과 야구장에 가는 것은 괜찮고 성도들과 함께 등산을 하고 야유회를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모임을 갖는 것이 훨씬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 개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경건을 모양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모양만 있는 경건은 오히려 바울에 의하여 배격되었다(딤후 3:5).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어야 한다. 경건의 능력은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야고보는 그 내용을 고아와 과부를 환난중에 돌아보는 일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다 (약1:27).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고 역동적인 삶이다. 경건에 대해 바른 이해를 지니면 주일성수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진보 지식인 바울에게 배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시선을 모으고 있는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인 윌로우 크릭 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는 토요일에도 주일 예배를 드려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못할 교인들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오래 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는 목요일 예배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근무해야 하는 지역의 특수 직종 종사자들을 위한 조처였다. 당시 서울 중구의 이용사, 미용사들은 목요일이 휴무일이고 주일은 근무일이었다. 주일에 근무해야 하는 직업인들을 위하여 목요일에 주일과 같은 예배를 개설하여 예배 드리도록 도왔다.
예배자를 위한 다양한 선택권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일 미사 외에도 매일 미사를 통하여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교인들과 참석하였지만 매일 미사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교인들을 위하여 다양한 미사 참석 선택권을 제공한다. 또한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주일에 다부(多部)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여러 번의 낮예배분만 아니라 낮예배를 마치고 얼마 후에 다시 저녁 예배를 드린다. 목회자가 다부 예배 때문에 극도로 지치고 주일은 종일 예배만 드리는 날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지만, 다부 예배가 단지 예배 참석자에 비하여 예배당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의도의 배경에는 교인들에게 예배 참석의 다양한 선택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가 깔려 있다.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예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은 교인에 대한 배려이다.
어쨌든 예배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유연성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예배드리는 날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여행인원의 증가와 주말의 대이동등 사회현상을 고려할 때 주일예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서 매일예배로 전환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주일예배에서 매일예배로의 전환은 주일예배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예배를 강조하되 매일예배를 개설하여 예배 참석의 기회를 확대하자는 취지이다.
흩어지는 교회
이와 더불어 미래 교회가 강조해야 할 일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이다.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상대적 기능 약화이다.
알멘(J.J.von Allmen)은 “평일에 흩어지는 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의 지적처럼 참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이다.
이전에는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을 주지시켰지만, 이제는 교인들이 원하는 편리한 시간을 만들어 제공하는, 그야말로 판매에서 마케팅으로의 사고 전환이 요청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때 주일예배를 넘어서 매일의 예배, 그리고 예배시간 선택권을 제공하는 고객관리 개념의 교인관리가 부수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주일에만 북적거리는 주일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활기가 넘치는 매일교회로 전환해야 한다. 거액을 들여 정성스럽게 지은 예배당이 잘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 많은 시설들이 주일 하루에만 사용되고 있으며 주일에도 오전에만 북적대고 오후에는 한가한 것이 현실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 적은 효율을 얻고 있으니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교회는 시설들이 주간에도 사용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개박하고 사회와 다른 기관에도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10. 노동의 주일에서 안식의 주일로 전환하라
주일, 어떻게 제정됐나
신약의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이 날은 주의 날이라 하였고 부활 이후 안식일에 모이던 공동집회가 주일에 모이게 되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켰던 안식일인 제7일이 기독교의 주일인 제1일로 변경된 연유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주일은 분명히 안식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계승한 주의 날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주일은 안식의 개념을 보존해야 한다. 유대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초기 기독교의 역사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 성경 전수, 회당예배의 본을 통한 교회예배의 틀 형성, 일주일에 하루를 예배와 안식의 날로 정한 것 등이 유대주의의 영향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주의의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안식일 관행이 기독교의 ‘주의 날’ 관행으로 변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식일의 유대교적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대인들은 천지 창조를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안식도 유대인을 위한 안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안식일은 모든 일을 놓는 날이었다. 초기 기독교가 그 틀을 형성하면서 유대교의 안식 개념이 그대로 기독교의 주일에 전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 날이 주일이 된 또 다른 이유는 이교의 영향이다. 초기 기독교가 커가고 있던 로마제국에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동양의 신비종교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발전한 미드라교(Mistrials)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로마인을 매혹시킨 이방 종교였다. 미드라교는 태양신 미드라를 숭배하는 종교였다. 미드라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은 태양의 날인 일요일(Sunday)이었다. 이런 풍습이 이어져 주의 날을 일요일에 지키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교적인 전통을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것이 새로운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주일의 안식 개념이 초기 교회에 일반화되었다. 그후 4세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이 점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나타나는 바, 제7일이 아닌 제1일에 예배를 위하여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 날에 안식과 예배가 시행되었음을 기록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2)고 했다. 바울이 드로아 방문 때도 안식 후 첫날 저녁 떡을 떼기 위하여 성도들이 모여 있었고 제1일에 떡을 떼는 예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제1일은 예배하는 날이었고 떡을 떼는 교제의 날이었으며 안식의 날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안식하신 날을 기념하여 쉬는 날이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 개념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마치고 안식하셨다는 의미 이상으로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요단강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구속받은 일을 생각하고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다(신5:15). 하나님의 창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레에 하루를 안식하라고 하신다.
구속과 안식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주위를 칠 일 동안 돌았다. 제7일에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을 때에 성벽이 무너졌다.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칠십 년 동안 약속의 땅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했다(대하36:21).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에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질 구속을 기대하고 사는 삶을 의미했다.
구속을 대망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구속으로써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성취되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가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사건을 이루신 다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사건을 이루신 날을 부활의 날이며 구속에 들어간 안식의 날로 지키게 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구속이야말로 가장 큰 안식의 조건이며, 실제로 안식은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에 안식의 개념을 강화한 공헌은 역시 청교도의 몫이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개념을 확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주일 개념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청교도들은 주일에 구약의 안식일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여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를 낳았다. 청교도들은 주일에는 오락을 금하고, 아무리 바빠도 뛰어 다니는 것을 금하였다. 이 날에는 아무리 웃을 일이 있어도 이빨을 드러내어 웃지 못하게 하였고, 장사나 여행 등 자신을 위한 어떤 행위도 금지했다. 이렇게 주일 전체를 예배와 친교 및 선행을 행하는 데 사용하도록 엄격한 주일성수 사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들은 결국 기독교 역사상 신구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하게 성경적인 사람들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주장을 이어받아 구약의 안식일을 그리스도 안의 은혜와 교제 가운데서 누리는 영적 이스라엘의 복으로 간주했다. 또 청교도들은 안식일 개념이 모세의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 때에 하나님이 친히 보이신 안식 모범에 근거를 둔다고 했다. 그들이 안식일을 크게 강조한 것은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물이며 도덕률의 한 부분으로, 모든 인간은 안식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면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해야 한다. 일곱째 날에 안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고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책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과 노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노동은 안식을 동반해야 하며 안식은 노동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안식, 새로운 어프로치
성경은 노동과 더불어 안식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시간을 주신 것은 노동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과제는 일이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땀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경작 (히브리어라 아바드 〔abad〕; 번역하면 ‘섬기다’라는 뜻)의 과제는 경배와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지 못하게 된 타락한 인간을 섬김의 경작으로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인간이 땀흘려 수고할 수 있는 것은 죄지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노동은 창조의 동참을 함축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은 이 계약이 파괴되었을 때에 다시 일하는 축복을 주셨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노동관은 노동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또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노동관은 바울서신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강조된다. 바울은 스스로 장막 깁는 일을 하여 자비량(Tent-making)선교를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했다(행20:33). 그는 다른 서신에서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고(살후3:10).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을 책망했다(살후3:11).
성경은 철저하게 안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일이 복되다고 하시지 않고 안식이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있다. 원래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벌이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노동의 벌을 내리셨고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다. 그러므로 벌인 노동이 복일 수 없다. 죄의 대가인 노동이 끝난 후 찾아오는 안식이 복인 것이다.
노동, 새로운 조화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과 안식을 조화시켜야 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은 노동만으로는 살 수 없고 안식만 가지고도 살 수 없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나름 대로 일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생존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의 하나가 노동이다. 노동은 인간이 건강하고 깨끗하게 살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또한 안식해야 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쉬어야 한다. 안식은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다.
‘80대 20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라이킨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이 법칙은 상품 매출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고객이 담당하고, 은행 예금고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고객이 예탁한 거시이며, 결근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종업원이 도맡아 놓고 하고 있으며, 전화통화량의 80퍼센트는 통화량이 많은 20퍼센트의 사용자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의 능률도 마찬가지이다. 1시간을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20퍼센트인 10분은 쉬어야 능률적이다. 노동과 안식의 조화가 잘 되어야 양질의 노동, 양질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양질의 노동과 양질의 안식인데, 양질의 노동과 안식을 위하여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과 안식의 날을 엄수하는 습관을 함께 길러야 한다. 교회는 노동의 의무와 안식의 권리를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 중직자들의 경우 주일은 평일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날로서 과중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가 있다. 일상 생활이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주일 봉사가 근로나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되며 봉사도 안식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봉사가 안식이 되지 못하고 노동이 되면 주일성수의 의믄 희석되고 말 것이다.
영락교회 행정복사로 섬길 때의 일이다. 주일에는 예배 외에는 어떤 회의도 하지 말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주일 하루에 예배는 고작 1시간정도 드리고 나머지 여러 시간은 회의하면서 주일을 보내야 하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직책상 관여해야 하는 회의 여럿이 있었기 때문에 예배보다 회의에 더 큰 비중이 쏠리기 일쑤였다. 주일은 회의 때문에 피곤한 날, 한두 번은 회의 때문에 아침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저녁예배를 드려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의가 그러하듯이 예배 때 받은 은혜를 회의에서 다 반납하고 돌아가기가 십상이다. 그러므로 주일이 예배의 날, 안식의 날이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더구나 인간의 기본적 삶이 구조적이며 기계적이 될 미래 사회에서는 안식할 수 있는 하루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해야 한다.
사회구조와 안식 개념의 차이
주일성수는 결국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를 따져야 할 문제이다. 똑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평일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주일에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며, 평일에 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주일에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주일성수에 대해 선한 일과 부득이 할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주일에 무엇을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모든 주일의 행위가 안식의 개념에서 해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일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주일은 가족을 찾아주는 날로, 평일에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안식을 찾아주는 날로 만드는 것이 미래교회의 한 기능이 되어야 한다.
11. 구멍가게 교회에서 전문점 교회로 전환하라
저효율의 근본원인
최근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입에 올리는 용어는 고비용 저효율(高費用低效率)이다. 이 용어는 한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을 지적한 용어로서 높은 비용에 비하여 효율이 낮은 현상을 짚어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지표를 보면 노동임금은 미국 수준이지만 노동효율은 일본의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높은 임금에 비하여 노동력의 효율은 떨어지기 때문에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 경제의 약점은 과다한 물류비용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등 경제 선진국의 물류비용은 전체 생산 원가의 7퍼센트 선인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물류비용은 11퍼센트를 상회한다. 과다한 물류비용은 결국 생산 원가의 상승을 유발하며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이런 논리는 목회에도 적용되며 많은 일치점을 가지고 있다. 목회가 목회자의 높은 사례금 지불, 교회의 예산에 비해 볼 때에 효율적인지 주시해야 한다. 목회자의 사례금이나 목회에 투자하는 예산은 높은 반면에 효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저효율 목회이다. 저효율 목회는 일반적으로 지나친 시간 소모에서 비롯된다. 심방시 차량 정체, 교인의 원거리 이사, 목회자의 업무과중 등의 요인으로 많은 시간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고비용 저효율 목회의 원인을 좀더 자세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임금 상승과 목회 예산의 과다한 지출
2) 목회자의 노동력 저하
3) 목회자와 교인과의 협력관계 저하
4) 사회변동으로 인한 도시화현상에 따른 교인 이탈
5) 이동성의 발달로 인한 지역교회의 탈피
6) 임시성의 발달로 인한 교인의 교회에 대한 애착심 결여
7)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목회 패러다임 개발의 실패
8) 교회의 보수적 경향으로 인한 개혁의 실패
저효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비용 고효율의 목회 효율성을 연구해야 하며, 목회자 스스로 목회 효율성 상승작용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 스스로가 저비용 고효율을 위한 의지와 신념을 가질 때에 경쟁력을 갖춘 목회가 이룩된다. 앞으로의 목회, 경쟁력은 목회자끼리의 경쟁이나 교회나 교파 간의 경쟁이 아니라, 대(對) 사회적인 경쟁력이며 나아가서 대 세계적인 경쟁력을 높여나가는 데 요점이 있다. 이렇게 경쟁력 있는 목회로써만이 사람의 영혼을 얻게 될 것이다.
목회 전문화
저비용 고효율의 목회는 결국 전문화 목회이다. 목회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 탤런트가 아니라 하나를 잘 할 수 있는 전문 탤런트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가 있는 자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이어야 하는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교회의 상대적 역할은 다르다. 그래서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도시 중심에 있는 교회의 전문점이 되고, 도시 주변에 있는 교회는 편의점이 되라고 했다. 참으로 뼈 있는 말이다.
최근 기업개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데, 개선은 급격한 전환이 아닌 저 효율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일본 도시바 사의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는 일정율의 불량품이 나왔다. 회사에서는 불량품 발생 원인을 파악하였고 기계나 설비로 인한 것이 아닌 불량패턴 때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생산된 제품에 특히 불량품이 많다는 것이었다. 원인을 세밀하게 검토해본 결과 공장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 공장의 옆에는 철도가 있었고 기차가 공장 옆을 지날 때에 땅을 울리는 진동이 있기 때문에 불량비율이 높았던 것이다.
문제점의 발견과 함께 그 해결점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공장 주위에 해자(垓字: 도시나 성곽 둘레에 수로를 파고 물을 넣어 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파서 진동이 건너오지 않게 하여 불량품을 줄였다. 현장에서 작은 원인을 발견하여 생산을 개선한 것이다. 불량원인 해결방법은 그 공장에서 일하던 현장 여직공이 제안한 것이었다. 현장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사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시바 사의 예를 통하여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진급과 인정의 잣대는 연공서열이었다. 도시바 사는 한 여직공의 제안을 통하여 회사의 중요한 문제점을 해결했지만, 우리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늦게 입사했으면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정직원이나 고위간부에 의하여 거의 모든 정책이 결정된다.
실제로 생산성과 무관하게 연공에 의해 지급되는 급여, 서열 위주로 편성된 업무 체계는 기업이나 일반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미래는 서열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 정책이 결정되어야 하며 현장의 능력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전문성이 인정받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생산성은 간단한 개선을 통하여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선은 갑작스러운 혁신에 비해 충격을 최소화하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문제 해결을 찾도록 한다.
전문화 목회를 위한 몇 가지 요건
미래 교회는 현재의 목회구조로는 지속적 성장이나 보존을 하기가 힘들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절한 해답을 찾더라도 우리 정서에 부합하지 않으면 해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교회의 목회에서는 급진적 혁신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으로, 이미 체질화한 목회 내용을 하나씩 전문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현재의 목회 방법을 활용하고 점진적 개선을 시도함으로써 임상적으로 미래목회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교회와 미래목회를 전문화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첫째, 현장 중심이다. 현장은 세 가지가 있는데, 교인, 목회 생산, 조직 내부 직원이다. 목회가 변하고 전문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중시하여 현장을 만족시켜야 한다.
둘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선도 중요하고 미래 목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나,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경영적 관점에서 목회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개선은 항상 교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에서 목회가 개선되어야 한다.
셋째, 보상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물론 성도의 보상은 영원한 나라에서의 면류관이겠지만, 교회 조직에서 보상은 더 나은 봉사와 효율성의 증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넷째, 평가방법의 전환이다. 일반 직장에서의 평가방법은 월급이나 승진이다.
다섯째, 의사전달방법의 전환이다.
여섯째, 조직 내의 변화과정을 제도화하고 정착화하는 것이다.
세계화시대를 특징짓는 단어는 개방, 자율, 경쟁, 효율이다. 세계화는 모든 것이 개방되어 이제는 문을 꼭 닫아놓을 빗장도 없는 시대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미래 사회의 목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도 이제는 개방적이어야 한다.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나 사업들은 개방적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 교회만 그 프로그램을 고집하고 홀로 수행하게 되면 연대성이 상실되어 잘 안 되지만, 함께 개방하면 오히려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가 함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고효율의 목회를 창안해야 한다. 저효율의 목회는 목회자의 탈진의 요인이 되고 교회의 쇠퇴를 앞당기게 된다. 이러한 경쟁력 있는 목회, 고효율적인 목회가 전문성 목회이다.
목회 전문화와 리더십
미래 사회는 교회에도 전문화를 요구한다. 교회가 구멍가게가 아니라 전문점이 되기를 요청한다.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는 구멍가게가 아니라 교회도 이제 전문성을 갖춘 전문점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교회는 모든 다양성을 동시적으로 포함해야 하지만, 이와 더불어 개교회가 개별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교회가 복음전파라는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목표는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목표의 차이가 곧 개교회의 전문성일수 있다. 교회들은 목적성취를 위하여 제자훈련, 영성훈련, 사회복지, 가정사역, 찬양사역, 청년선교 등의 전문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문성을 귿대화하는 것이 미래교회에는 필요하다. 전문성은 매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어발 망발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의 대규모사업집단인 재벌들 사이에서는 빅딜(Big Deal)이 성행된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빅딜을 통하여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업의 전문성이다. 대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술과 산업을 전문성에 따라 서로 교환하게 되면 쌍방이 전문적 기술과 산업을 육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 사회는 전문성의 사회이기 때문에 전문성이 결여된 기업은 전문성을 갖춘 경쟁력이 있는 기업에 의하여 자연도태되고 경쟁력이 있는 전문점만이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살아남는 것이다.
