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게 하는 마귀의 방해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게 하는 마귀의 방해
- 이다윗 목사
하나님의 영광체험을 하게 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다른 은사에 비해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사탄 때문입니다. 나는 사단의 이러한 방해공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방해 때문에 여러 차례 영광체험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사단의 방해는 여전합니다.
처음 사단의 방해를 체험할 때는 그것이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정결하고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언약궤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사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단은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언약궤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때 하나님과의 가장 긴밀하고도 영광스러운 경험을 체험하셨습니다. 이른 바 하나님의 영광체험을 경험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곳에 사단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단의 유혹을 당하셨는데 우리라고 어찌 그 유혹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사단의 방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죄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께서도 계시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없습니다. 죄는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두 가지 사망이 한꺼번에 닥쳐왔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사망이며 또 하나는 영적인 사망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사망에서 헤매도록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죄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요일 3:8) 마귀는 죄를 이 세상으로 불러 드린 장본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육신의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것들을 탐하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세상의 정욕에 관한 대표적인 죄는 음란입니다. 그외에도 많은 육적인 죄가 있겠지만 음란은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가족을 죽이고 가정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음란을 제외한 모든 죄는 몸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음란은 몸에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심각한지 아십니까? 몸에게 죄를 범한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에 더러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음란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철저히 배격하는 행위입니다. 신성한 창조능력과 어긋난 모든 음란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라 할지라도 세상적인 추악한 방법의 성행위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음란을 행하면 우상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음란을 행하면 바람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음란을 행하면 도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음란을 행하면 술과 마약으로 몸을 망칠 것입니다. 생각에 음란을 행하면 저는 인본주의자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음란은 하나님과 관계를 철저히 파멸하는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음란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더 높게 여기는 우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우상이 당신 마음에 들어오면 당신의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우상이 당신 가정에 들어오면 당신 가정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우상이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우상이 나라에 들어오면 나라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제일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음란입니다. 마귀는 음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2. 세상일에 분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분주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분주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분주한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누가는 마르다를 가리켜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눅 10:40)고 언급했습니다. 마르다가 분주할 때 마르다 동생 마리아는 분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차분히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를 도와 주지 않는 동생을 향해 예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1~42)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쁘다고 말한 사람은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바뻐도 바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여유가 있습니다. 영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 육신의 귀로 들리는 소리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싫던 좋든 우리의 영과 혼은 육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의 육체를 조정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라디오의 채널과 같습니다. 일정한 주파수를 맞추면 원하는 채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주파수를 잡아야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영적인 소리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육신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덤벼들면 절대 못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한계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육체적 한계를 이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반드시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러면 들리게 됩니다.
육체의 귀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의 귀가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무슨 소리가 들리지요? 아마도 그 소리는 당신의 육체의 귀가 듣는 소리일 것입니다. 이제 잠시 책을 덮고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육체의 귀가 그 어떠한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조용히 앉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처음엔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작고 미세한 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냉장고 모토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지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당신의 귀가 발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의 귀는 육체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단계를 지속하면 머지않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평안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당신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평안입니다. 이제 거의 다 된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 소리는 환청이 아닙니다. 공허한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미세하고도 강합니다. 당신이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게 될 때에 당신은 놀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당신의 모든 마음을 사로 잡을 만큼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경험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줄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이사벨의 위협을 피해 사십주 사십야를 여행하며 호렙산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으로 전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마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둘째, 마음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마귀의 방해공작은 마음으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인간의 혼(mind)의 영역입니다.
마음의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선입견에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당신의 선입견을 사용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어렸을 떼의 일입니다. 부모를 떠나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기거했을 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지만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소리가 마치 엘리 대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줄 알았습니다. 선입견이 들어간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엘리 대제사장 밖에 없다는 사무엘의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입니다.
사무엘은 똑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엘리 대제사장이 사무엘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니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이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선입견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세상적인 것에 고정시켜 버립니다.
영성훈련을 인도하다 보면 성령님께서 “저 사람은 이미 나의 음성을 듣고 있느니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엔 성령님의 음성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해서 입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성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자신의 소리같기도 하고 환청같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엘리 선지자의 음성으로 알았듯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한번 지나가면 나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는 더 어렵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고정관념이 강하게 자리잡혀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직접 1:1 영성훈련이 필요합니다. 전화로도 가능하지만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훈련하면 훨씬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해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영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소리와 구분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물론 사단의 소리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혼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영성훈련에 참여해서 음성을 듣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2. 조급한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여유가 없는 사람은 조급한 사람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조급함을 갖게 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조급한 사람은 항상 육의 기도에서 머뭅니다. 늘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하고 서둘러 떠나는 사람입니다. 조급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성격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알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조금만 늦게 말하거나 지체하더라도 참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입에선 늘 “빨리빨리”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여유 있는 사람은 늘 정리된 삶을 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합니다. 물론 기도 역시 더 깊은 수준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유언의 말을 남길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레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네페쉬)으로 산란케 하시리니”(신 28:65)
조급한 사람은 ‘마음으로 떨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조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갈 때 조급한 마음은 없어지고 평안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조급한 사람은 늘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함이 없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사역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조급한 사람은 사랑을 보이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해서 빠르게 판단합니다. 조급한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3. 악한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악한 마음 역시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물론 누군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겠죠.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사람으로 예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눅 22:3)
예수님의 12제자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12제자 덕분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전했고 제자를 잘 삼고 양육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했을 때 예수님을 좇아 다녔던 사람은 대충 1만 명에서 2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 숫자는 이스라엘 성인들의 숫자였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나이든 사람은 그 수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이렇게 표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관례였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도 60만이라고(출 12:37) 기록했을 때에도 장정 수만 기록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인구를 대략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12명을 선택한 것은 굉장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로마정권을 누르시고 새로운 이스라엘 정권을 세울 왕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2제자 중에서 이러한 마음을 먹고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싸웠던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싸움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인해 빚어졌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가룟유다 역시 예수님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재정을 맡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좇다 보니 헌금도 제법 모였을 것입니다. 또한 12명이 사역을 하려면 재정지출도 복잡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재정을 담당한 장로는 믿음과 정직과 신용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그만 돈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도요한은 가룟유다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고 말했습니다.
