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자료 모음 ]
이름: 고바울목사님
2000/11/21(화) 08:26 (MSIE5.5,Windows98) 211.104.209.245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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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유년시절…교회는 ‘마음의 안식처’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①] 가난했던 유년시절…교회는 ‘마음의 안식처’
◇ 고바울 목사 <공주국제금식기도원장>
기도원을 운영하며 계룡산 우상의 땅을 복음의 땅으로 일구는데 전념하고 있는 나는 지난 42년 충남 공주 옥룡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지금은 늘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 기억은 해맑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에 이어 8세 때 병환으로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어린 가슴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어머니는 내가 4세 때 세상을 떠나 슬프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병환으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는 당시 6남매 중 막내인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과일을 사들고 오면 다른 사람은 손을 못 대게 하고 “막내야 많이 먹어라”고 말씀하셨다.
두 손에 사과를 들고 또 겨드랑이에 사과를 끼워 집밖으로 나가 놀던 추억이 생생하다.그렇게 막내를 사랑해주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형,누나들은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저 멀리 가서 놀다가 오라며 손에 용돈을 꼭 쥐어주었던 기억도 난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 가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소천하시자 더욱 어려움에 빠졌다.형과 누나들은 제각각 자기 앞길을 개척하느라 막내를 돌봐 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교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차를 몰고 나타난 선교사님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7세되던 해 선교사님은 공주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를 시작하셨는데 그분이 타고 다니시는 차를 구경하려고 선교사님이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보통 30∼40명이 몰려들었다.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면 선교사님은 차 트렁크에서 껌과 초콜릿,통조림 등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
선교사님은 먹을 것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고는 하셨다.“하나님께서 인간과 흙,돌,산,물 등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여러분,하나님을 믿으시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나는 선교사님들이 닭고기를 먹을 때 살점이 붙어있는 뼈를 그대로 버리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해 놀란 적이 있다.우리는 당시 살점을 싹 먹어치운 뒤 다시 그 뼈다귀로 국을 끓여 먹었으니 참으로 가난한 시대였다.
선교사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소와 돼지,양,닭 등을 많이 길러야 잘 살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구하면 주십니다.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부지런히 일해 가난을 떨쳐버립시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하루는 너무나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밤 12시쯤 모두들 잠든 사이에 김장김치를 꺼내 먹으려고 방문을 조심조심 열고 밖으로 나갔다.땅 속에 묻어둔 김칫독을 열어 김치를 꺼내려고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 깊이 손을 넣었다.결국 밑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김치를 꺼내려다 김칫독에 몸이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형님이 새벽에 화장실 가다 추위에 떨며 신음하는 나를 발견하고 건져냈다.먹을 것이 많은 시대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이같은 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김규원기자 gwkim@kmib.co.kr - 국민일보 미션투데이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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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자료 모음 ]
이름: 고바울목사님
2000/11/22(수) 10:30 (MSIE5.5,Windows98) 211.104.209.245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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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서 첫 시련…양복기술 배우러 상경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②] 축산서 첫 시련…양복기술 배우러 상경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됐지만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어렸지만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고 억울해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방에서 하염없이 울고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다.교회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돌보심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주일학교 박인규 선생님은 용기를 잃지 말라면서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뿐만 아니라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 목욕도 시켜주시고 머리도 깎아주셨다.옷과 신발도 교회에서 얻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렇게 성장한 나는 14세 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친구들은 부모,형제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그럼 무엇을 해 돈을 벌어야 할까.선교사님의 말씀대로 가축을 길러보자’
이렇게 결심한 뒤 남의 집 농삿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닭과 토끼,돼지,염소 등을 한마리씩 사기 시작했다.자재를 살 형편이 못돼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고 공사장에서 철사를 주워와 조그맣게 축사를 지었다.
이렇게 시작한 가축사육은 번창해 3년만에 닭은 100마리,돼지는 10마리나 됐다.토끼와 염소도 그 수가 늘어갔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공주 일대에 전염병이 나돌아 가축이 몰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연단이 시작된 것이다.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주여,너무 하십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망과 애원이 뒤섞인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길을 열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선배 한 분이 양복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일러줬다.귀가 솔깃했다.왜냐하면 공주읍내에서 양복점 하는 집이 농사꾼보다 훨씬 잘 살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구나.그래 양복기술을 배워 우리 가정을 일으켜세우는 거야.최고의 기술자가 돼 떵떵거리며 살려면 서울로 올라가 유명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워야 해’
부푼 꿈을 안고 상경했다.당시 양복기술자들은 동대문에서 일을 배워 종로나 명동,소공동으로 진출하는 코스를 밟고 있었다.동대문 양복점으로 찾아가 취직했다.열심히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사장님도 특별히 아껴주셨다.