전문성의 시대에 교인들은 교회가 전문성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교회의 전문성은 교회의 개성이다. 신세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중요시한다. 그들의 의상이나 사고의 표현에도 개성이 뚜렷하게 반영된다. 교회도 전문성을 가진 교회는 개성을 표현하고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다. 우선 모든 교회는 영성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로부터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개교회는 각자의 개성이 분명히 표현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와 신학교육도 전문화되어야 한다.
미래 목회를 위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보다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때에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사이고, 목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과’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전세대적인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나아가서 한국신학은 미래 목회의 전문화를 위해 전문목회에 대한 부전공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개발해야 한다. 현재 신학대학교 신대원의 ‘선교학 부전공’과 같은 부전공을 사회복지학, 교육학, 상담학, 행정학, 영성학, 여성학, 음악 등으로 확대하여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케 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통하여 목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 교육은 결국 목회자의 전문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고, 목회자의 전문화 교육이 전문화된 목회, 전문성 있는 교회로 전환할 수 있게 할 것이다.
12. 예배당 중심의 교회에서 주차장 중심의 교회로 전환하라
자동차, 주거공간의 확대
광복 당시 고작 6,337대이었던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광복 50여 년이 지난 ’94년에는 7,925,500대로 늘어났다. 해방 당시에는 13만 명당 1대이던 자동차가 이제는 8명당 1대로 늘어났고,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가 1천만대가 넘었다. 이것은 경제의 성장에 따라 가장 신속하게 성장하는 것이 자동차임을 말해주고 있다. ’97년 1월 현재 서울에서 하루 305대의 자동차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리 사회 변화의 추세이다. 이와 더불어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상승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자동차 1만 대당 22.14명으로 상당히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추세는 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자동차 문화의 정착과정에 따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승용차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진 세대이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전체 자가용 승용차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 수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용차 가운데 30대가 소유한 승용차가 40.4퍼센트로 가장 많고, 다음은 40대로 22.6퍼센트이며, 다음이 20대로 15.5퍼센트, 그 다음이 50대로 13.6퍼센트이다. 즉20대, 30대가 소유한 승용차가 전체의 55.9퍼센트이며, 이와 함께 10대가 소유한 승요차도 0.6퍼센트로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소유한 승용차는 전체의 절반이 넘는 56.5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비율은 자동차의 대중화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함께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젊은 층의 새로운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문에는 호출기를 가지기 위해서 강도 짓을 했다는 젊은이의 기사도 난다. 호출기가 더 이상 호출이라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화이듯이 자동차도 이제는 단순히 교통수단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화로 변해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즐기기 위하여 강도 짓을 해서라도 호출기를 가지며, 집은 없어도 빚을 내어서라도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은 까다로운 고객으로 변한다. 자동차는 그들의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주차장이 편리한 곳을 선호하고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곳은 반드시 주차장이 있다. 또 주차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차원이 있어서 주차를 도와준다. 주차장이 없는 곳에는 가기를 꺼려하고 만날 약속 장소를 정할 때에는 주차장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풍속이며 미래를 향한 트렌드이다.
자동차 문화와 생활양식의 변화
그러므로 교회는 젊은이들의 공간을 제공해주어야 하며, 그들의 공간인 자동차를 세워둘 공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세대들에게 자동차를 타지 말라고 하든지 아니면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곳은 그들의 자리가 아니다. 이제 주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캠페인보다 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주차장을 마련해주자는 캠페인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에 아무 불편 없이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두고 자동차를 얼마든지 타고 오라고 광고한다. 그리고 차를 타고 오되 주차를 질서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오토모빌리티 시대, 교회의 과제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현재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건축하기 이전 그 자리에서 드라이브 인 교회를 설립하여 한참 드라이브 인 문화가 휩쓸 때에 많은 교인들이 차를 탄 채로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차를 타고 내리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고 주차 걱정을 덜 수 있어 한때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 앉아 드리는 예배의 한계 때문에 현재의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정교회가 지속되어올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주차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자동차 문화는 전혀 새로운 인간의 삶의 형태를 창조하고 인간의 의식까지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변하는 삶의 형태와 의식에 따라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해야 이에 익숙한 사람들이 교회를 편안하게 찾을 수 있다.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월남성도를 중심으로 설립하신 교회이다. 현재의 영락교회 예배당은 1950년 6월에 헌당하였고, 그 직후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후 1975년에 예배당을 증축하며 양쪽 날개를 달아 현재의 십자가 모형이 되었다. 양쪽 날개가 없는 원래의 예배당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이것은 한경직 목사님의 미래 전망과 목회 비전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그 건물을 헌당하실 당시에 다음으로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은 주차장 시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체 자동차 수는 7,000대를 넘지 못할 때였는데, 한 목사님은 미래를 예견하시고 주차장난을 예언하셨다.
주차장에 주목하라
주차장은 이제 우리 생활의 주변환경이 아니라 중심환경으로 서서히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이동은 교회의 목회 구조의 변화를 종용하는 요소가 된다. 주차장 걱정은 더 이상 배부른 걱정이 아니다.
주차장의 구비란 반드시 교회의 전용 주차장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용 주차장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교회에 따라 형편의 차이가 있다. 구비할 수 있는 주차장 용지가 교회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재정이 확보되어도 용지가 없을 수도 있다. 최근 대도시를 비롯하여 중소도시에서도 지가(地價)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가 전용 주차장을 소유하기보다는 가까운 학교나 사설 주차장등을 이용하도록 유도하며, 이와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대가는 교회가 지불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자동차가 사치품이 아니고 필수품이듯이, 교회의 주차장 확보도 교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데 있어 선택사양(option)이 아니라 필수장착(requisites)이다.
13. 오는 교회에서 가는 교회로 전환하라
교회의 중심이동
최근 한국교회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전반적인 출생률의 감소로 인한 교인의 감소에 기인한 것이며, 나아가서 교회가 수행하던 위로, 도움, 안정, 긴장해소의 기능들을 대신해주는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발달 때문이다. 기능적 대행물의 발달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밖으로 나가게 만들며 주일성수의 개념까지 바꾸어놓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전의주일성수는 반드시 자신이 적(籍)을 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의미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적을 둔 교회가 아니라 주일에는 어디에 있든지 예배는 드려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교회는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교회이다. 동시에 가장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는 교회이다. 외국의 교회들과 선교기관들이 한국교회가 급속 냉각되는 모습을 염려하며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관심을 보내고 있다. 한국교회의 급속 냉각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급속성장으로 인한 연륜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교회가 외형적 규모는 크지만 내면적인 성품이 채워지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그 역사나 문화나 삶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침체, 요인과 문제점
교인이 흩어지는 요인 중 또 한가지는 교회가 젊은 세대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최근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구 가운데 젊은 세대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0세에서 24세까지의 인구가 전 국민의 10.1퍼센트, 25세에서 29세까지의 인구가 10퍼센트, 30세에서 34세까지의 인구가 9.7퍼센트, 35세부터 39세까지의 인구가 7.4퍼센트로서 20대와 30대 인구가 전체 국민의 37.2퍼센트였다. 지난 ’9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에도 20세 이상의 선거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20대와 30대인 것을 감안할 때 교회의 선교전략이나 관심도 젊은 세대를 수용할 수 있도록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놀이에 익숙해져가는 교인들에게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모여오는 지금까지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흩어짐과 모임
이민 교회에는 예배나 교육의 기능뿐만 아니라 친교의 기능이 강하게 나타난다. 포로지의 회당과 같이 그들이 이민 생활에서 오는 갖가지 어려움과 심리적 갈등과 스트레스를 교회에 와서 서로 만나며 해결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면 한국말로 서로 의사전달이 가능하고 복잡한 그들의 생업에 대하여 조언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민교회는 그냥 들르기만 해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이민 교회는 친교를 강조하고 예배가 끝나면 커피와 빵을 함께 나누며 주일 점심식사에도 온 교인들이 함께 한다.
주말이동을 포착하라
최근에 와서 가장 뚜렷한 대이동의 하나는 명절 대이동이며, 다른 하나는 주말 대이동이다. 이제는 주말만 되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디로든 가야 하는 습관적 이동이 국민적 버릇이 되었다.
레저의 발달로 교회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이 증가하게 되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교인의 정체성은 잃지 않을 것이다. 관광지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는 필자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리 교회는 관광철만 되면 좋습니다. 한 주일에 200명 이상의 교인들이 더 출석하기 때문에 교회가 가득차고 헌금도 많이 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관광철만 되면 철새와 같이 빠져나가는 교인이 많은 대도시 교회와는 상반되는 현상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지금까지 교인을 오게 하던 교회에서 교인을 따라가는 교회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전망하면서 교회는 삶의 현장에서의 목회 패러다임을 신속하게 변혁해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실제로 늘어가는 주말과 행락철의 대이동을 교회는 현대의 필연적 현상으로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인을 찾아나서는 관광목회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앞부분에서 밝힌 대로 미래 사회의 교회는 개교회라는 좁은 의식보다 우리 교회 혹은 모든 교회라는 넓은 의식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의 모이는 교회에서 교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3부 강단과 선포, 이렇게 리폼한다
지난 시절 한국교회 강단은 교리가 본문을, 신학이 실제적 적용을, 설교자의 편의가 엄숙한 의미를 포수(浦囚)하고 왜곡하는 현상으로 얼룩져왔다. 설교자들은 이제라도 본문을 탐색, 발견, 적용할 수 있는 설교구성법을 개발하고, 명언적 선언에서 이야기로, 노변정담(爐邊情談)에서 주제의식이 치열한 생명 내러티브로 설교 초점을 전환해야 한다. 본령이 바르면 전달 형식이야 어떠해도 좋다는 식의 설교자 본위적인 발상을 전환하여,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을 위하여 영상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전달하는 연습을 쌓아야 한다. 맹목적 수구(守舊)는 진리 파수와는 거리가 멀다.
14. 제목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하라
설교자는 재창작자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면 더 이상 설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강해설교를 권한다. 21세기 설교는 주제 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강해설교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로빈슨(H.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강해설교란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구절의 뜻을 현재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의 요청과 환경에 따라 설명함으로써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의 선포이다.
그러므로 강해설교는 오늘의 사건과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야기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의 단어와 상황을 설명하지만 성경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찾는 것이지 설명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에는 설교자의 독서와 학식과 배경이 배어 있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본문에서부터 나오며 전개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설교자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본문의 정확한 전달이며, 결국 칼빈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주는 것이다.
설교하면서 듣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이런 표현을 가끔 사용한다. “설교자와 청중은 설교를 통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면서 듣고, 청중은 들으면서 듣는다.”
지금은 목회를 은퇴하신 필자의 부친도 오래 전 “설교 준비가 언제 끝납니까?”라는 질문에 “설교 준비는 강단에서 설교가 끝나는 순간에 끝난다.”고 하셨다. 설교자는 설교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듣는 것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의 충실한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은 설교할 본문을 몇 번이나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새벽5시부터 9시까지 본문을 읽으라는 대답을 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문이며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강해설교이다. 제목설교는 설교의 재료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만 강해설교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강해설교는 성경이 가진 신적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가장 완전하게 전달해주는 장점을 가진다.
결국 강해설교란 성경의 귀중함을 알게 하고 성경이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성경의 단어뿐만 아니라 성경의 맥락을 알게 하고 생활화 하게 해 준다. 강해설교는 청중에게뿐만 아니라 설교자에게 권능과 감화력을 갖게 해준다. 설교자의 권위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얻게 하며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또한 강해설교는 청중의 욕구와 접촉점을 가지며 신자들을 튼튼하게 양육시킨다.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삶에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청중의 삶에 강한 충격을 주어 마음으로 깨닫고 심령을 움직여 뜻을 정하게 해준다.
강해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라고 하는 것은 설교의 결과가 설교자에게나 청중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영적 감화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를 분별하기 위한 감동적이고 영적 감화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를 분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실험은 청중의 반응을 통한 것이다. 첫째, 청중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였는가?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더 잘 이해했는가? 셋째, 그 내용이 청중들의 삶과 분명히 연결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해보아야 한다. 설교는 단지 듣는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항상 이러한 접근이 요청되기 때문에 설교자에게 설교는 항상 힘든 것이다.
현대적 적용과 창의성
앤더슨(Leith Anderson)은 “21세기의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 성경 본문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이며, 둘째, 성경 본문에 관한 지나치게 많은 정보이다.”라고 했다. 설교자의 준비는 성경 본문의 가르침에 관한 연구 조사, 질문, 대답,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그 본문과 관련된 근본 문제 연구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교준비를 위하여 얻은 모든 정보를 공개석상에서 모두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설교자는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靈解)함으로써 오는 본문의 그릇된 이해를 피해야 한다.
또 너무나 많은 자료가 범람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설교하면서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세속적 도시 여리고로 갔기 때문에 강도를 만났다는 데 설교의 초점을 두어 거룩한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교회를 잘 출석하라고 강조한다. 또 데마와 같이 교회를 잘 섬기다가 세상으로 가면 강도를 만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본문이 가르치는 바는 강도를 만난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아주 부적절한 본문 해석이다. 또한 때로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자료에 의존하다보면 본문의 비중이 감소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히 버리고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 경우를 보면, 설교를 위하여 준비한 모든 자료를 설교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많은 자료를 다 사용하려는 욕심이 앞서면 성경 본문의 해석이 빗나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설교하면서 제목을 ‘다시 거두라’로 정하였는데,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주기 위함이었다. 강해를 하면서 초점은 남은 음식을 다시 거두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에 두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의 해석보다 재활용의 중요성을 해석했다. 그리고 본문에 충실하게 단어를 해석하면서 현대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지적했다. 그 첫째는, 다시 거두게 하신 예수님의 뜻은 그 나머지 음식이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얼마든지 모든 사람이 먹고 한 톨도 남지 않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를 만드신 것은 나머지라고 해서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한 가지 문제는 너무 많이 버린다는 사실이다. 재활용, 재생산은 중요한 현대적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르치셨다는 점이다. 바구니란 음식을 운반하는 작은 용기이다. 적어도 만 명이 먹고 남은 나머지 음식이 12바구니에 가득 찼다면 아주 알뜰하게 먹었고 나머지 음식도 지극히 작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두게 하신 것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기 위한 교훈이다. 우리 사회는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큰 것만 선호하다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면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셋째는 주위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먹는 것만 가르치면 동물적이 된다. 먹는 것 때문에 주위가 더러워지는데, 예수님은 음식을 먹은 후에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가르치신 것이다. 환경 보존을 가르치신 교훈이다. 성경 본문의 뜻을 해석하면서 오늘의 현실에서 그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성이다.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강단을 다시 살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개혁이다. 종교개혁이 중세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교회를 깨웠던 것같이 한국교회는 신종교개혁을 통하여 깊은 잠에서부터 교회를 깨워야 한다.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강단이 깨어나야 한다. 강단이 깨어나지 않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한국교회는 깨어나지 못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교리 중심의 교회에서 성경 중심의 교회로, 의식 중심의 교회에서 말씀 중심의 교회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교회의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기의 설교가 주제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성경이 가르치는 본래의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15. 선포 설교에서 이야기 설교로 전환하라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내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공부할 때는 설교란 서론과 세 가지 대지로 구성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며, 여기에 이어 마지막으로 짧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의 좋은 설교의 추세는 대지가 셋이 아니라 하나이다. 현대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제공하여 복잡하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 아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을 제공하여 한 주간 동안 기억하며 전해 들은 설교대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잡하고 조직적이며 기계적인 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교회에서 다시 복잡하고 많은 양의 실천하기 힘든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래인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설교는 그 내용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의 일방적 선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재적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달 방식(delivery), 즉 전통적 선포의 방식에서는 이야기체(narrative)로 전환해야 한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는 딱딱한 문어체의 설교보다 부드러운 구어체의 설교가 호응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은 피곤하고 지쳐 있으며 낙담하고 외롭고 힘든 세대를 목회의 대상으로 한다. 더구나 최근의 경제적 위기는 교인들로 하여금 의기소침과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 이러한 교인들은 그들이 죄인임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고함을 듣는 것보다 죄와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위로받기를 더 원한다. 이것이 21세기를 위한 이야기 설교의 근거이며 그 접근방식을 찾는 단서이다.
단순함과 감동
설교란 상호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고 분명하고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설교의 내용은 무가치하게 된다.
청중의 습관도 다양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단순화하고 세부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작고 짧은 이야기체의 설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렇지 못한 메시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 수많은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설교란 단순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이야기체의 메시지이어야 한다. 21세기 설교의 중요한 형태는 단순함이다. 설교를 단순하게 한다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청중이 설교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한다.
알려주고 맡기는 설교
일반적으로 청중은 설교의 내용이 주관적으로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청취를 중단해버리고 만다. 재미있어야 은혜를 받고, 때로는 재미와 은혜를 혼동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은혜(charis)의 어원은 기쁨(Chara)이므로 재미있으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 기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생활이 그러하듯이 설교도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설교는 교인들의 청취에 효과적이며, 또 설교가 재미있어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는 청중들에게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야기체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재미를 공급할 수 있고 집중력을 통하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청중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말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청취활동을 피하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진다. 신세대들은 심각하고 의미있는 인생 이야기보다 쉽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경향은 비단 신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에게도 확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더구나 교회에서 들려주는 메시지에서까지 심각하고 어려운 말을 듣게 되길 원치 않는다. 사람들은 교회만큼은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를 원하며, 설교는 쉽고 용기를 주는 것으로서 삶의 분석이 아닌 대답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딱딱한 명제들로 구성된 설교보다 쉬운 이야기를 원한다.
이전의 연설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웅변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설가들은 웅변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 텔레비젼에서 시청자를 사로잡는 연설들은 웅변이 아니라 시청자와 교감을 이루는 이야기들이다. 설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일방적 설교자보다 교환적 설교자를 더 좋아한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강의보다 대화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래교회에서는 더 두드러진다. 미래교회의 성도들은 강의식, 웅변식 설교보다 대화식, 이야기식 설교를 원하게 된다.