어떤 교회의 재정 담당 장로는 교회 행사를 위해 사용되는 떡을 위해 일정한 돈을 받고서 특정한 떡집과 계약을 맺는다고 합니다. 교회 건물을 건축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건축회사가 연관될 때 그들을 통해 얻게 되는 수입은 가룟유다의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악한 마음입니다. 가룟유다만 예수님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사악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팔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4. 듣겠다는 위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사모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의지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것은 사모함입니다. 의지가 아닙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지는 사모함과 다릅니다. 의지에는 인간의 야망이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그 의지를 가지고 언젠가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모하는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모함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성령사역자를 훈련시킬 때 그 사람의 성격을 먼저 살펴봅니다. 그 사람이 의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모함이 있는 것인지 살펴봅니다. 사모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령사역자가 되려고 하지만, 의지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성령사역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성령사역자를 훈련시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이미 하나남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안간힘을 다해 열심히 영의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듣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보다는 사모함입니다. 의지는 인간의 혼(mind)에 국한 된 것이지만 사모함은 영(sprit)에 국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혼적인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육적인 욕망은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혼적인 야망은 지정의(지식, 감정,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육과 혼을 완전히 버려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셋째로, 영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가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직통 전화가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도함에 있어 전화로 통화하는 정도의 수준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전화로 통화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더 좋은 것은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에 계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신을 벗어야만 했습니다(출 3:5). 여호수아 역시 모세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우리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거룩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실 때 영적예배가 무엇인지 말해주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영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의 모든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도 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하면서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 영적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영의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제일 싫어하십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재물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되고 더 사랑하고 더 많은 헌신을 하게 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충격적인 음성은 들을지 몰라도 사랑스러운 대화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산만한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산만하게 만들어서 영의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의 기도를 하게 되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묵상하게 되는데 마귀는 이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산만함을 줍니다. 산만한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보다 깊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선 집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산만함은 그러한 집중을 흩어 버립니다. 원래 <산만>이라는 단어는 <집중부족>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영의 기도를 하는 도중 얼마나 자주 산만함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지 모릅니다. 한참 집중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 않던 옛날 일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마귀가 가져다 주는 산만함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산만한 생각이 찾아올 때 그것이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곤 했습니다.
자녀문제, 재정문제, 건강문제 등 여러 가지 세상적인 걱정거리가 머리를 뱅뱅 돕니다. 이런 세상의 것들이 우리 영 가운데 임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사탄 중 어느 것 한 가지만을 선택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잡생각이 들어와 산만하고 분주한 마음이 들게 되면 이것은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며 사탄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산만한 생각은 여전히 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만한 생각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최대한 듣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24시간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성령님의 음성은 라디오 채널과도 같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항상 그 채널을 고정해야 합니다. 나는 그 채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면 당신에게도 채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부분일수도 있고 어떤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개인의 고유한 성격과 생김새를 가지고 있듯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조금씩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성령님의 음성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소리라는 것이입니다.
3. 전통적인 형식과 방법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 시대 때도 사람들의 진실되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나 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사야의 말(사 29:13)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날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은 똑 같은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는 말은 전통을 말합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에 의해 사람들이 잘못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형식과 방법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며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전통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전통이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사람들이 가르쳐온 것으로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를 원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4. 불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불순종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불순종했고 그로 인해 저에게 악신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불순종하는 삶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열심히 성경을 읽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불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불순종이라는 것이 어느정도로 심각한 죄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배반하는 행위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순종이냐 불순종이냐로 나눠집니다. 나는 굉장히 기분이 나쁜 적이 있었는데, 열심히 친구에게 조언을 해 주었더니 친구녀석이 결국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봤을 때였습니다. 몇 번 그런 경험을 당하고 나니 그 친구에게는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결국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때 이런 저런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성령님의 뜻을 전해 듣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말에 대해 전적인 순종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는 나의 아내가 아니고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으시고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물론 나의 생각이나 의사가 표현되지 않은체 무작정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요즘 아내가 남편의 말에 무작정 복종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듯이, 성령님께서도 무작정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과 대화를 나눠 보면 자연스럽게 그 말씀이 모두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이 내 속에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무엇보다 순종을 먼저 배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교만함이 사라지고 겸손함이 우러 나옵니다. 불순종과 순종의 차이는 그 간격이 너무나 크고 넓어서 크나큰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마치 다윗과 사울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