스무살이 넘자 승승장구해 명동에서도 알아주는 기술자가 됐다.24세 때는 고향에 내려와 읍내에 ‘미조사’양복점을 차렸다.교회도 열심히 나갔다.사장이 된 뒤 지역에서 유지대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게 됐다.
“고사장,사업을 크게 일으키려면 술도 마실 줄 알고 담배도 피울 줄 알아야지.그렇게 맹꽁이같이 생활해서 언제 큰돈 만지겠나”
원래 세상 마귀의 유혹은 달콤하게 마련이다.술도 입에 대고 담배도 피웠다.세상 마귀는 손님도 더 많이 보내주는 것 같았다.그렇게 세상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무렵 목사님이 갑작스레 심방오셨다.나는 담배를 피우다 그만 목사님께 들켜버렸다.
“고선생,교회에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술과 담배를 먹는다고 영 교회에 발을 끊을 생각이십니까.교회에 나와 기도하시면서 차츰 끊도록 하십시오”
“예,알겠습니다 목사님.하지만 술 담배부터 먼저 끊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그후 곧바로 40일 새벽기도에 들어갔다.
/정리=김규원기자 gwkim@kmib.co.kr - 국민일보 미션투데이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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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자료 모음 ]
이름: 고바울목사님
2000/11/23(목) 11:21 (MSIE5.5,Windows98) 211.104.209.245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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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풍요속 ‘교만’…부도 이어 심신쇠약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③] 물질적 풍요속 ‘교만’…부도 이어 심신쇠약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27일째가 되자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다.하지만 꾹 참고 계속 기도를 드렸다.40일 기도를 마치자 담배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싫어졌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물질의 복을 주시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사용하겠다고 서원했다.하나님께서는 서원기도를 들어주셨고 그후 3년만에 부자가 됐다.사람이란 모름지기 성공하면 교만하게 마련이다.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또 다시 친구들과 어울려 사냥하러 다니면서 술을 마셨다.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리 없다.양복점에 도둑이 들어 돈과 옷감을 몽땅 털렸다.그 뒤로 이상하게 손님이 계속 줄기 시작했다.거래처의 수금도 잘 되지 않았다.유동자금이 달려 결국 양복점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채권자들이 몰려와 멱살을 잡고 돈을 달라며 난리법석을 부렸다.이웃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몸이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목이 점점 붓더니 계란만한 덩어리가 잡히고 귀에서는 고름이 쏟아졌다.뿐만 아니라 시력이 갑자기 떨어지고 두통도 심했다.몸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니 우울증까지 찾아왔다.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게 됐으며 심지어 아무 생각없이 길을 가다 전주에 머리를 꽝 부딪친 뒤 정신을 차리곤 했다.
지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서울대병원을 찾아가 정밀 진단을 받았다.병원에서는 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면서 뇌로 번지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했다.공주로 돌아온 나는 얼마남지 않은 재산을 처분해 한달 하숙비와 병원비를 준비해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본격적인 통원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공덕동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시골에서 가져온 짐을 푸는데 성경책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그것을 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예수 믿으세요?”라고 물었다.
“예,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알고보니 아주머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였으며 남편은 장로였다.그 아주머니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갔다.
조용기 목사님이 ‘토기장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시는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었다.예배시간이 1시간40분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너무나 은혜가 돼 1부에서 3부까지 똑같은 설교를 계속 들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겸해서 받았다.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픈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세요.사업에 실패하셨다고 하셨죠.그것도 죄다 잊어버리세요.그리고 지금의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보세요.아,여행도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하지만 여행은 잠시 마음을 편하게 할 뿐이었다.여행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은 또다시 우울하고 죽고싶은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소개해준 최자실 금식기도원을 찾았으며 첫날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최목사님은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마음의 정함이 없어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해주시지 않습니다.약 먹고 치료할 사람은 내려가시고 금식해 병을 물리칠 사람만 여기 남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말에 거부감이 생겼다.‘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기도해야 효험이 있지 금식기도로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나’
집으로 돌아온 뒤 병원에 다시 다녔다.하지만 며칠 다니고 나니 치료비가 바닥났다.이런 저런 궁리를 했지만 이제 해볼 것은 금식기도밖에 없었다.다시 최자실 금식기도원을 찾았다.
/정리=김규원기자 gwkim@kmib.co.kr - 국민일보 미션투데이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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