이전의 설교가 “해야 한다”, “마땅하다”, “당연하다”와 같은 어투를 많이 사용하였고, 강요적이며 지시적인 내용들을 사용하였던 데 반해 미래의 설교는 문제를 설명해주고 그 대안을 제시하며 그 다음으로 설득을 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강요적인 결론이 아니라 모든 결정을 청중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맡긴다. 현대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강요적인 목사들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지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고 결정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주길 바란다. 또 그들에게 일러준 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목사를 원한다.
16.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전환하라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성, 비동시성
우리는 이미 정보통신의 혁명을 경험했다. 장거리 통신수단은 세계화의 한 요인이며,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글로벌 패러독스의 동인이 된다. 또 장거리 통신수단은 멀티미디어 시대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정보통신혁명은 미디어 간의 기술적 수렴 곧 디지털화(digitalization), 영상화(visualization), 종합화(integration), 융합화(donvergency), 상호작용화(interactivity), 탈대중화(demassification), 비동시화(aynchronity) 등의 과정을 통해 정보유통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발생한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사회변동이다.
이러한 정보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이미 케이블 텔레비전 시대를 열게 하였으며 위성방송을 가능케 했다. 이미 가정에 들어와 있는 고질화 텔레비전(HDTV)이나 비디오텍스 등은 지금까지의 미디어 형태가 아닌 다매체와 통신과 컴퓨터가 이루어놓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디어 형태이다. 이러한 영상혁명은 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전문화가 가능하도록 정보 내용의 변화를 일으켰다.
최근에 와서 책이나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나 라디오와 같은 음성매체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며, 대조적으로 시각적인 매체가 선두 매체로 부각되는 이유는 정보사회에서 시각화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사회를 맞아 단순한 음성매체, 활자매체 등을 통한 일방적인 정보전달에서 시각적인 매체로 복음선포와 생활양식이 변혁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의 방식이나 설교도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속도감있는 액션 영상
이제는 영상이라고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영상은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은 움직이는 영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를 즐겨보며 비디오가 친숙한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젊은 세대에게는 컴퓨터의 자료들도 이제는 움직이는 영상으로 나타나며, 노래방 기계들도 움직이는 영상과 반주를 들으며 노래할 수 있도록 완전한 멀티미디어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는 영상이 움직이되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흥미를 일으킨다. 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당시 작가의 메시지와 배우들의 연기가 잊혀지지 않는 감동으로 남아 있는데, 20대의 신세대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었더니 끝까지 앉아서 보는 젊은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끝가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나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너무 전개 속도가 느려 지루해서 못 보겠다.”고 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사건 자체가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위성 중계되는 예배
이제는 컴퓨터를 통한 화상정보가 가장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정보매체가 되었고 실제로 우리는 화상정보를 매일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상은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영상이 주는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하여 매일의 뉴스와 오락을 접하고 있으며, 서울의 큰 네거리마다 대형 전광판이 있어서 짧은 뉴스와 광고를 본다. 그때그때의 기온과 교통사고 현황, 오존발생율, 먼지발생율 등을 화상을 통해 보면서 지나가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의회의 토론 장면을 의사당 밖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열린 의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노래방도 영상의 역할이 크다. 이제 동영상(動映像)은 우리 곁에 있는 실재이며 삶이다. 그러므로 이미 주어진 환경인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멀티미디어가 삶의 환경인 세대들에게는 멀티미디어가 아니면 말씀의 전파가 어렵고 또 비효율적이다.
멀티미디어를 통한 예배의 시도는 단지 젊은 세대들을 위한 배려만은 아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높으며, 보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도 효과적으로 드리기 위해 멀티미디어화 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예배의 멀티미디어화는 교인에 대한 교회의 배려이기도 하다. 한국의 많은 중. 대형 교회들은 이미 예배당 외의 부속건물에서 텔레비젼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당만으로는 예배 참석자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폐쇄회로를 통하여 부속건물의 모니터에 예배실황을 전송하며, 부속건물의 참석자들은 모니터를 보면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많은 교회들이 멀티미디어를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회는 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예배의 실황을 화면으로 보여준다. 예배 인도자의 얼굴이 크게 나타나 보이도록 해주며 예배 참석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설교시간에는 설교자의 얼굴과 표정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설교자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즉시 화면에 기록하여 참석자의 기억을 도와준다. 그리고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가사를 화면과 함께 보여주므로 모두가 예배의 동참자가 되게 한다. 예배의 멀티미디어화는 예배 참석시에 성경과 찬송가를 부득불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배려가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배려를 통하여 참석자들은 보는 재미와 함께 예배 전체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효과를 높일 수 있고 예배 인도자와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교회는 교인들이 변화와 미디어의 발전을 빨리 감지하여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예배를 개발하고 예배를 미디어화해나갈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철학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 사역의 멀티미디어화를 반대하는 생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많은 개신교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때 언제나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며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전파된 퀘이커교는 개신교의 극단적 우파로서 교회의 모든 형식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세례라는 외부적 의식과 십일조까지 거부하였고 성찬식도 폐지했다. 그리고 단지 신생을 통한 내적 정화만을 중요시하여 그리스도와의 내적 교통을 강조했다. 종교적 경험을 중요시하여 성경의 영감은 기록된 때뿐만 아니라 현재도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성경이 주는 영감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형식을 예배에서 제외하였고 성직자나 신조까지도 용납하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하게 예배에서의 형식을 배제하고, 물론 악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 우파 외에도 교회 내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변화나 도입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이 강하게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변화와 예배의 미디어화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찬성하거나 적극 시도해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구미에서는 이미 예배의 멀티미디어화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점차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심지어는 영화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영화로 드리는 예배도 시도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응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는 적절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며 현대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복음전파의 도구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확신과 배경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예배를 멀티미디어화할 때에 교인들의 정서와 교회 건물상의 여건과 목회자의 신학적 입장이 분명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 고전찬송에서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전환하라
종교개혁, 회중 찬송의 부흥
종교개혁의 반대자들이 “루터는 그의 설교보다는 그의 노래로써 우리를 더 해쳤다.”고 할 만큼 교회의 음악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중세 초기에 음악은 상당히 발전하여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황제의 재직기간(590-604)에 편찬된 성가인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는 천년 동안이나 교회를 풍미하던 유일한 예배 음악이었다. 그후 11세기까지 제창(齊唱)으로 드려지던 음악이 1600년에 접어들어 일반 음악에서 오페라 음악과 기악이 발달하면서 교회의 예배 음악도 새로운 형태를 낳게 되었고, 예배 음악도 파트별로 나누어 부를 수 있도록 화음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음악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개혁기간중에 루터는 회중적인 노래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칼빈은 인간이 창작해낸 찬송이 완전할 수 없으므로 시편을 제창하는 것은 인장했으나 합창음악을 거부하고, 회중이 함께 부르는 제창을 선호하였으며 예배에 악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초기 미국교회는 모든 예전에서 영국교회의 방식을 모방했다. 그러나 후에는 영국 민요와 미국화된 곡조가 예배 음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새로운 찬송은 무디(Dewight L. Moody)의 부흥운동과 함께 일어나 복음찬송(Gospel Hymn)으로서(이보다 먼저 일어난 미국의 야외 집회찬송이 야외 전도집회를 위한 흥겨운 곡조의 노래인 데 반하여) 이는 피아노를 반주로 하며 옥내집회 찬송을 고집하는 새로운 찬송이었다. 무디의 복음찬송은 당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새시대에 맞는 새로운 찬송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호응을 얻으면서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의 심령을 울리며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복음찬송은 처음에는 정식예배에서 거부당했으나 차츰 교회 예배에 받아들여졌다. 이 복음찬송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영국의 찬송과 함께 한국에도 전해졌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인간의 기쁨을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찬송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변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중세를 풍미하던 그레고리안 찬트만을 유일한 교회음악으로 고집하지 않듯이, 현대교회도 왓츠의 찬송을 유일한 교회의 음악이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인간의 정서와 하나님께 대한 표현의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도 새로운 형식과 장르의 음악을 예배 음악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
씨씨엠, 신앙 아닌 세대 차이
현대 교회음악의 대표적 위치에 있는 복음성가만 해도 끊임없는 시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반대에 봉착해왔다. 예배의 요소 가운데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제물이 음악인데, 이 음악에 사회적 요소와 영합하는 다른 재료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어떤 이들은 현대 기독교 음악(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대중가요에 교회적 가사를 붙인 것이므로 예배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고 구별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의 원인들에 대하여 경배와 찬양 사역자인 하스데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는 세상음악과 경배와 찬양을 구별하지 못하여 하나님게 드리는 진정한 찬양의 의미보다 멜로디나 리듬, 악기 등의 표면적인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여 세상의 음악을 즐기듯 찬양을 즐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예배와 삶을 분리하는 오류로서, 경배와 찬양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그 속의 능력이나 변화된 삶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형식만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배와 찬양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편견에서 비롯된 오류로서, 찬양을 하나의 찬양운동 또는 크리스천 문화사업 정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리듬음악이 교회를 타락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실제로 교회음악 그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킨 적은 없다. 록이나 비트가 강한 것이 교란으로 느껴지는 세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있다. 이는 신앙의 차이라기보다 세대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과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음악 유형 역시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중적 차별성 둔 개혁
세속음악은 처음부터 속된 것이고 교회음악은 처음부터 거룩한 것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도 재고해야 할 과제이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음악의 내용들은 처음부터 거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부른 노래는 처음부터 거룩한 성가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단순히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목자의 노래였다. 그가 노래할 때 사용하던 비파와 수금 등의 악기는 일반 목동들이 흔히 사용하던 세속악기였으며, 박수치며 노래하던 당시의 모습은 하나님께만 드려지던 예배형식이 아니라 일반 축제의 형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현대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악기도 마찬가지이다. 피아노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교회 음악의 중요한 도구이지만, 피아노 그 자체가 거룩한 악기인 것은 결코 아니다. 피아노는 대중적인 악기이며, 심지어는 술집에도 거의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 피아노는 거룩한 악기이며 기타는 세속악기이므로 기타는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교회음악에 가장 좋은 악기가 파이프 오르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이프 오르간은 좋기는 하지만 값이 엄청나게 비싸고 보존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전자오르간을 사용한다. 그러나 전자오른간은 사용하면서 전자 음향 합성장치인 키보드(Synthesizer) 사용은 반대한다. 전자오르간도 미국의 프로 야구장, 풋볼 경기장 등 경기장이나 심지어 경마장, 경견장(경마장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말 달리기 대신에 그레이하운드 등을 동원해 개 달리기를 시킨다)등 사행성이 있는 도박장마다 사람과 동물을 흥분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경기장에서는 흥분용으로 사용되는 전자오르간이 교회에 사용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 기타와 드럼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聖)과 속(俗)은 무엇을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분간 이중적 차별성을 두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전통과 현대의 두 가지 음악이 상존해야 한다. 전통음악이 유일한 교회음악이며 현대음악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적어도 교회에서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느 한 부류만의 모임이 아니라 모든 부류가 조화 속에 모여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8.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하라
이전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였으나 미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된다. 미래 교회는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을 통한 교회성장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에게 의존되어 있던 목회 패러다임을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영향을 많이 주지만 언제나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의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목회자의 이동시 교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된 구성요소로서 잘 훈련된 평신도는 안정된 교회의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아무개 목사 교회’
11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신학자는 상대적으로 배출하지 못했다. 세계적 신학자가 없는 교회에서 세계적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서는 세계적인 교회이지만, 신학과 목회의 내용에서는 세계적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구석이 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성장한 교회이고 성장한 교회의 이면에는 유능한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성장 요인으로서의 목회자의 능력은 교회 성장의 물량적 평가 기준이 되었고, 목회자가 곧 교회라는 등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교회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교회의 성장이나 목회 내용이 하나의 교회라는 교회연합 중심이나 교단 중심이 아니라, 개교회 중심이며 목회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회 평등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신도 개혁자 칼빈
기독교의 불후의 명작의 하나로 꼽히은 ‘기독교 강요’는 평신도인 칼빈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방대한 신학적 주제를 성직자나 신학자의 입장이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저술하였고, 개인의 성경연구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John Wesley)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으로 깊이있게 연구하여 평신도 운동의 합리성을 그의 신학으로 선포하였고, 나아가서 평신도 설교자(lay preacher)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영향으로 평신도 설교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오랜 로마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칭적인 의미를 가진 일반 교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평신도란 용어를 사용했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교회의 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평신도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위해 선교와 교육 등 다양한 교회의 봉사업무들을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책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건을 확립해야 할 것이며 평신도가 교회의 안정적 주체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성직중심적 구조나 성직계급적(hierarchical) 사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 개념의 새로운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2등 없이는 1등도 없다
초대교회에는 제1선은 아니지만 제2선에서 일선의 지도자를 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바나바, 마가, 누가, 디모데, 브르스가와 아굴라 등이다. 이들이 없는 초대 교회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공헌은 컸지만, 이들은 한번도 사도라고 불린 적도 없고 스스로 사도가 아니라고 불평한 적도 없다. 또 이들의 업적으로 보아도 사도 가운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다 다대오나 시몬 등의 제자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였고 성경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고, 사도라는 이름을 원치 않았으며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잘 감당한 평신도들이었다.
특히 바울은 누가를 극진히 사랑하여 함께 일을 하였고, 누가 역시 데마, 그레스게, 디도가 바울을 떠날 때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바울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딤후4:10-11). 그리고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선교에 방해가 되었던 마가도 이후 성장하게 되어 바울은 마가가 유익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딤후4:12). 이런 인물들은 한결같이 제2선에서 제1선의 사도들을 충실히 도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든 모범적인 평신도였다.
이와 같은 요인 외에도 미래 교회가 평신도 중심이어야 할 또 다른 당위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나 기업이나 조직에서 그 중심이 이동한다는 미래 현상 때문이다.
그간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이제는 서서히 평신도 중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고 있다.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평신도 훈련이 목회의 중심사역으로 바뀌며 잘 훈련된 평신도를 많이 가진 교회가 미래 사회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권력분산, 고객 중심의 구조
최근 기업에서는 고객만족 경영의 중심이 되는 고객 중심적 경영을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회사 중심이었고 고객들은 회사의 결정대로 따라가는 형태였으나 이제는 고객의 의향에 따라 회사가 따라가는 형태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고객 중심의 경영은 첫째, 고객의 불만을 파악하고, 둘째, 고객의 기대와 희망을 구축하고, 셋째, 고객만족 관리방법을 구상하고, 넷째, 고개만족 관리를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객 중심적 경영이 가능하게 되려면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객의 취향을 분명히 알게 되면 고객의 만족을 위하여 고객의 요청을 어떠한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경우 그 불만이 무엇인가 먼저 파악하고,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구축한 다음,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고,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고,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관리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그 중심이 성직자에서부터 평신도로 옮겨질 때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기의 목회는 평신도 중심의 목회이며 평신도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목회여야 한다.
‘고객 접촉 경영’은 고객을 만나서 그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경영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고객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경영요소이다. 이러한 신경영기법에 따라서 최근의 많은 회사들은 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제일 가까이에 가장 지위가 높은 부장이 앉아서 고객을 맞이하고 지위가 낮은 대리는 안쪽에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경영기법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신입교인이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주차안내와 예배당의 안내를 담당한 사람은 처음 교회를 경험하는 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인상을 남기게 되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새로 온 교인들에게는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의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를 훈련하여 새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도록 하는 것은 교회성장과 성숙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실제적인 면에서 평신도는 다양한 전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다양한 기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가 가진 다양한 기능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교회와 성직자 개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또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 평신도 중심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 목회자의 권위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으로 전환하라
지도력과 권위
지금까지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이미지보다는 권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또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카리스마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도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력이 있다는 의미보다 권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최근 우리 사회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권위 상실의 시대를 맞이했다. 전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부모, 스승,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권위가 권위주의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는 사회적인 지위를 권력이나 어떤 위력으로 지탱하려는 주의이므로 논리성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하여 프로이드(Sigmund Freud)나 프롬(Erich Fromm)은 권위주의를 국수주의적 사회병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타파한다고 하더라도 권위 자체는 살아 있어야 사회의 규범도 바르게 정립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권위마저 점점 실추되고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매를 맞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지나치게 장난하는 학생들을 말리는 어른에게 학생들이 욕을 하며 때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매로 훈계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권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권위적인 목회를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현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이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권위를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고집이나 생각으로 교인을 억지로 따라오게 함면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주의는 구속적이며 강압적이기 때문에 무리하고 무도하게 되며 추종자들의 반항이 뒤따르기 때문에 목회자는 권위주의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강단의 권위, 생활의 친근
강단에서 말씀 선포 기능은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권위가 강단 아래에까지 연결되어 강단 아래에서도 권위를 내세우면 더 이상 권위라 하지 않고 ‘고집’이라고 규정된다. 반면에 강단 아래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단 위에서까지 드러내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권위와 인간미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것이 목회자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력은 권위와 인간미를 포함하는 목회자의 생명과도 같은 기능이다.
교회행정학에서는 교회행정을 세 가지 용어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용어는 교회행정의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지도력 (leadership)이다. 지도력은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는 업무(envisioning task)와 모델을 만드는 업무(modeling task)이다. 둘째는 관리(management)이다. 관리는 기획하는 업무(planning task)와 감독하는 업무(monitoring task)이다. 셋째는 경영(administration)이다. 경영은 보조하는 업무(supporting task)와 향상시키는 업무(enhancing task)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보면 지도력은 목회자의 행정업무이며, 관리는 장로의 행정업무이며, 경영은 집사의 행정업무이다. 교회행정은 어느 한 직계로 획일화하는 독점적 업무가 아니라 모든 직제가 고유한 업무를 가진 종합 행정이다.
담당자 |
교회행정의 형태 |
업 무 |
목회자 |
지도력 |
비전을 제시하는 업무, 모델을 만드는 업무 |
장 로 |
관리 |
기획하는 업무, 감독하는 업무 |
집 사 |
경영 |
보조하는 업무, 향상시키는 업무 |
교회 행정의 세 가지 형태와 업무 및 직분자들의 역할
이처럼 지도력은 통제와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지도력은 조직 운영에서 구심적인 힘을 형성시키는 것이며 조직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역량이다. 테리(George Terry)에 따르면, 지도력은 그룹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사람들이 기꺼이 노력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행위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강력하고 창조적인 지도력을 갈망한다. 좋은 지도력이 영적인 건강과 의미있는 예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활기찬 사역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준다.
결국 지도력은 조직의 목표 성취를 위한 힘의 동원 능력을 의미한다.
보스와 리더
교회는 좋은 지도자를 원하고 지도자는 강력한 지도력을 원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지도력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며, 의미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며,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활기찬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력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교회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교회가 영적으로 고갈되며 사회에 대한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는 때는 지도력이 상실된 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도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보 스 |
지도자 |
구성원을 몰고 간다 권위에 의존한다 공포감을 준다 ‘나’혹은 ‘내가’라고 한다 잘못된 일로 비난한다 파업을 어떻게 할지를 안다 ‘가라’고 명령한다 |
구성원을 지도한다 호의에 의존한다 열심히 일하게 한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잘못된 일을 수습한다 어떻게 할지를 가르친다 ‘같이 가자’고 한다 |
보스와 지도자의 차이점 비교
지도력의 기술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의사소통(communicating)의 기술이다. 의사소통은 언어로 표현되는 서로의 여러 가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만남과 교환의 과정이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대화자이어야 한다. 둘째, 귀를 기울이는 것(listening)이 지도력의 기술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듣는 것(hearing)과는 다르다. 듣는 것은 육체적 경험에 불과하지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듣는 것에 대한 수용과 판단의 행위가 포함된 종합적 과정이다.
셋째, 위임(delegating)이 지도력의 기술이다. 지도자는 어떤 결정이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타인에게 책임과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지도자는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일을 하게 하는 자이므로 자신의 업무를 적절히 분배 위임하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신뢰하는 기술을 소유해야 한다. 넷째, 인간관계(human relations)가 지도력의 기술이다. 지도자는 타인의 동기부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견고한 업무 관계를 형성해야 하므로 지도자의 인간관계는 중요한 능력이다. 특별히 목회자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영적 자질을 비롯한 사랑과 신임, 그리고 사회적 모범 등의 지도력을 소유해야 한다.
W 이론
지도력 이론이나 경영 이론에서 많이 이용하는 것이 인간 이론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본질을 연구한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간 이론은 맥그리거(Douglas McGregor)의 X 이론과 Y이론이다.
|
X이론 |
Y이론 |
Z이론 |
W이론 |
인간성 |
게으르고 책임지는 것 싫어함 안정만을 추구 타인에게 지시받는 것을 좋아함 |
자기표현과 자발적 참여 가능 행동 결정 및 자제 능력 소유 |
집단문화 속의 인간 일본 전통 무사문화의 전형 |
신바람 내면 |
동기부여방안 |
조직화하고 엄격하게 통제해야 함 |
스스로 지시하며 동기를 부여함 |
통제와 자율의 중간 |
신바람이 나도록 |
관리자의 자세 |
지시적 강압적 |
보조적 촉진적 |
강압과 통제, 자율의 조화 |
칭찬과 격려로 흥이 나게 |
인간성 이론과 관리자의 자세
X,Y 이론이 미국의 인간이론이라면, Z이론은 일본에서 개발된 이론이다. Z이론은 도쿄 올림픽 이후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의 토양에 적합하게 적용함으로 기술의 효율을 증대시킨 이론이다. Z이론은 동양의 선(嬋) 철학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 기술의 우수성을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특히 이 이론은 일본의 전통적 역사,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 전래적으로 무사(武士)문화를 토대로 집단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기업경영에 크게 공헌했다. 이 이론은 종합적 인간관리를 위한 X,Y이론을 절충한 것이다. 즉 인간관리는 강압이나 통제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완전한 자율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둘을 잘 조화한 중간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이면우 교수는 W이론을 만들자고 제창했다. W이론의 실체는 한국인의 ‘신바람’이라 했다. 한국인은 원대한 목표에 대한 포부가 포함되어야 흥이 난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통하는 지도자에게는 맹신에 가까운 신뢰를 보여주며 지도자에 대한 공생공사(共生供死)의 정신이 확인되면 신바람이 나서 일하게 된다. 신바람이 나서 하는 일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신바람의 문화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반적 문화이다. 이렇듯 교회도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신바람 나는 교회는 절대로 침체하지 않는다.
흥이 난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지도자인 목회자는 우선적으로 교인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연초에 세우는 그해의 목회주제는 확실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며 교인들에게 그 목표가 성취 가능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만일 성취가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면 교인들은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으며, 제시된 목표를 성취할 의도를 상실하게 된다.
교인을 자극하고 그 마음을 교회로 향하게 하는 것은 목표밖에 없다. 교인은 누구나 교회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단지 일할 여건이나 동기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절하고 확실한 동기가 부여될 때 교인들은 즐겁다.
둘째,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목회자는 교인에 대한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칭찬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리 방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칭찬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칭찬은 신바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목회자는 교인들의 불만을 파악하고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적절한 평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이 무엇인가를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서 필요하다면 목회자 개인에 대한 불만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며 실력이 있는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업적에 대해 적절히 평가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목회자의 자신감은 목회자 스스로가 신바람 나게 한다. 신바람 나는 목회자가 교인을 신바람 나게 할 수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21세기 교회를 준비하면서 교회의 신경영을 제시했다. 교회의 신경영은 사실은 신경영이 아니라 교회가 가져야 할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는 것인데, 교회의 신경영이론 역시 신바람이라고 정리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신바람이 날 것이지만 신바람의 인간적 원리는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칭찬과 관심이다. 서로가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교제의 삶, 교회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을 만났을 때 그 봉사의 수고에 대해 격려하고 감사하는 삶,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감추어주는 삶이 바로 신바람 나게 하는 삶이다. 이런 신바람 운동이 일면 교회가 성장하고 활성화된다.
베끼기 목회의 한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목회에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기보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모방을 반복하는 데 있다. 물론 목회 초기에는 모방으로 시작하지만 이 모방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만의 창조적인 목회를 시도하려 하기보다 모방에 의존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설교, 교회행정, 심방, 훈련 그리고 교회의 전반적 프로그램에까지 창의성 발휘보다는 모방하고 답습하는 양태가 흔하다.
교인들도 목회자의 목회 내용이 모방인지 창조적인 것인지를 알고 있다. 한국교회도 모방만으로 목회가 가능한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 자체가 달라져 모방에 의존해서는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교인들도 모방 목회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목회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교인의 불만은 교회에 식상해서 출석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지속적인 창의력 개발을 위해서는 축적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이 요구된다. 하나의 핵심 역량은 또 다른 기술의 개발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대다수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창의적 목회를 수용하지 못하고, 창의적 목회가 목회현장에서 실패할 경우 큰 책임을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창의적 목회를 하려면 적용에 실패할 경우도 얼마든지 생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의 어느 회사는 연구원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구하다가 실패를 선언하면 전 연구원들이 함께 모여 파티를 열어 격려해준다. 그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고, 또 다른 시도가 가능함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이런 식의 창의력을 가진 목회, 도전의 목회를 우리도 배워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지도자의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교회도 변화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데, 지도자는 이런 변화의 흐름을 먼저 습득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경영방법의 하나가 가시(可視)경영이다.
가시적인 구호를 만들어라
교회의 가시경영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접근방법이 있다. 첫째는 교회가 그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목표의 방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틀을 기초로 하여 문제점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분석전개의 방법과, 현재의 틀과 상관없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새롭게 설정하는 목적전개의 방법이 있다. 목적전개의 방법은 예방전개라고도 하는데, 문제발생 후의 치유보다 문제발생 전의 예방을 전제로 전개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목표와 상황과 정보를 교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접근방식이 상당히 미흡하다. 목회자는 교회의 방향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고, 그 방향대로 비전을 제시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회자의 머리 속에 있는 비전을 알지 못한다. 배가 진행하는 방향을 선장만 알고 선원들은 알지 못할 때 선원들의 업무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결국 배는 방향을 상실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다.
셋째는 경영의 흐름이나 목표의 전개 과정이 모든 교인들에게 보이게 해야 한다. 추상적인 용어나 포괄적인 제시보다는 구체적인 용어로 성취 가능한 목표가 제시될 때 교인들이 따르게 된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방대한 목표가 제시될 때 오히려 교인들은 포기한다. 교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목표는 단어 중심의 구호 형식이 아니라 개량적이고 서술적인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형제사랑, 교회사랑, 이웃사랑’이라고 설정하면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시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 세 사람 이상과 인사하고 돌아갑시다. 한 장에 8원, 휴지는 한 장씩만 씁시다. 한 주일에 100원으로 소년소녀가장을 도웁시다.’ 등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시행 가능해진다. 이러한 가시경영은 경영자의 지도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가시경영을 통하여 목회자는 지도력의 효율성을 증대하게 된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교회의 방향성을 좌우하며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부실의 징후
지난 ’97년 10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최한 경영자조찬세미나에서 한국금융연구원의 양남하 교수는 부실.도산 기업에서 나타나는 주요 징후를 발표했다. 그는 최근의 경기침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실기업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형 부실기업 자체 진단법’을 발표했다. 그는 강연에서 “중역들이 지각을 많이 하거나 책상 위에 서류가 수북히 쌓여 있는 기업은 대개 실적이 나쁘고, 공장 내에 사무용 책상이 많거나 화장실이 더러운 회사는 비능률적이고 품질이 나쁘다. 또 손님을 응접실에서 오래 기다리게 하거나 책상서랍 속에 화장품, 위스키 등을 넣어두는 곳은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밖에도 중역 수와 거래은행이 많고, 똑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역마다 다르며, 판매사원들이 회사 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고, 종업원들이 뒤에서 간부 욕을 하는 회사가 부실기업이라고 했다. 그는 또 친족을 임직원으로 채용하고 회사 차를 사적인 용도로 쓰는 경영자나 화려한 응접실을 갖추고 외부 명예직을 좋아하는 등 허영병에 걸린 경영자도 부실 경영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의 분석에 비추어볼 때 일반 회사와 교회의 근본적 차이는 있겠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도 있기 때문에 기업의 도산 형태를 통하여 교회의 쇠퇴 원인과 처방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래 교회에 대한 일반적 예측은 교회의 쇠퇴나 교회의 통폐합, 또는 교회의 폐쇄 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는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미래 사회에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목회자의 지도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도력을 키워나가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결국 미래 교회는 지도자의 지도력에 따라서 존폐의 여부가 결정지어질 것이며, 따라서 지도자의 지도력은 교회의 생존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전망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권위적인 목회의 틀을 벗어나서 지도력 있는 목회로 전환해야 한다.
4부 구원과 윤리, 이렇게 조화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을 위하는 존재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다 함은 교회가 세상의 진정한 소망이요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오랜 세월 동안 한국목회자들은 세계를 이루는 두 축, ‘가정’과 ‘사회’를 너무나도 등한히 해왔다. 가정에 대한 무관심을 제자도의 표상인양,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를 복음주의인 양 꾸며왔던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목회를 동역동사(同役同使)로 인식하라는 주문이 먹혀들 리가 없다. 그간 목회를 독불장군식의 영웅적, 전설적 무용담쯤으로 치부하는, 인격과 신학적 전문성보다는 저돌성과 추진력을 덕목으로 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도 다 이런 탓이다.
20. 교회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전환하라
미래가정 이렇게 바뀐다
테크노피아를 꿈꾸는 미래의 가정은 최첨단 과학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기술이 가정의 면모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게 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선 가정에서 세대간의 격차가 커지게 될 것이다. 흔히 우려하는 대로 가사(家事)의 80퍼센트 이상을 돌보게 될 로봇을 비롯한 첨단 과학 기술이 가정주부의 역할을 대신하므로 가정주부의 여가 이용이 미래의 큰 연구과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러한 미래적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므로 가정의 새로운 가치관 정립과 가정에 대한 중요성의 비중이 가중되고 있다.
21세기의 가정은 노령 인구의 증가로 노령화 가정이 많아진다. 이는 이전과 같은 대가족의 형태가 아닌 노인만 사는 가정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구미의 추세와 같이 독신 인구가 증가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사회는 개별화가 극대화되고, 또한 경제적 성장은, 더불어 사는 관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 여건의 변화가 함께 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고 이러한 변화는 결국 독신자의 증가를 가져온다. 따라서 현재 구미의 추세와 같이 독신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특히 경제적 여건의 변화는 여성 독신자가 증가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가정마다 자녀 수가 적으므로 자녀를 과잉보호하게 되고 이에 따른 자녀의 사회성 결여, 그리고 체격은 커지지만 체력은 약해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동시에 자녀의 과잉보호는 왕자병, 공주병을 낳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겸손을 미덕으로 삼던 과거와는 달리, 자기 과시와 정확한 자기 표현이 미덕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극대화 된 개인주의를 초래케 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미래 가정의 한 모습이다. 어쨌든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가정은 미래 교회의 중요한 목회적 관심이 된다. 미래 사회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가정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미 사회는 사회의 중심이 이미 가정 중심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직장인의 생활 패턴이 바뀌며 직장과 일에 대한 개념이 전환됨으로써 생활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주 5일 근무제 직장이 점차적으로 증가되고 있으며 주말의 복장도 달라지고 있다. 주중에는 정장차림의 복장을 선호하지만 주말에는 캐주얼한 복장을 즐겨 입는 추세다. 실제로 고객을 상대하는 직장인들도 이전같이 딱딱한 정장보다는 부담없이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고객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이러한 복장의 변화도 직장이라는 경직된 개념보다는 가정이라는 부드러운 개념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기호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지고, 이전처럼 통제가 많고 기계적인 직장보다 화합적이고 가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직장도 가정과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
가정을 포용하는 교회
이러한 추세를 감안한다면 교회도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교회」(A Church for the 21st Century)에서 교회의 개념과 형태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가족농장(family farm) 형태의 교회이다. 미국의 대부분의 가족 농장 교회는 작은 교회이며 수적으로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둘째, 학교(school) 형태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의 예배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목사의 설교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을 싫어하는 교인은 오래 머물지 못하는 교회이다.
셋째, 가맹점(franchise) 형태의 교회이다. 교단에 소속된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대개 어디에 있든지 교단이 제공하는 교재와 커리큘럼으로 공부한다.
넷째, 일반 상점(general store) 형태의 교회이다. 교인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교회이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공동체교회(community church)라고 부른다.
다섯째, 쇼핑 몰(shopping mall) 형태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대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져 있으며, 성공적이고 때로는 상업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여섯째, 전문점(speciality shop) 형태의 교회이다. 다른 교회에서 얻을 수 없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어디에 위치하고 있든지 그 교회를 찾아간다.
일곱째, 유령의 집 (haunted house) 형태의 교회이다.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한 번쯤 찾아보는 그런 형태의 교회이다.
가정을 중시하는 교회
미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가정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미래 교회가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할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미래의 가정이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신세대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에 따라 미래 가정은 다세대의 가정보다 핵가족 형태가 많아질 것이고, 가족이 분열되고 이산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또한 맞벌이로 인한 주말부부가 많아지고 부부는 자연히 함께 ‘우리의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홀로 ‘내 삶’을 즐기는 새로운 풍습이 정당화될 것이다.
가정 중심이 된다는 것은 가정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까닭에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많아질 것이다. 여성들의 삶이 편리해지고 경제적 여건이 향상됨으로써 독신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미국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독신자를 위한 목회 (single ministry)가 일반적이 되었다. 가정에서는 가정 주부의 전통적 역할이 축소되고, 식습관에서도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먹게 되면서 가정주부의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에 따라 가정주부의 새로운 역할이 자리하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미래 교회에는 목회 패러다임이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여기서 가정 중심이라는 것은 성경적 가정관과 가정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자는 의미이다. 우선은 가정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하나님의 기관임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큰 가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처음 가정을 창조하셨고, 모든 가정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기관이며 모든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가정 중심 목회의 초점이다.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가치관과 가정 중심의 목회를 든든히 구축하기 위하여 교회는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분산된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일본의 가정들은 도꼬노마, 즉 다다미방에 찻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서 일본의 가정의 중심은 도꼬노마라 한다.
교회 내 가정 사역
내가 섬기는 교회는 최근 소그룹을 통한 가정사역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 가정사역학교의 거의 모든 내용은 가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소그룹 운동의 효율성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가정의 중요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혼 부부 혹은 결혼 예정자들이 함께 공부하는 ‘새가정교실’이 있고, “아버지가 변해야 가정이 변합니다.”라는 모토를 내세워, 일반적으로 교회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에서 제외되는 아버지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아브라함교실’이 있다. 오랜 가정 생활 가운데 무뎌진 부부의 사랑을 다시 느끼게 하고 부부간의 상처를 치유하며 상처를 주지 않는 대화기법을 공부하는 ‘부부 대화교실’, 시어머니들이 함게 모여 가정에서의 바람직한 역할을 공부하는 ‘나오미교실’, 며느리들이 모여서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중요한 미덕인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상을 배우는 ‘룻교실’이 있다.
또, 자신의 성격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지혜롭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베드로교실’,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인 배우자의 죽음을 맞은 이들이 그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나사로교실’, 중년의 부모와 사춘기의 자녀간의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는 ‘이삭교실’,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문제로 비중이 커진 명예퇴직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힘을 얻고 가정과 교회에서 할 일을 찾는 ‘모세교실’(모세는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그만두게 하고 죽게 하신 명예퇴직자였다) 등이다. 나는 전체적인 미래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에 맞추어 위와 같은 훈련 프로그램을 일치된 하나의 목회 구상으로 제공하는 방법을 취한다.
이와 같이 미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전환하기 위해, 평신도를 교회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올려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래 목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소그룹 훈련과 영성 훈련을 복합시켜 소그룹 영성 훈련을 개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미래 교회의 목회자가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바로 평신도를 양육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 소그룹 영성 훈련의 많은 부분들이 가정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미래 사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예측하고, 미래 교회에 가정 사역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전망에 근거한 것이다.
21. 프로그램 목회에서 영성목회로 전환하라
기술이 아닌 철학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살펴보면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그 자료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롬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자에게 도움이 되는 한편, 목회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 기능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과연 이렇게 많은 목회 자료들이 목회자를 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이러한 것들이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를 하였지만 이제는 이런 자료들이 없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목회 계획이나 설교, 성경공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한다. 자료가 없을 때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자료 시대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보다 우선 자료에 먼저 손이 가게끔 목회 방식에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갖가지 기계며 자료들이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게 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한다. 실제로 이는 기술이 없다고 해서 목회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기술과 자료를 알지 못하면 현대 목회에서 낙오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목회의 자료와 기술을 이용은 하되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목적이 혼동되는 산업사회의 산물은 결국 목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본말 전도
한국교회도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처럼 중세풍의 형식과 거품, 깨뜨리기 힘든 두터운 껍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과감하게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껍질을 깨는 각고의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중세 때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영상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눈앞에 닥친 현실의 경제적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영성을 회복하는데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영적인 것을 찾고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본능을 갖게 된다. 인간의 삶이 기술화되고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기술에 대해 초연해지고 조직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심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해방의 돌파구로서 영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엉뚱한 악령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말은 곧 영성을 추구하는 미래인에게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을 가진 종교가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동서양의 신비종교도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나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도 나름대로 영성이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기독교적인 영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이 영성을 사회에 제공해야 한다.
훈련을 교육처럼
최근의 심리학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인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라는 것은 인간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 시대에 살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결여된 인간의 문제이다. 기업에서도 기술향상이나 생산성의 향상면에서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노동 생활의 질(quality of work life)'이다. 개인의 성공이 곧 기업의 성공이듯이, 교인 각자의 영적 성장이나 삶의 질 향상이 곧 교회의 성장이며 교회의 질의 향상이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중요한 요인이 되는 이 교회의 질 향상과 삶의 질 향상 문제는 곧 교인 각자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식 전달의 통로가 되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지금 성장하고 성공한 교회를 보면 바로 학습과 훈련이 교회성장을 이룬 도구임을 알 수 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고 이러한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력을 키우는 훈련의 문제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연구와 훈련을 하지 않고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을 자포자기 한채, 침체나 쇠퇴 원인을 사회탓으로만 돌리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 경쟁력뿐만 아니라 생존력마저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교회도 영적 생활습관을 갖도록 노력하고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면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속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영성훈련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훈련 방식을 탈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제성이 부여된 훈련이었고 성도들도 억지로 받던 훈련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참여하는 자율적 훈련으로 그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회의 훈련도 참가자 학습으로 그 패턴을 전환하여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훈련의 결과가 다양한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학습의 효과에서 타율과 자율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타율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획일화 교육이었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이러한 전통적 교육 방식을 속히 벗어나서 다양한 기능을 전문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훈련기회를 다양하게
미래학자들은 미래 사회의 한 특징을 이단과 사이비의 출현이라고 단정한다. 물론 이전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상대적으로 이단과 사이비가 훨씬 더 증가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미래학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이다. 성경에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마24:5,11). 이러한 미래 현상은 과학기술과 조직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사람들이 기계와 더불어 살고 조직사회에 살게 되면 자연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단과 사이비가 나서서 혼란스럽게 된다.
한국교회는 최근에 와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영적 기운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통계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1996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1996년은 이상하리만큼 사회가 그릇된 영적 분위기에 많이 사로잡히게 된 해이기 때문이다.
우선 1996년은 환생과 전생 신드롬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 해이다. 터무니없는 환생이나 전생론에 대하여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급기야는 ‘환생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양귀자 씨의 「천년의 사랑」이라는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이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로 극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동시에 「퇴마록」이란 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외에도 ‘환생’, ‘깊은밤 깊으나 곳에2’, ‘귀천도’ 등의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 성공하고, ‘8월의 신부’라는 환생 주제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기도 했다. 26년 전에 죽은 남녀가 다시 환생하여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되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사랑의 고리를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정신과 의사가 맡도록 극을 설정해서 설득력을 더했는데, 환생 신드롬 형성에 적지 않은 여파를 끼친 드라마였다.
현실을 피하여 피안(彼岸)으로
드라마나 영화 외에도, 전생을 체험할 때에 잡귀의 침입을 막아주는 금강저라는 것이 유행하였고, 전생투시용 천연수정구, 문스톤 등이 1만원에서 40만원 정도하는 높은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또한 ’96년 하반기에는 이런 전생용구들의 갋이 3배나 폭등했다. 당시에 한국갤럽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의 24.5퍼센트와 개신교 신자의 21.4퍼센트가 전생을 믿고 있다고 했다. 이는 잠시 유행한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환생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교리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혼합주의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심성(mind-set) 깊은 곳에 불교라는 속옷을 입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경제수준의 향상과 사회안정으로 여유를 갖게 된 신자들의 신앙적 관심이 공동선이나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의 건강과 안락과 심리적 안정에 집착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불안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잊어버리려는 현실도피에서 발전한 것이기도 하다.
전생에 대해서 특히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높은 이유를 교회는 주목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생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신세대인 그들의 애정관 때문이라고 본다. 전생은 신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인스턴트식 사랑과 찰나적 사랑을 운명적 만남으로 결론 내려준다. 숙명적인 전생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자기합리화식 사랑 때문에 신세대는 전생 신드롬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환생에 대한 이야기의 대부분의 주제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회의 환생 신드롬에 대하여 교회는 환생이 아니라 중생이 우리의 삶의 해답인 것을 가르쳐주고 건강한 영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즉 환생론이 왜 비기독교적이며 불건전한 사회를 만들게 하는지를 알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적절한 처방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의 영성 쇠퇴와 저급한 문화
환생 신드롬이 만득이 시리즈와 같은 귀신 이야기와 무당 이야기가 사회를 풍미한 것은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가지지 못하고 사회에 건강한 영을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교회가 영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의미인 동시에 교회가 사회를 구원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전도의 능력이 약화됨을 뜻하며 교회가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성 회복은 교회를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최근의 경제 한파 때문에 다시 교회로 발길을 돌리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국교회에 주어진 20세기의 마지막 성장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같은 좋은 기회를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위한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래적 전망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재성장할 수 있는 길은 건강한 영성의 회복에 있다. 이 영성의 회복은 성경 본래의 모습,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 회귀하고 했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한국교회의 신종교개혁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22. 교회성장에서 사회봉사로 전환하라
교회와 이타주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한국교회의 고속 성장 추세는 차츰 둔화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침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한국교회의 많은 교단들 가운데 평균 1퍼센트 이상 성장한 교단은 하나도 없으며 많은 교회들이 침체되거나 쇠퇴하고 있다. 그동안의 한국교회 성장 신드롬의 기세가 꺾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신드롬을 극복해야 한다.
그동안의 교회성장기는 그 당시에 맞게 우리에게 필요했던 은총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성장이라는 상향 중심의 목회관을 가지고는 교회 본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수와 건물의 크기를 가지고 교회를 평가하며 목회의 성공여부를 따지던 이전시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롭게 열린 창을 향해 사회를 목회적 관심 대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 침체 현상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질적 성숙에 미흡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이든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이면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다고 하는데, 한국교회는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교인은 많은데, 주일 말고는 사회에서 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교인들을 ‘주일 크리스천’(sunday christian) 또는 ‘명목상의 크리스천’(nominal christian)이라고 한다. 분명히 교회는 성장했고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는 그리스도 문화와 거리가 멀다.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
교회는 교회의 내용인 문화를 소유해야 하며 그 문화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이념과 동기를 지배하는 데 원동력이 되는 문화를 사회에 심음으로써 사회의 문화를 기독교화할 수 있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사회의 바른 문화를 창출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전통 문화의ㅣ 보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민족사를 보아도 역사 속에서 소멸한 민족은 전통가치와 문화를 소홀히 여긴 민족들이다. 원나라, 청나라가 이런 나라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 가치와 문화를 보존하고 동시에 건강하고 새로운 사회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나라를 지배하는 문화가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지도 자문해보아야 한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교회 자신을 위한 성장 위주의 자세에서 벗어나 타인을 위한 성숙 위주의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봉사하라
이처럼 교회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회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구적(自救的)인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구조는 성장구조 일색이다. 재정구조만 하더라도 많은 교회들이 총예산에서 사회봉사나 선교 등 대외적 사업을 위한 재정보다 교회의 관리비와 인건비 등에 상당히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조조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산 위의 황홀경 가운데 산 아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짓고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본당, 교육관, 기도원이라는 초막 셋을 짓고 산 아래의 어지럽고 복잡한 사회를 바라보지 않으며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온 교회가 한국교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 위를 위하여 변화하신 것이 아니라 산 아래를 위해 산 위에서 변화하신 것이었다.
물론 한국교회도 산 위의 황홀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산 위의 경험은 산 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아래를 위한 경험이기 때문에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말씀의 외적 생동이 있어야 한다. 산 위에서 아무런 변화의 경험도 없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지만, 산 위의 변화만 추구하고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자들을 외면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세이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영적 경험을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영적 실천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 세 가지는 케리그마(말씀선포)와 코이노니아(교제)와 디아코니아(봉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제하며 봉사하는 기능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기능들이다.
성경에서 본 사회봉사
그러므로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상실하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봉사이면서도 가장 큰 봉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윤리적 봉사이다. 사람을 섬기는 수평적 봉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적 봉사의 결과이며 대가이다. 그래서 웨슬레(John Wesley)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예배는 인류에의 봉사이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디아코니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셨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사명이다.
환원의 원칙을 배운다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교회의 구조조정은 그 인력과 재정과 기구가 교회의 안을 살찌우는 내수적인 구조에서부터 교회 밖을 섬기는 외향적인 구조로 조정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인력과 재정은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부문에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재산을 공개하라는 소리는 재산을 분배하라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성경이 비록 정당히 얻은 자신의 재물이라 하더라도 분배의 책임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무리 정당한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재물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가진다.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땅과 재물이지만 희년이 되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신다. 교회는 이 원리를 알고 가르쳐야 하며 재산을 분배하라는 사회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은 소유기관이 아니라 분배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는 과감하게 소유 모델에서 분배 모델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 스스로의 개혁이 있을 때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배부른 교회 태만한 선교
교회의 배는 항상 조금은 곯아야 한다. 배가 너무 차고 불러서 움직이기조차 힘들다면 좋은 교회가 아니다. 건강법을 강의하는 의사의 말을 빌리면 사람의 위(胃)는 70퍼센트 정도만 채우는 게 건강에 가장 좋으며 과식하는 것은 굶는 것보다 더 해롭다고 한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들은 위를 100퍼센트 이상 채운 다음 소화제를 먹거나 토하기도 한다. 교회도 모든 수입예산을 교회를 위하여 채우지 말고 다른 부문의 섬김을 위하여 비워놓아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가 되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사회를 위하여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 필요할 때에 신속히 달려갈 수 있는 발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빈 손으로 가지 않고 무언가 들고 갈 수 있도록 교회의 배를 채우지 말고 비워두어야 한다.
섬김 - 구원의 목적
교회는 지금까지의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시도해야 한다. 구조조정은 교회의 목적 변경일 수도 있고 목적의 확실성 강화일 수도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컨설팅회사인 멕켄지(McKenzie) 컨설팅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건실하고 좋은 회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7S 법칙’을 발표했다. 관리 스타일(style), 관리 기술(skill), 전략(strategy), 구성원(staff), 제도나 절차(system), 구조(structure) 그리고 공유된 가치(shared value)가 그것이다. 한국교회도 사회봉사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 자체를 사회성을 포함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즉 사회봉사를 중심으로 교회 구조를 전환해야 특징적이며 효과적인 사회봉사가 가능하다. 나아가 아마추어의 수준이 아니라 프로의 수준으로 봉사하기 위해서는 스타일이나 기술, 전략과 제도, 절차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또한 그 중에서도 특히 구성원이 중요하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는 사회봉사를 전담하는 ‘복지법인 연동복지원’과 이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인 복지사가 있다. 이는 미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사회봉사를 전담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다. 지금 전문가가 수행하는 사역은 이전에 아마추어가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할 때의 사역의 질과는 전혀 다르다. 새로운 구조와 전문가를 활용할 때 전혀 새로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복지원에서는 두 곳의 어린이집, 노인정, 노인학교, 소규모의 양로원과 야학(연동청소년학교)등을 운영한다. 앞으로도 힘이 닿는 대로 복지 사업을 확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교회 옆에 복지관이 건축되면 지역 주민을 위한 장례식장, 환경미화원을 위한 세탁실과 탈의 휴게실, 청소년을 위한 농구장, 청년을 위한 북 카페, 게스트 룸, 도서실, 지방학생을 위한 장학관, 노인들을 위한 게이트볼 시설, 문화공연을 위한 소극장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스코틀랜드 가정의 격언 가운데 “섬기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는 말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함이며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세상을 섬기기 위함이다. 교회는 세상을 섬길 때 비로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가 된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며 사회가 인정하는 교회가 세상에 필요한 교회이다. 미래 사회에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하여 남은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봉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속히 섬김의 구조로 교회의 구조를 조정해야 한다.
23. 제자훈련에서 사도 훈련으로 전환하라
제자에서 사도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이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에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 사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일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3년이나 가르쳤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지만, 성령강림 후에 그들은 굉장히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능력 목회는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사도들의 몫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하다 못해 비천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도 많은 귀족들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도 있었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인들도 많이 있었고, 제법 지위를 가진 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보통 이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그나마 가장 나은 제자는 마태였다. 마태는 가버나움의 세리였는데 당시 세리는 돈도 많이 벌고 신변 보장도 받을 수 있는 상당히 괜찮은 직업이었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도 받아야 하는데,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할 수 있어야 세리가 될 수 있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세리는 두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가바이’라는 일반 세리로 술, 과일 등에 과세하는 세리이며, 또 하나 ‘미크사’는 밀수를 단속하는 세리로 길고 예리한 쇠막대기로 가방을 찔러보는 일을 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은 위치에 있었던 마태 역시 세리로서 유대인의 공적(公敵)이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직업 중에 세리는 가장 가증스러운 직업으로 취급되었다.
당신의 기준으로 볼 때 이들 열두 제자는 시시하며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으실 때에 산에 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뒤 고귀하게 세우셨다. 사람들의 눈에는 시시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선택하실 만큼 귀중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평범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들은 달라졌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할 수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였지만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 풀려날 정도로 신실한 예수님의 증인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사도들 가운데 요한만이 수명을 다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기며 오래 살았지만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섬에 유배당하기도 하는 고난을 당해야 했다. 구전에 따르면 맛디아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다. 제자일 때는 무기력한 무리에 불과했지만 사도가 되었을 때에는 큰 권능을 가진 일꾼이 되었다. 제자일 때가 아니라 사도일 때 그들은 놀라운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다.
흩어져 나가는 교회상
이제 한국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성도들도 제자에서 사도로 전환되어야 하며, 사도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가 많아야 한국교회는 다시 성장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교회가 23개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4,500명이 넘으며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이 어두운 밤을 붉게 밝힐 정도로 교회가 많다.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배당을 부수어버리고 다시 지을 만큼 경제력이 넉넉한 교회도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교회는 10년마다 교세가 배가될 만큼 급성장한 교회였다. 그 기간에는 양적 증가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고 교회성장이 목회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인 제자를 많이 양육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교회 밖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데 약한 단점이 있다. 이제 한국교회에는 교회 안에서 배우는 자가 아닌 교회 밖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인 사도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제자훈련도 사도훈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를 쳐다볼 겨를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교회는 사회를 외면하고 교회를 살찌우는 데 급급했고, 그 결과 이제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를 돌보며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좋은 사회인을 많이 배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문화를 창출할 영적인 힘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찬의 정신을 살자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 해 전에 “성찬의 삶을 살자.”는 캠페인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온 교우들이 성찬의 삶을 이해하고 성찬의 삶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캠페인이었다. 나는 교인들에게 성찬을 사도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해주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다.”라고 하시며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셨던 것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몸과 피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명령이 아니라 몸과 피를 주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찬의 의미는 단순히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피를 제공하는 삶이다. 직접적으로 장기기증 운동을 통하여 몸을 주며, 헌혈을 통하여 피를 주는 것은 진정한 성찬의 삶의 한 모범이 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온 교인을 상대로 장기기증 운동을 했다. 많은 교우들이 부분적으로 장기를 기증하기로 하고, 사후 시신 기증을 약속한 교우들도 상당히 있다. 헌혈도 한 해에 한 번만이 아니라 자주 한다. 그리고 전체 교인 수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교인이 헌혈에 참여하는 편이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이 있는 신앙의 훈련을 나는 사도훈련이라고 해석하며 성도들을 그렇게 훈련한다.
한국교회는 구원의 감격과 열정이 있는 로마서는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행함과 수고와 일치의 고통이 있는 야고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제자훈련에서 사도훈련으로의 전환은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이며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조화이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이방 세계인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신앙을 강조한다. 반면 야고보는 종교적인 전통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면서 유대주의의 비행과 외식주의의 형식을 일삼던 유대인에게 행위를 강조한다.
이런 배경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규정하며 행함을 통하여 믿음을 보이라고 한다. 바울과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와 교인의 성장에 중요한 양대 산맥이며, 이 교훈에서 강조되는 ‘신앙과 행위’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이다.
한국교회는 11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이방인 같은 처지에서 신앙을 배워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 행함이 있는 사도가 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제자훈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훈련으로 전한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삶의 자리인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사회가 교회를 요청하게 된다.
24. 생활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전환하라
인간복제, 교회의 반응은 무엇인가
생명복제의 가능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93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제리홀 (Jerry Hall)과 로버트 스틸먼(Robert Stillman)교수는 하나의 배자(胚子)를 48개의 새로운 배자로 세포분열시켜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 ’97년 2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가 복제 양 돌리를 공개함으로써 생명복제는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이로써 유전공학의 새 장이 열렸다는 환호성과 긍정적 평가에 더불어 복제인간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는 우려를 낳게 됐다. 돌리는 생식세포를 이용한 복제가 아니라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로슬린 연구소는 돌 리가 ’98년 초에는 어미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과학자들의 생명조작과 희롱은 계속되고 있다.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 미국의 오레곤에서는 ’97년 8월, 복제 원숭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동물 복제가 잇달아 성공함으로써 이제는 인간의 복제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유치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과학의 발달은 순기능과 함께 반드시 역기능을 초래한다. 생명복제기술의 발달도 예외는 아니다. 노벨은 길을 닦기 위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지만 대량 인명살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원자핵의 발견은 인류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이익을 가져왔지만 인류 자멸의 길이 되었다. 과학은 항상 인간의 문화와 삶의 진보를 가져옴과 더불어 파괴와 멸망을 동시에 가지고 온 도구인 것이다. 복제 양 돌리를 만든 유전공학 회사인 PPL사는 양의 복제 성공으로 계속 인간의 유익을 위한 계획들을 발표한다. 유전자 이식동물, 인간의 모유와 똑같은 성분을 가진 대용우유, 인간 이식용 장기를 가진 동물의 생산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인류에 공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신비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도전은 결국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이 될 수밖에 없다.
과학을 통한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발표한 미국의 두 교수도 절대로 세포분열에 의한 생명복제를 인간에게는 적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그들이 실험한 복제술은 노출되었고 누군가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어느 날 복제인간을 세상에 내보낼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은 현대과학의 꽃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자이고 축복과 재앙의 두 얼굴을 가진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을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조작되는 제품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생명에 대한 윤리적, 신학적 해답을 제공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98년 초에 미국의 한 과학자가 인간복제 시도를 선언했다. 인간복제 이론이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다음 복제 양과 복제 원숭이가 탄생되었는데, 이제는 인간복제에 대한 끈질긴 유혹이 드디어 그 가능성의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인간복제는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어 왔지만 시카고의 리차드 시드 (Richard Seed) 박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2년 내에 복제인간을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나아가서 그는 과학의 발전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전세계 20군데에 클론 클리닉(Clone clinic)을 개설하겠다고 했다.
그는 돌리 복제에 성공한 로슬린 연구소의 연구 내용을 기반으로 불임 부부를 위한 인간복제를 시도할 예정이다. 그러나 로슬린 연구소 측은 세포분열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태아가 기형이거나 사망할 위험이 높다고 경고하였고, 돌리 복제의 경우도 무려 277마리의 양들이 희생된 뒤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드 박사의 계획에 대하여 90퍼센트의 미국인이 도덕적인 이유로 반대하며 비난하고 있지만 그의 야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생명의 유니크니스
미국에서는 인간 복제 금지법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이같은 시도를 막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곧 법안이 마련되어 미국 내에서의 연구가 불가능해질 경우, 과학자들은 멕시코 등 미국 밖에서 실험에 돌입한다는 계획도 검토중이다. 프랑스 등 유렵의 13개국은 이미 인간복제 금지협약에 서약했다. 인간복제에 대하여 시드 박사는 “이미 지금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동차 기술 개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늘 반대가 있어왔다.”면서 과학과 신기술의 발전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교회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가져야 할 때가 되었음을 반증해준다. 교회는 그간의 생활이야기에서 이제 생명이야기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만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영이다. 사람은 죽어 있는 영이거나 살아 있는 육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 생명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이 안된다. 죽어서 생명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경시하고 유희의 대상으로 냉대하는 것은 죄악이다. 생명은 절대로 유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세계에서는 지금도 인간의 생명이 흥정의 도구로 변하고 사고 파는 상업의 도구로 변하여 희롱당하고 있다. 인질, 인신매매, 생체실험, 낙태등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가장 싫어하시는 흉악한 죄인인 것이다.
자살도 살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사망사고가 점점 늘어난다. 포장마차에서 옆 사람과 시비를 하다가 칼로 찔러 죽이고, 동생이 술주정한다고 형이 그 동생을 때려 죽이고, 자신을 해고했다고 회사에 불을 질러 사장을 죽이고, 직장을 잃었다고 자동차로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웃사람을 죽인다.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남편이 아내를 또는 아내가 남편을 청부살인하고, 아기가 심하게 운다고 어머니가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결국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상실되고 경색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계획된 살인보다 충동살인이 늘어나고 있다. 생명경시로 발생하는 흉악범죄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최근 경제불황과 맞물려 성인의 자살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 아들의 대학특차입학 실패를 비관한 어머니의 자살,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장의 동반자살 등 우리 사회는 예측할 수 없는 자살 증후군에 휩싸여 있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던 사람들이 경제불황으로 말미암아 총체적 상실감을 갖게 된 결과이다. 근래 우리나라의 자살 건수를 보면 ’90년에 7,486명, ’91년에 6,593명, ’92년에 7,401명, ’93년에 7,608명, ’94년에 7,451명, ’95년에 7,709명, ’96us에 8,632명으로 나타났다. 한 해에 8,000명 이상이 자살한다는 것은 하루에 22명이 삶의 고통을 죽음에 떠넘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물질만능이라는 시대의 조류에 인간의 존엄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으며 자신의 것일 수 없는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즉, 근본적으로 생명경시 풍조의 만연이 자살을 증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청소년 자살의 구체적인 원인들
실제로 청소년 상담실의 자료에 따르면, 중고생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성숙하지 못한 인간성에 의한 충동’ 때문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열등감 및 소외감이 19.8퍼센트, 학업성적이 17.7퍼센트, 부모의 잔소리가 15.6퍼센트, 장래에 대한 불안이 10.2퍼센트, 학업부담이 9퍼센트, 부모의 다툼이 3퍼센트, 교사의 꾸중이 2퍼센트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자살의 동기가 되지 않을 내용들이 청소년들에게는 자살의 중요한 충동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을 느낄 때 의논대상으로는 친구가 27.7퍼센트, 부모4.4퍼센트, 선생님 1.1퍼센트였고,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52퍼센트에 달해 근래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지를 보여준다. 개인주의적 성향은 누구와도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으며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자살이 유일한 마지막 카드가 된다.
흔히 자본주의는 다윈주의(Darwinism)를 기초로 한다. 이는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경쟁력을 통하여 힘이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며 자유로운 경쟁력이 있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 얼마나 생존에 필수적인가를 뼈져리게 체험한다. 세계화시대에 경쟁력이 없으면 국가도 외국의 자본에 의하여 여지없이 파산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쟁력이 생존을 좌우하는 요소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낙오되는 사람은 생존하지 못하고 도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생존 자격을 상실한 사람으로 오인되고 결국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게 된다.
다윈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는 선천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강제 불임을 시술한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처는 또 다른 인간성 상실이며 생명경시이다. 우성보존과 열성도태의 그럴 듯한 적자생존의 논리는 결국 존엄한 인간성 자체를 말살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일본, 독일 등의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신지체자들에 대해 불임시술을 시행했다고 하며, 이탈리아 정부도 ’85년부터 중증 정신장애인 여성 6천여 명에게 불임시술을 했다는 사실을 지난 1월에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경우 딸의 출산을 원치 않는 부모들의 요청과 동의에 의해 시술되었다고 하지만, 수술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는 여성들에게까지 불임수술을 시행한 것에 대한 도덕적 의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인명경시풍조의 또 다른 면은 사형제도의 존속이다. 사형제도도 교회가 생각해보아야 할 생명존중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70년부터 ’9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273명의 사형수가 처형되었다. 실제의 사형 건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연평균 26명이 사형선고를 받는 형편이다. 실제로 ’97년 12월 30일에는 흉악범 23명의 사형이 한꺼번에 집행되기도 했다. 법무부 당국자는 문민정부 출범 이전의 범법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이유를, 가중되는 경제난에 따라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흉악범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며, 또한 다음 정부가 가질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했다. 이날 사형을 당한 범법자들은 한결같이 흉악한 범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같은 날 명동성당에서는 사형제도 폐지를 부르짖는 성직자들과 변호사들의 시위가 있었다.
여권(女權)을 빙자한 살인행위
그렇다면 이런 생명경시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새로운 생명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바르게 알게 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생명의 존귀성을 신뢰하는 정신을 사회에 확산시켜나갈 책임이 있다. 교회는 살인으로 점철되어온 인간의 역사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가졌던 범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꺼져가는 작은 생명을 사랑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자세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가 막혀 있고 양심이 마비된 사회에 양심의 나팔을 부는 파수꾼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생명이 생성되어 지탱해나가는 과정을 다루는 생명윤리(bioethics)를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육신적이고 물리적이며 생물적인 생명 이상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생명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생명운동의 중심이 되고 사회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에게 생명교육을 시켜야 한다. 강단에서는 생명존중에 대한 가르침이 흘러나와야 하며 교인들은 생활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의도적으로 매년 생명에 대한 설교를 한 차례씩 하고 있다. 우리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생명을 가르치며, 매년 생명에 대한 설교의 강조점을 약간씩 바꿔 교인들이 같은 설교를 반복해서 듣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매년 낙태, 자살, 교통사고, 흉악범죄, 인질극, 사형제도 등으로 주제를 달리해서 하나씩 강조하여 생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질 미래 사회에 대응할 대비책을 나름대로 세우고 있다.
이렇듯 교회는 생명경시의 문제가 목회적 과제로 떠오를 미래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쳐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5. 나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전환하라
독야청청보다 ‘팀’을
팀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모세는 자신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애굽에 가기를 하니님 앞에서 거절했는데, 하나님은 언어에 뛰어난 그의 형 아론을 모세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신다. 아론은 모세의 팀으로서 애굽에 있던 백성을 이끌어 광야에 나오게 한 협력사역자가 된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좋은 팀의 모형이다. 신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팀의 모델은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의 관계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여러 사역자들에게 동역자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팀 개념에서 비롯된 칭호였다.
베드로와 마가의 관계도 좋은 팀의 모델이다. 바울과 누가도 좋은 팀사역자들이었다. 누가는 데마를 비롯한 다른 사역자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떠나갈 때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다(딤후4:10-11). 그리고 누가는 바울의 여정을 함께 한 좋은 협력사역자였다.
전설에 따르면 누가는 바울의 순교 현장에까지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는 바울의 최상의 협력자였고 바울과 고난을 함게 나누는 동역자였다.
팀사역의 강점
첫째, 자신이 실제의 자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네트워크는 결국 나 자신의 증대이다. 만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두 사람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네트워크는 나를 증대시키며 나를 풍요롭게 한다.
둘째, ‘나 홀로 목회’가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성취 가능하게 한다. 나홀로 목회가 가지는 약점은 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과 개인의 능력으로는 현대 사회의 다양화를 좇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사회의 다변화와 이에 따른 선교의 다양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협력을 모색하는 것은 미래 목회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미래 목회를 ‘팀의 시대’(Time to Team)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미래 목회를 ‘네트워크의 시대’(Time to Network)라고 부르고 싶다.
네트워크 목회의 실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목회는 개인주의적인 목회였고 개교회주의가 만연하였으며 교단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의 증후군인 에큐메니즘의 발달은 나 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우리의 목회를 전환하게 한다. 이러한 전환이 있기에 교회가 하나되는 새로운 기능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자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의 교환과 정보산업이 활성화될 미래를 위하여 목회현장에도 네트워크 형성이 요청된다. 실제로 무궁화 1호가 통신기능을 시작하였고 무궁화 2호가 기능을 다하게 될 때쯤이면 목회 네트워크는 휠씬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올 것이며 목회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목회 네트워크는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목회기관, 목회자와 일반 정보 기관 사이를 국내외적으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활성화된 네트워크 목회는 목회 전문화를 가능케 한다.
교회 네트워킹
미래 교회에 가능한 네트워크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목회자와 목회자의 네트워크이다. 목회자는 누구나 다양한 필요에 직면해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목회자는 항상 만능이 되어야 한다. 나 홀로 목회에서는 만능이 될 수 없지만 네트워크에서 목회자는 상보적(相補的)관계에서 만능이 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와 몇몇 서구 나라와의 네트워크를 꿈꾸고 있다. 우리나라의 목회 현장에서 사회변동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문제들을 서구의 교회들은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을 것이며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둘째, 목회자와 노회나 총회 등 상회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목회자 개인이 상회에, 그리고 상회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공지사항과 자료를 전달하기 위해 언제든지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는 좋은 전달 수단이 된다. 모든 목회자가 동시에 네트워크를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셋째, 목회자와 정보 제공 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는 목회자의 정보 제공에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이고, 목회자는 이것을 통해 쉽고 빠르게,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신학대학교의 도서관이나 사설 정보제공기관에서 CD 라이브러리를 통해 정보를 제보 받으면 경제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넷쩨, 기관과 기관 간의 네트워크이다. 교단과 교단, 정보제공기관과 다른 정보제공기관, 그리고 국내기관과 해외기관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의 양을 극대화할 수 있다. 목회자 개인은 어느 한 기관을 통해 모든 기관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관과 기관 간의 네트워크는 목회자 개인에게도 많은 유익이 된다.
네트워크는 유익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장애요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네트워크의 장애요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일반적 차이다. 네트워크를 형성한 네트워커(networker) 들의 나이, 문화적 배경, 학력, 경험 등의 차이는 네트워크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가장 큰 방해요인이다.
둘째, 신학적 불일치 혹은 성경해석의 불일치이다. 목회는 신학에 기초하므로 신학이나 성경 해석이 다를 경우 네트워크를 통해 목회를 교환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컴퓨터 통신의 대화방을 통해 논쟁을 벌이다 실제로 만나 결투를 하듯이 신학적 논쟁으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잘못된 전달이다. 구술 언어가 아닌 문자 언어만을 통해 전달할 경우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동시에 단점이 된다. 왜냐하면 구술 언어이므로 완전한 전달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넷째, 관계의 단절이다.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보다 이익관계를 중시하게 되므로 네트워크를 통해 관계를 형성하지만,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관계 형성이 어려우며 쉽게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
목회에서 네트워크의 성과는 첫째, 목회자의 사기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목회자는 효율적인 목회가 가능하게 되며 관리능력이 상승된다. 이러한 목회의 효율성 상승은 결국 목회자의 사기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둘째, 업무의 생산성 향상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생산성은 효과적인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셋째, 네트워크로 개인적 훈련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네트워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제공받을 생각만 하면 네트워크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므로 네트워크는 자신의 훈련과 향상에도 효과적이다. 넷째,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 건설에 기여한다. 하나님나라는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나 혼자만 하나님의 나라를 책임지려고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협력하여 하나님나라를 건설해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5부 목회자원, 이렇게 캐내쓴다
구약에서 은혜, 자비와 같은 말들은 여성의 육아 행위, 여성의 신체 기관을 언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하나님의 성품에는 전투성, 호쾌함과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함과 모성애적 관심이 함께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목회는 다른 어떤 세대에서보다도 여성적 민감성, 연약함, 심미안이 필요하다. 목회가 교회 안 여성에게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를 수렴하고 거기서 통찰과 참신성을 확보할 때,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교회, 전세계 교회의 경험과 신앙고백에서 배우고 그 큰 물결에 합류하는 교회로서 든든히 자리 매겨져갈 것이다.
26. 남성중심의 교회에서 남녀평등의 교회로 전환하라
여성은 우성(優性)인가
‘10퍼센트 법칙’이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모든 면에서 여성보다 10퍼센트 크다. 남성의 키는 여성의 키보다 10퍼센트 크고, 남성의 팔 길이는 여성의 팔 길이보다 10퍼센트 길며, 남성의 몸무게는 여성의 몸무게보다 10퍼센트 무겁다. 또한 남성의 손이나 발도 여성의 손이나 발보다 10퍼센트 크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밥그릇의 용적은 여성의 것보다 10퍼센트 크고, 젓가락이나 숟가락의 크기도 10퍼센트 크다. 이에 따라 손수건, 우산, 만년필 등 여성의 용품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것보다 10퍼센트 작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10퍼센트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작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95생명표’ 에 따르며, 남자의 평균 수명은 69.5세인 데 비해 여자의 평균 수명은 77.4세이다. 네덜란드의 의사 보이텐디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태중 사망률에서도 남아가 여아보다 무려 25퍼센트나 높다. 하나님께서 몸이 작고 적게 먹는 사람이 오래 살게 하신 것은 이 지구에 대한 은총이다. 학자들은 작은 여성이 큰 남성보다 오래 살고, 적게 먹는 여성들이 많이 먹는 남성보다 일에 대한 효율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여성은 환경이나 주변 조건에서 남성보다 강인하고 저항력이 강하다.
한국 여성들은 옛부터 손이 발달하였고 손으로 모든 일을 했기 때문에 손재간이 뛰어나다. 우리나라는 전자산업, 섬유산업, 반도체산업 등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이런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손재간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처럼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주방기구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주방기구라야 겨우 주걱 하나 정도이다. 그 외에는 모두 손으로 해결한다. 밥을 할 때나 반찬을 만들 때나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의 다 손으로 한다. 또한 어머니의 손은 약손이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약처럼 아픈 데가 감쪽같이 낫게 하는 손이다. 실제로 손으로 아이의 배를 문지르게 되면 손으로 자기(磁器)가 발생하여 치료효과를 얻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아주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한국의 전통적 가정의 가사는 많은 양의 노동을 요구하였고 여성은 가정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한꺼번에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힘든 일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지만, 인내와 지속성을 요구하는 농사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종일 땡볕에 앉아서 김을 매는 일은 남성은 엄두도 못내는 여성의 일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 전통적인 한국 여성들을 보면 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한 쪽 팔에는 빨래바구니를 끼고 다른 쪽으로는 빨래방망이를 들고 간다. 여성의 노동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수한데,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관념과 남성보다 여성이 약하다는 전통 논리에 의하여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교회에서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를 받아왔던 것이다.
여성이 달려온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에서도 여성이 인력의 우수성과 경영능력의 양질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이 남성 경영자의 기업보다 더 건실한 면이 많이 드러나면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그간에 묻혀 있던 자질과 인력을 개발하여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한 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여성의 고용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의 60퍼센트 선에 머물고 있다. ’97년 7월에는 여러 해 동안 남성으로 위장하여 취업했던 한 여성이 검거된 적이 있다. 위장 취업의 이유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성 고용조건의 상대적 취약점과 여성에 대한 편견은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일반 기업체뿐만 아니라 국책연구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과학기술의 메카로 불리는 대덕연구단지 내에는 60여 개의 이공계 연구소가 있는데, 이 가운데 여자 박사가 한 명도 없는 곳도 있고 20퍼센트의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연구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기존의 견해가 편견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교육부의 통계에 따르면, 자연계 고교생의 경우 수학, 과학 모두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3-4점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96년의 경우 수리탐구Ⅰ(수학)에서 남학생은 평균29.9점(100점 만점 기준)인 데 비하여 여학생은 33.4점이었고, 수리탐고 Ⅱ(과학) 역시 남학생이 37점으로 여학생의 40.9점보다 뒤졌다. 이러한 통계 결과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성이 지닌 선천적 요인보다 교육이나 사회적 분위기와 같은 환경적 요인 때문에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교회는 아직도 멀었는가
이러한 편견과 사회적 선입견은 목회 분야에서 더욱 심하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진출보다 더 힘든 것이 여성의 목회진출이었으며, 아직도 여성은 목사 안수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교단이 많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보수적이며 성직은 남성의 역할이라는 인식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도 이미 여성 안수가 허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여 목사의 업무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여 목사는 일반 남성 목회자와 달리 단순한 목회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 안수 그 자체에 대하여 아직도 한국교회는 수구적이다. 이처럼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적으로 여성 안수는 불가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 특히 고리도전서11:3-5, 14:34-35, 디모데전서 2:11-15 등을 들어 바울의 논쟁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 그러나 바울의 논쟁 가운데는 어느 한 곳도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말라는 암시는 없다. 그리고 남성에게 안수가 허락되었다고 모든 남성에게 안수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여성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성경에는 여성에게 안수한 흔적이 여럿 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롬16:1)는 ‘여 집사’였던 것으로 암시된다. 일꾼은 집사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집사는 안수직이었다.
바울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는 당시의 최고 엘리트 목회자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다(행18:34-36). 또한 바울이 직분자의 자격을 논하면서 “여자들도”라고 한 것은(딤전3:11) 여 집사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에서의 여자가 여 집사라는 것은 여성 안수를 현실적으로 반대하는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바울은 여성에게 가장 엄격한 지도자인 것처럼 평가되지만, 실제로 바울의 곁에는 수많은 여성 동역자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문안하기 원하는 복음의 일꾼들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의 이름이 많이 거명된다. 더구나 바울은 여성들의 이름을 들며 그들을 치사하는 수식어들로 그들의 이름을 장식한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3절),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6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 등 이런 수식어들은 이들이 바울의 좋은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에 잘 알려진 유력한 일꾼들이었음을 암시한다.
빌립보서 4:2에서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함께 힘쓰던 부녀들”이라고 했다. 바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한꺼번에 불식될 수 있는 구절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는 말씀이다. 바울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별을 과감하게 철폐한 평등사상가였다. 실제로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자신은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버리고 오네시모와 같은 종에게 복음을 듣게 하여 주인에게 돌려보내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여성들과 동역의 관계에서 사역했다.
여성 안수, 정말 안 되나
미래 교회가 여성 인력을 개발하여 목회적 자원으로 활용하며,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남녀가 평등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고 섬기게 하기 위한 과제를 크게 두 가지만 제안하려고 한다.
첫째, 교회는 은사 활용에서 남녀 차별의식을 없애야 한다. 안수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인물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공중 앞에서 인정하는 의식이다. 한국교회가 여성도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들을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실제로 사역에 동참시키고 있으면서도,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은 모순적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은사를 차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정해주어야 하며, 여성들은 스스로 그 은사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에서 여 교역자의 역할은 아직도 남 교역자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과 차별을 속히 없애야 교회가 사회의 민주화를 선도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
둘째, 교회는 여성의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효율성 있는 여성의 역할을 개발해야 한다. 여성은 섬세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것을 개발하여 여성의 잠재적 자원을 활용하게 되면 목회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업무는 지위(position)와 기능(function)이 동시에 주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한국교회 여성들에게는 지위는 없고 기능만 있었다. 이런 여성들에게 지위를 준다면 그 기능의 효율성이 증대될 것이고 교회가 건강해질 것이다. 여성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기능이 있으므로 여성 고유의 역할을 개발하면 여성 개인에게나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며, 교회의 성장에 기여하는 기능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신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남녀성별 구분의 모호성(trans-border)이다. 신세대들은 남녀의 기능을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오래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자는 ‘바깥 사람’, 여자는 ‘안 사람’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바깥 사람이고 모두가 안 사람이다.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으며 아내보다 먼저 퇴근 하여 가사를 돌보고 밥을 지어놓고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도 얼마든지 있다.
여성이 움직여야 교회가 큰다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증대와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목회적 변화와 새로운 추세들이 발생하게 된다.
첫째는 목회의 역할을 좀더 폭넓고 유연하게 정의하게 된다. 여성들이 성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방적이고 다양한 목회 사역을 만들 수 있는데, 미래 목회는 현재의 목회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 될 것이 분명하므로 여성들의 성직 참여는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창출해 낼 것이다. 목회에서는 여성만이 참여하는 특정직을 두지 않는 게 좋다. 또한 여성 전문직이라는 용어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는 목회에서 페미니즘을 유발할 뿐 아니라 남성을 제외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성차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교회의 공동체와 비형식적인 양육이 강조되고 발전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 지도자들은 프로그램이나 구조보다 양육과 인간적 접촉을 더 강조한다. 여성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교회는 남성 목회자의 교회와 많은 차이가 있다. 여성 목회자의 설교는 좀더 인격적이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실제적인 설교가 많고 교회의 의사 결정에 회중을 참여시키는 경향이 많다.
셋째로 여성 성직자와 신학자의 증가는 세계에 대한 유기적, 생태학적 관심을 높인다. 여성들은 환경이나 소외 계층에 대해 섬세한 관심을 가지므로 이러한 문제가 민감한 신학적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넷째, 여성 성직자의 증가로 평신도 사역의 증대를 도모하게 된다. 수적으로 여성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퍼센트 이상이며, 더구나 활동적인 교인의 80퍼센트 이상이 여성들이다. 여성 성직자는 이러한 평신도의 동력화에 유리하기 때문에 평신도 사역이 활성화된다.
다섯째,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교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교회들은 은연중에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교회들에게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전망하면서 한국교회의 거대한 잠재 인력인 여성을 교회의 성장에 활용하고,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평등한 사역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여성만이 가진 섬세한 기질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길을 열어놓는 것이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27. 전통교회건축 양식에서 새로운 교회 건축양식으로 전환하라
감히 의자에 앉아 예배를…
교회가 공간이나 구조물을 조정한다는 것은 때로는 보수와 혁신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목회자의 소신과 철학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내가 섬기는 연동교회에는 소예배실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주로 학생들이 예배처로 사용하는 방이며 평일에도 많지 않은 수가 모일 때는 가장 적절한 크기의 방이다. 이 예배실을 작년 여름에 새롭게 내장했다. 별로 크지 않은 방을 새롭게 꾸미는 데 6,000만 원 이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꾸몄다.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배려를 해 준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쓰는 방을 최고로 꾸며 주고 싶었다.
평소에 나는, 교회가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본당은 최고로 잘 꾸며놓고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교육관은 적당히 꾸며놓는 데 불만이 있었다. 본당은 겨울에는 난방이 되어 있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어 있지만, 교육관은 겨울에는 냉방이 되어 있고 여름에는 난방이 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교육관 분위기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예배의 모범을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예배실을 꾸미는 데는 교회의 예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예상외로 많은 교인들이 협조하여 예쁘게 단장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천장은 평면이 아니라 각을 지게 하였고 등은 길쭉한 형광등이 아니라 동그란 백열등으로 간접 조명으로 꾸몄다. 강단에는 전동 스크린을 달고 천장에는 고급 액정비전을 달아 언제든지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했다. 연극 등 공연 시에 필요한 무대 막을 만들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도록 창문 뒤에 숨겨놓았다.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다음 첫 번째로 맞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떤 아이가 내게 달려와 팔에 매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참 좋아요. 카페 같아요.” 아이들이 좋다는 것은 예배당이 예배당 같아서가 아니라 카페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분위기에 맞는 예배실을 원한다. 교회가 자기들의 분위기에 맞는 예배실을 마련해주고 자기들의 정서를 이해해주었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들은 좋아한다.
지나친 엄숙주의
우리나라 교회들의 예배당은 너무 예배당 같은 흠이 있다. 더구나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인 소예배실까지도 너무 예배당 같은 보수성이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사회복지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우선 대지를 확보하고 빠른 시일에 건축 기공을 하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복지관에 꼭 포함되었으면 하는 공간들이 몇 개 있다. 지역주민을 위한 장례식장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고, 환경미화원들의 세탁과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방과 청소년들을 위한 농구장, 청년들을 위한 북카페, 노인들을 위한 노인정, 지방 학생들을 위한 학사, 그리고 언제나 공연이 가능한 작은 극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런 모든 공간들은 너무 단순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아 모든 지역주민이나 교인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기존의 교회 건축물들이 너무 배타적이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들어오기조차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배타성을 없애고 누구나 편히 들어올 수 있고, 복지관에 들어오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경직성보다 들어와서 그저 편안히 쉴 수 있다는 느낌만을 우선 주고 싶다.
그러므로 교회건축은 철저하게 건물 자체보다 먼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 웨어를 개발해야 한다. 같은 공간을 가지고도 다양하고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월등한 시설을 가지고도 프로그램 개발을 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내용이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교회의 건축물은 목회자의 신학이자 목회철학이며 교인들과 지역사회에 주는 메시지이다. 교회가 어떤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는 목회자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우리 교회에는 두 개의 특징적인 공간이 있다. 하나는 역사실(歷史室)이고 다른 하나는 재활용실(再活用室)이다. 사료실은 1894년부터 최근까지의 교회의 모든 역사 자료들을 진열한 방이다. 100여 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하여 도표를 만들어두었고, 그간의 사진, 당회록, 주보, 교인명부 그리고 거쳐간 인물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방은 새신자들이나 주일학교 학생들, 그리고 손님들이 와서 교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방을 만든 이유는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 가운데 하나인 연동교회의 역사를 보존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철학 때문이다.
재활용실은 내가 21세기를 연구하면서 만든 방이다. 미래 사회의 중요한 한 특징은 일회성의 발달인데, 사람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질 것이다. 최근에 와서 자원을 많이 낭비하게 되는 또다른 이유는 주거문화의 변화에 연유한다. 광이 있어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아파트문화가 정착되면서 허드레물건을 넣어둘 공간이 없어지면서 그냥 버리게 된다. 그러나 물건을 쉽게 버리게 되는 미래 현상은 자원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교회가 추구하는 경건과 절제의 운동에 역행한다. 그래서 교회는 절제운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취지에서 우리 교인들의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가정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올때는 빨고 고쳐서 가지고 오는데, 그 물건을 가지고 갈 사람이 바로 쓸 수 있도록 한다.
물건을 가지고 갈 때에는 500원씩 돈을 내게 하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공짜로 갖기를 꺼린다고 해서 적은 돈을 내더라도 사 가지고 가게 한다. 그러면 “싸게 샀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한해 동안 재활용실 운영으로 생기는 수입도 상당한 액수에 이른다. 이 돈은 다시 노인들을 위한 급식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 방은 주일에 가장 붐비고 재미있는 방이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공간들에는 목회자의 철학이 숨어 있고 이 방을 통하여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교회의 모든 공간은 목회자의 철학과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전까지는 교회 예배당이 사람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이제는 예쁜 공간, 편리한 공간,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분위기가 있는 공간을 원한다. 마치 이제는 자동차의 구매욕구가 달린다는 단순 기능이 아니라 디자인과 안전성 등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 십자가 첨탑?
어떤 유형이든 교회 건축에는 목회자의 확고한 신학과 철학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교회의 건축은 건축물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건축물을 통하여 목회자가 교인들에게나 사회인들에게 주고자 하는 목회자의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건축은 교회의 목적도 아니며 교회의 최고의 사명도 아닌데, 마치 교회 건축을 목회의 목적처럼 여기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교회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부동산 투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교회의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크게 확장하고 많은 돈을 들여 건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왜곡된 의도로는 교회 건축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무리한 생각 때문에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전파, 사회봉사, 친교 등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건축에 교회의 전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 건축인데, 지나친 과욕으로 다른 교회에 폐를 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무리하게 교회를 확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의 대지를 구입하거나 건축을 시작한 뒤 감당하지 못하여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교회 건축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편지의 대부분은 “믿음으로 시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이 다른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은 아닐 것이다.
또 지나치게 크게 건축하려는 의도가 자칫 교만으로 변질되기 쉽고 미래적 전망에서 볼 때 보존과 관리가 더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자체 건물 보존에 지나치게 많은 경비를 소모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건축은 건축 자체보다는 지속적인 보존과 사용가치가 더 중요한 문제로 고려되어야 한다. 서구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가 이제는 하나의 관광지로 변하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구경하는 관광자원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 건축은 합리적으로
그러므로 최대 혹은 최고라고 명예심이나 허영심보다 작지만 아름답고 교회에 적합한 규모로 내실있게 건축하는 것이 실리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래서 교회의 공간이 웅장함보다는 친밀감을, 소비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건축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교회 건축이 목회자 자신의 명예심 때문이 아닌지를 스스로 확인해보아야 한다. 교회 건축은 목회자에게 힘든 사역이지만 교회 건축을 완성한 다음에 느끼는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목회자의 명예심은 총회장이나 노회장이라는 소위 감투를 쓰는 지위에서 만족되는 줄 알았는데, 목회 현장에서 체감되는 명예심은 그뿐만 아니라 “내가 시무할 동안 교회를 건축했다.”라는 자부심도 극복하기 힘든 명예심이었다.
교회 건축은 개인의 명예나 공동체의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성이 고려되어야 하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너무 빨리 짓고 너무 빨리 부순다. 건축 기공에서 헌당까지가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졸속한 건축이 되기 쉽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건축물보다 교회에 와서는 불편하더라도 참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강요하여 다른 공공건물보다 불편하게 만들고, 조금만 교인이 많아지고 더 좋은 교회 건물을 보게 되면 깊이 고려하지 않고 헐고 다시 짓는다. 그 결과 역사가 오랜 교회의 건물 가운데 정동감리교회와 같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 그리 많지 못하다. 구미의 교회들이 장기간에 걸쳐 교회를 건축하고 동시에 수백 년 동안 그 건물이 보존되고 사용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교회의 건축은 상대적으로 졸속한 편이다. 교회의 건축은 좀더 장기적인 목회 계획에서 원칙이 있어야 하며, 교인이 조금 증가했다고 해서 쉽게 재건축을 위하여 해체하지 말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교회 건축의 장기적 종합 계획의 원칙은 현실적 필요의 충족보다는 교회의 본질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며, 사회변동에 따른 목회자의 목회철학의 반영이며, 건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성의 회복이다.
교회 공간은 제한적으로 활용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당이라고 부르는 예배실은 예배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부속 공간들이 어린이들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고 연극 등의 공연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당만은 예외인 경우도 많다. 주일 오전에만 사용되는 공간들은 융통성 있게 주간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도 공간의 효율적 사용과 융통성에 중요하다. 나아가서 장기적 종합 건축 계획은 지역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회 공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존재가치가 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일 때에 사회는 교회에 대하여 포괄적일 수 있다. 교회가 평소에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이지 못하면 교회가 건축을 할 때나 교회가 사회를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자 할 때에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협조적일 수 있다. 교회가 건축을 할 때에 지역주민들의 방해를 받는 경우를 허다하게 목격하는데, 이는 평소에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이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건축의 장기적 종합 계획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교회는 이 땅에 거대한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다.
28. 만족하는 교회에서 감동하는 교회로 전환하라
침체의 원인은 안에 있다
교회성장연구소의 명성훈 박사는 나와의 대담 프로에서 미래와 미래 목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래(FUTURE)는 안개와 같이 모호하며(Fog), 도시화현상이 극대화되며 (Urbanization), 기술이 발달하고(Technology), 연합운동이 강조되며 (Unity), 종교가 발달하며(Religion), 경제가 발달하게 된다(Economy), 그는 또한 미래목회도 ‘FUTURE'라는 단어를 통하여 재미있는 목회가 되어야 하며(Fun),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Understanding), 다양한 재능을 요구하며(Talent), 유용하고(Useful), 새로운 부흥(Renewal, Revival)과 탁월함(Excellency)이 요구된다고 했다.
지난 ’97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역대 최고 히트 상품들을 발표했다. 12명의 상품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상품이 기업과 소비자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점수로 환산해 한국의 역대 최고의 히트 상품을 조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350만 장이 팔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이 최고 히트 상품으로 조사되었다. 2위는 글, 3위는 박카스 드링크, 4위는 럭키 하이타이, 5위는 새우깡, 6위는 칠성사이다. 7위는 연속극 모래시계, 8위는 이명래 고약, 9위는 초코파이, 10위는 하이트 맥주였다. 이들 상품들은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 상품들이며 기업과 소비자의 호흡이 가장 잘 맞는 상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경제 평론가들은 이들 상품이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고객에게 감동을 준 상품들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고객 감동의 전략이 고객에게 상품을 오래 기억하게 하고 상품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
한국 사람들은 주로 기업의 주인을 기업주로 생각하여 회장을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기업주가 아니라 고객이라고 한다. 여기에 우리와 일본의 경영의 차이가 있다.
오래 전 물자의 절대수요가 모자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품은 만들어 내놓기만 하면 팔렸다. 그러나 이제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품질이며, 품질 또한 얼마나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가 하는 문제에서 고객을 얼마나 감동시키는가 하는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 부족하던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경영난에 빠지게 되어 끝내는 도산하게 된다.
매력적인 교회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고객인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 교인들은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동을 줄 만한 것이 사회에,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즐비한 아이디어 상품들과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제 신상품들 때문에 교인들에겐 교회가 아니더라도 감동과 자극을 받을 곳이 얼마든지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존의 목회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대체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목회자의 노력이 있을 때 교인들은 만족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감동의 차원으로까지 영적 수준이 성장한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쟁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하다. 첫째, 성직자에서 교인으로 교회의 중심 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인이 외면하는 설교나 교회의 프로그램을 지양해야 한다. 둘째,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목표를 한국 최고에서 세계 최고, 한국에 영향을 주는 교회에서 세계에 영향을 주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목표나 경쟁의 수단이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크기(size)에서 가치(value)로 바뀌어야 한다. 넷째, 기업에서 일회성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듯이 교인을 일회성 교인에서 평생 교인으로, 한 세대(single-generation)의 교인에서 다세대(multi-generation)의 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만족시킨다
고객의 만족은 이전에는 기능적 만족이었다. 예를 들면 이전의 자동차의 문이 잘 닫히느냐 잘 닫히지 않느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동차가 달릴 때에 문이 열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기능적 만족이었지만 요즘은 이런 기능적 만족이 아니라 문이 닫힐 때에 고객의 느낌 즉 감동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문이 닫힐 때에 손끝의 감각이 고객을 감동시키고 품질관리에 중요하다. 독일의 포르쉐(Porsche) 자동차의 문 여닫는 소리는 세계 시장에서 유명한 고객만족의 사례이다.
따라서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제품의 품질은 제품의 디자인에서부터 제조과정, 전달과정, 애프터서비스까지 총체적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품질은 생산현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다. 미국의 모토롤라(Motorola) 회사는 철저한 품질관리로 유명하다. 이 회사에서는 생산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조직 내의 전 공정, 디자인, 구매, 기술개발, 생산, 판매, 마케팅, 교육훈련까지도 품질관리의 대상으로 삼았고 통계적 관리기법을 통하여 품질을 관리했다. 동시에 회사에서는 단순히 품질관리를 운동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품질 정보 시스템(Quality Information System)을 통하여 품질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 판단,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품질 불량의 요인을 제거하고 품질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하여 모토롤라는 10년 동안 9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였고 생산공정의 결함을 99.6퍼센트 제거하였고 근로 생산성도 약200퍼센트 향상했다. 품질은 기업의 생명이며 품질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생존해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업은 품질향상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또한 고품질은 결과적으로 저비용이며 판매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생산자는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고객을 만족 시켜주어야 하며 나아가서 위에서 말한 대로 고객의 느낌에 감동을 주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기업의 생존방식의 변화는 교회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교회도 이제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주는가 하는 생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의 교회와 같이 문만 열면 교인들이 몰려들고 한 마디만 하면 새신자들이 등록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존의 교인들도 새로운 고품질의 설교를 원하고 신선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개발은 결국 최고의 경영자인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고 목회자의 의식전환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고객이 기업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성 마리안나병원은 서비스 업종으로서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아픈 사람을 고쳐준다는 일방적 제공자의 입장에서 냉정한 자세로 고객인 환자를 대하기 쉽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편한 환자가 앉아 있어야 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강한 직원은 서야 하는데 병원은 반대가 되어 환자는 서 있고 직원은 앉아 있다. 이런 상식을 이 병원은 바꾸어주었다. 5퍼센트의 개선이 50퍼센트의 혁신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기존의 틀을 그대로 두고 바꾼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 병원은 이러한 기존의 틀을 깨트려 환자들을 접수실에 앉게 하고 직원들이 서서 접수를 받게 했다. 이 외에도 병원 실내의 모든 문턱을 없애고 복도의 넓이를 두 대의 침대가 스치지 않게 지나가게 만들었고 환자용 전화의 높이를 환자의 상태에 따라 조절하게 하는 등 고객 만족의 차원에서 개선했다.
목회자가 나서서 만족시켜라
이렇게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최고경영자가 이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최고경영자의 의지는 전 사원에게 전달되어 전사적인 고객 만족의 분위기로 번지게 될 것이고 실제로 고객은 만족하게 된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교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의지가 있어야 하며 전 교인이 이에 함께 참여하게 될 때에 전사적 만족에서 감동으로 전환된다. 우선은 내부 고객인 기성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주어야 하며 이러한 내부 고객의 만족은 결국 외부 고객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자연히 만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최대한 편리하고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만족할 수 있는 물질 영적 공급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족을 줄 수 없다면 감동도 줄 수 없다.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감동은 준다는 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감동이 없어지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으로 변했다.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감동이 필요하며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을 원하게 된다. 교회행정학에서는 목사를 ‘전문 관리인’(professional manager)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전문 관리인이므로 교인이 생각하고 제안하기 전에 교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목회자가 교회와 교인의 전문 관리인이라면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관리적인 측면에서 만족을 주는 목회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감동시키는 목회를 해야 한다.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 현대인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한다. 기독교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감동하지 않을 것 같은 교인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하고 이런 감동의 원천은 모든 교인들에게 동일하다. 감동이 있는 교인이 생동하고 생동하는 교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순간순간 교인을 감동시키는 감동자가 되어야 하며 감동이 있는 교회가 감격시대를 살게 된다.
29. 한국교회에서 세계교회로 전환하라
새로운 대양(大洋) 시대
이미 세계는 환태평양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500년 전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대서양 중심의 세계 정치와 경제는 태평양 중심으로 옮겨졌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가 큰 바다와 연해 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와 연해 있는 거대한 대륙인 것이다. 대서양 중심의 시대일 때 미국은 동부가 발달했다. 그래서 미국 동부는 학문이 발달하고 유럽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고, 서부에는 전통보다 캐주얼한 의식을 가진 다민족이 밀집되어 있다. 그런데 대서양 시대에는 동부가 발달하고 흥왕했지만, 그 기운이 서서히 서부로 이동되고 있다. 이는 태평양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다. 미국은 대서양에는 뉴욕, 태평양에는 로스앤젤레스라는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데, ’95년 4월 이전에는 뉴욕이 가장 교역량이 많은 항구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로스앤젤레스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서양 시대에서 태평양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다.
세계의 역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긴 역사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고대의 그리스와 중세의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역사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그러나 근세로 옮겨가면서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이 되었다.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니아, 영국 그리고 대서양 반대편의 미국이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가 되어 수백 년 동안 세계 역사를 이끌어 왔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세계 역사의 중심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되고 있다.
혹자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증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설명한다. “세계는 반도국가와 섬나라, 대륙국가가 순회하면서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대륙국가인 바벨론과 바사가 세계를 정복한 이후, 반도국가인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다. 섬나라인 영국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다시 대륙국가인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 대륙국가 다음에 세계를 지배할 나라는 반도국가인데, 이 반도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태평양 시대 그리고 동북아시아 시대의 반도국가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은 21세기에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한다.”
토플러는 “미래의 세계는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이 지배하게 된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미래 산업이라고 하는 나노 기술(Nanotechnology)은 작게 만드는 기술이기 때문에 섬세한 손을 가진 민족이 유리하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미래 기술은 작게 만드는 기술인 것을 알 수 있다. 기계는 점점 작아지면서 기능은 다양해진다. 이미 손목시계에 팩스와 전화의 기능을 넣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컴퓨터의 기능을 가진 핸드폰도 만들어졌다. 탄소 반도체의 개발로 컴퓨터도 작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기계가 작은 것으로 변한다. 이런 나노기술은 손이 작고 손기술이 발달한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우리나라는 손이 발달한 민족으로 꼽힌다.
미래학자들이 한결같이 21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가리킨다. 이 세 나라는 전통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인데, 젓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세 나라 가운데 가장 긴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은 한국인이다. 우리는 긴 젓가락을 사용할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이 갖지 않은 쇠젓가락도 사용하며, 소풍 가서 젓가락이 없어도 나뭇가지 둘만 있으면 식사를 해결할 만큼 손이 발달한 민족이다.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손이 모자란다”, “손 좀 빌려야겠다”, “그 일에 손 뗐다” . “손 쓸 겨를도 없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손 위의 사람, 손아래 사람”등 손이란 단어를 넣어 표현하는 말이 풍성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만져보려 한다. 예로부터 포목상에는 만져볼 수 있는 옷감을 따로 준비할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만져봐야 산다. 수박을 살때도 손으로 두드려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며, 손이 지나치게 발달하다보니 몇 마디 말을 하다 안되면 서로 멱살을 쥐고 주먹질을 한다. 우리 민족은 입보다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대화보다 손이 앞서는 민족인 것이다.
우리에게 온 기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미래적 현상과 세계사적 흐름을 보면, 한국은 미래에 세계의 중심으로 주목받을 만한 여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21세기에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중심 국가가 될 여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때에 세계의 중심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한국만의 교회가 아니라 세계교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세계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를 배워야 한다. 역사는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는 교과서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를 배워야 하며 특히 유럽교회의 번성과 쇠퇴, 그리고 많은 미국의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와 더불어 성장하는 미국교회들의 사례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세계화’란 영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변천을 아는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이므로 세계교회의 하나로서 한국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세계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세계를 보는 감각을 길러주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셋째,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채무자의 의식으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교회들로부터 복음을 받았고 신문화와 신기술을 전수받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우리가 받은 대로 다른 나라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를 배출하여 세계 복음화에 공헌하는 것도 중요하며, 학문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빚진 자로서 중요한 일이다. 요즘 서양의 선교사들이 많은 나라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계 선교에 공헌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다. 더구나 한국의 여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거의 없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세계화 시대를 세계 선교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넷째, 교회의 세계화가 국가의 세계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세계화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쉬운 것은 그동안 교회가 세계화 흐름에 가장 뒤져 왔다는 점이다. 이미 사회는 세계화를 준비하고 무한 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그 행보가 느리다. 과거에 한국의 근대화를 교회가 주도하였고 교회가 가장 먼저 개화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금 교회가 사회의 세계화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초연구의 빈약상
11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서 인정을 만한 좋은 교회와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세계적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한국교회가 상대적으로 세계적 신학자는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이제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신학은 세계적 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교리적이고 교파 지향적인 종래의 신학 교육은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칼 지향적인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 성경적. 역사적 지향성의 종래의 신학 교육은 성경적. 상황적 지향성의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성경적. 본문비평적 분석의 종래의 신학 교육은 사회. 인류학적 분석의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한국 신학이 세계화에 공헌할 수 있는 여건은 서양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위에서 서술한 대로 성경은 히브리적 관습에서 기록되었으며 히브리적 사유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동양적 생활습관에 익숙한 우리가 서양 사람들보다 성경해석이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최근에는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이 발달하면서 헬라적 사유보다 히브리적 사유에 가까운 우리가 성경해석에 유리하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했었다.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을 전공한 교수는 성경을 인류학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나 성경공부에 많은 유익이 되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그 교수가 갑자기 “나는 왜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동양에는 주소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적이고 다른 하나는 현주소입니다. 요셉의 본적지는 베들레헴이고 현주소는 나사렛입니다. 동양에서는 호적은 반드시 본적지에서 합니다 요셉은 호적을 하기 위하여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간 것입니다.” 그때 교수님은 그런 게 있었느냐며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셨다. 서양인들은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적지로 간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수업시간에는 ‘탕자의 비유’를 문화인류학적인 시각에서 해석해주었다. 탕자의 비유에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 버릇이 없어졌고 이기적이 되어 자신의 분깃을 가지고 나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들에게 유산을 주지 않는다. 당시 분깃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가시라고 하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분깃을 주는 일은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일이 아니라 어머니의 일이다. 아들이 다른 도시에서 방탕하게 살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리 돌아오는 아들이 반가워도 뛰어나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지는 않는다. 반갑지만 오히려 화난 척하면서 안방에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이 동양적인 아버지상이다. 그리고 당신의 관습으로는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어머니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어머니이며 이는 하나님의모성애를 상징하는 비유이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목회를 세계화할 수 있는 다양한 요인들을 개발하여 세계화 시대에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세계화는 요란스럽고 거창한 작업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며 작아보이지만 큰 과제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라는 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개념을 넓혀 세계가 우리이며 세계인이 우리인 것을 알고 세계 속의 한국, 세계교회 안의 한국교회를 창출해나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30. 분단시대의 교회에서 통일시대의 교회로 전환하라
사람의 분열, 하나님의 통일
통일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선교적 과제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분명히 통일은 불시에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교회가 준비하여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 이후 혼란을 극소화해야 한다. 교회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통일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우선 통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손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22)고 증거하고,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엡2:14-16)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정치적 이념이나 국제적 여론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통일은 신앙 운동이다. 성경은 철저하게 애국과 신앙을 일치시킨다. 우리나라의 통일운동이나 북한돕기운동에 투신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다. 환경운동에 몸을 바치며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환경운동도 사회운동이 아니라 신앙운동이다. 사회학적 접근이나 인류학적 접근은 한계가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는”(창1:28) 권리와 사명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속적으로 환경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환경운동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더 잘할 수 있다. 또 실제로 이런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의 8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다.
통일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선교적 사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특징은 사고는 집합적인데 실생활은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집합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에는 ‘나’라는 일인칭 단수보다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조금만 관련이 있어도 곧잘 ‘회’를 조직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비롯하여 화수회, 종친회, 각종 계 모임, 재향군인회 등의 동질형 집단들이 많이 생겨나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와 같은 구호도 만들어진다. 나와 조금만 관련되면 한없이 관대하고 나와 관련되지 않으면 한없이 인색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을 감추기 위해, 통일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 통일을 강조한다. 가령 여러 명이 음식점에 갔을 때도 처음 주문하는 사람의 주문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첫사람이 설렁탕을 주문하면 둘째 사람은 “통일!”을 외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권도 없이 통일된 메뉴에 따라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통일은 통일이 되지 않기 때문에 통일을 위장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한민족은 하나라는 당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의 장애요소는 많다. 최근 신세대들의 통일관은 기성세대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인 월드리서치가 ’97년 6월에 조사 발표한 청소년의 통일관을 보면,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34퍼센트에 불고했으며 가능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는 응답자가 41퍼센트였다. 반면에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응답자가 10.4퍼센트, 통일되는 것이 싫다는 응답자도 14.6퍼센트나 되었다. 이러한 응답은 분단 반세기가 가까워지면서 분단시대의 신세대들이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기성세대와 통일에 대한 견해차가 뚜렷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소년들은 또 북한 주민을 동포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9퍼센트가 긍정적인 응답을, 21퍼센트가 부정적인 응답을 했다. 이들 중 북한동포돕기 모금활동에 용돈을 모아 성금을 낼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는 58.5퍼센트였고, 의향이 없다는 대답도 41.5퍼센트로 상당히 높게 집계되었다. 성금을 내지 않겠다는 응답자들은 39.8퍼센트가 용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개인주의적인 신세대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 리서치의 응답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일본을, 두 번째로는 북한을 꼽았다. 신세대들의 이러한 통일관은 우리나라의 통일교육에 허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고가 결국 북한동포돕기에도 장애가 되고 나아가서 현재와 같은 분단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요원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한다. 그래서 통일 이후에 예상되는 여러 가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빠를수록 좋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는 ‘소원’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통일 연습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우선 가난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남한의 10.3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던 우리가 통일이 되면 다시 6천 달러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IMF 위기 이후 이미 한국은 6천 달러 시대로 되돌아가 있는 상황이어서 현실적으로 통일은 남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런 과다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으면서 안일하게 통일만 외쳐대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헨켈 독일경제인 연합회장은 한국의 통일비용은 사회간접자본 부분에만 약1천 3백80억 마르크(약70조원)가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또 현재의 북한의 생산성을 남한의 40퍼센트 선까지 끌어올리는 데만도 2백 50조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통일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 비용이 분단 비용보다 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남북 평화통일의 전위(前衛)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먼저 화해의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성경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을 보여준다. 인간적으로 에서는 야곱을 용서할 수 없고 만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만나게 된다. 에베소서1:10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하나님의 일이며 통일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통일을 위해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가난해지는 연습이다.
셋째, 교회의 일관된 대북 정책이 필요한 때이다.
교회의 북한에 대한 정책의 최종 목적은 ‘남북 통일을 통한 북한의 복음화’이다. 우리와 서방이 지원하는 식량이 군량미로 쓰인다는 의혹도 있고, 돕지 않아야 북한의 붕괴를 앞당긴다고도 하고, 북한의 군비를 축소하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이 얼마든지 먹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북한 동포들의 기근 가운데 있고 우리는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 교회는 통일에 앞서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증가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해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기득권 포기
여섯째, 교회는 통일 이후 시대를 대비하여 북한의 교회를 재건할 재원과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이제는 교단과 교파가 새로운 경쟁체제로 돌이비하여 또다시 소모적인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를 재건할 수 있도록 연합정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북한에 가서 다시 또 이전과 같은 교파간의 경쟁과 분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북한교회 재건은 통일을 위한 1차적 업무가 아니라 2차적 업무라는 것이다.
일곱째, 북한의 기근과 각종 질환에 대해 교회는 적절한 구호에 앞장서야 한다.
여덟째, 통일 후를 겨냥한 교회의 연합된 정책이 필요하다.
아홉째, 교회는 통일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열째, 교회는 통일 이후에 발생할 갖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97년 4월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인구는 2천 백만 명에 이른다. 이 인구는 우리의 미래 목회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21세기에 통일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분단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속히 벗어나 통일시대의 교회 모습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각 신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한 목사 후보생들의 수가 많아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통일 한국 시대를 내다보시고 양육하신 일군들임을 알게 된다. 이제는 신학교 재학생들과 목사 후보생들도 분단시대의 목회자가 아니라 통일시대의 목회자로 양육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