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책은 곧 성령체험의 간증책입니다. 천국책을 의심 없이 믿는 자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믿는 자요,
의심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치 못한 자라 믿습니다.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린도전서 2:14)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저의 개인신앙생활을 통한 성령체험의 간증을 하겠습니다.
주님을 만난 것은 2년 반전쯤이지만, 물세례를 받고 주일성수를 지키기 시작한 것은 1년 반전쯤부터입니다.
저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님이 가장 강하게 붙들어 주신 부분은 다름 아닌 기도생활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주님은 제가 꾸준히 기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기도생활은 2005년9월 29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날 이전까진 세상의 여러 근심, 걱정, 욕심 등등으로 기도는 쉬지 않고 하되, 저의 신앙생활은 마치 오뚝이와도 같았습니다. 조금의 시험에도 자빠졌다가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지치고,,, 그래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또 기도를 통해 일어서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쉬지 않고 하는 기도생활'에 마저 어떤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저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시는 축복을 제게 부어주셨지만, 이상스러울 정도로 제게 가장 중요한 한가지 기도에 대해선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지금은 그 1년의 기간 자체가 이 한가지 기도에 대한 주님의 크신 뜻의 응답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만...).
전 이 한가지 기도제목을 두고 1년이 다 되어가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어느 성도는 한가지 기도를 두고 10년이 넘도록 응답만을 바라며 기도한다지만, 전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의 기도시간이 어느덧 1~2시간정도로 늘어났지만, 늘어나는 만큼, 응답 받길 원하는 똑같은 기도제목을 거의 매일 수 시간 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기도한다는 것에 대해 마음에 큰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하고 의심 많은 존재인가 봅니다. 이 한가지 기도 외엔 수많은 기도에 대해 소름이 돋을 정도의 주님의 응답과 은혜를 체험했으면서도 정작 수가지 중 한가지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해서 주님을 원망하고 그분의 크신 뜻을 알지도 못한 체 왜곡 해석하고...
전 마치 주님의 사도들이 3년 반 동안 주님 바로 곁에서 그 많은 표적과 기사를 직접 체험하고서도, 성령세례 받기 전까지의 연약하고 믿음 약했던 그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전 지치기 시작했고, 더 이상은 오뚝이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주님이 진실로 '쉬지 않고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지에 대한 엄청난 의심과 회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한가지 기도제목을 두고 수 시간 동안 거의 매일같이 마치 벽에 대고 미친 인간처럼 혼자 독백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도는 주님과 대화를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뜻을 아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음성에 굶주려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은 이러한 기도생활을 할 힘도, 의지도, 아니 하고싶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저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그럼, 그런 기도 안 하면 그만이지 않느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오직 매달리고 응답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다는 나의 믿음은 그 무엇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지쳐있었고, 더 이상은 하고싶지 않다고 불평하고 있었지만,
기도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알고 있었고,
이 점은 저를 더욱 주님의 음성과 임재를 체험하고픈 갈망 속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엄포(?)를 놓는 듯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수년이 더 걸려도 좋습니다.
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독백하는 듯한 이 기도생활이 힘듭니다.
응답 안 하셔도 저의 기도를 최소한 듣고는 계신다는 사인이나 표징을 제게 주소서!
만약 이 기도마저도 응답 안 해 주시면 다시는 기도 안 하렵니다!"
그렇게 기도한 지 며칠이 못되어 제 손에 교회 친구로부터 책 한 권이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책제목은 "엄마 같은 성령" 이었습니다.
받자마자 단숨에 읽었고, 이 책의 메시지와도 같이 제 마음에 성령을 체험하고 싶은 강한 갈망이 넘쳐났습니다.
마침 책을 읽고 난 그 날 저녁에, 저는 어느 한 교회의 강준민 목사님 초청설교에 참석하게 되었고,
함께 초청설교에 갔었던 교회 친구로부터 한 설교테이프를 건네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 그 테이프를 바로 듣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필연과도 같이 설교 테이프 제목은 '보혜사 성령'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듣고 난 시각은 새벽 1시 20분 경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다 듣자마자 저는 기도해야한다라는 강한 갈망에 바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기도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제 혀가 마치 뛰듯이 빨라지면서 이상한 언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혀를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의 어두움과 함께 저는 아주 강한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언어는 자꾸만 다른 언어로 계속해서 바뀌었고, 제 생각에 한 언어 당 20분 정도 지속된 것 같은 데, 눈을 감고 있었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한 언어가 끝나고 다른 언어로 바뀔 때마다 '아, 또 언어가 바뀌었다' 라는 것과
그럴 때마다 아주 강한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것,
그리고 말로만 듣던 영이란 존재가 실로 존재하고,
그 다른 어떤 영이란 존재가 제 몸 속에 있었다는 것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장 놀라운 체험은
제가 너무나 두려워, 속으로 ' 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제 혀가 미친 듯이 움직이고, 이상한 영이 제 몸 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자마자 조금 후 이상한 언어의 기도가 멈추고, 갑자기 자장가와도 같은 은은하고 서정적인 노래가 제 혀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곡이 완성된 곡조의 한 곡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성령임을, 두려워하는 나를 마치 자장가 같은 곡으로서 ' 두려워 말라' 하는 듯한 마음의 소리와 함께, 지금 이 기도의 시간이 성경의 머리로만 믿던 성령세례의 시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곡이 불려질 동안 제 마음에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흘러 넘치고 눈물이 계속 흘러 내렸습니다.
그 곡이 끝나자마자 제 혀는 또 다른 언어로 그 전과 같은 기도를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뻤습니다. 주님은 제게 주님이 제 기도를 계속 듣고 계셨다는 사인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넘치고 넘치는 사랑의 사인이었으며 은혜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가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떴습니다.
시간은 새벽 5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2005년 9월 29일 새벽, 평생에 잊지 못할 4시간 동안의 성령세례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시는 넘치는 사랑과 은혜, 성령께서 저를 위해 4시간 동안이나 멈추지 않고 기도해 주시고, 저를 위해 노래까지 불러 주신 그 은혜,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성령체험 한 이후의 저는 더 이상 이전의 제가 아닙니다. 성령이 진실로 제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분을 주인으로 모든 것에 담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전에 머리로 깨닫으려하고 믿으려했던 성경의 내용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의 임재하심과 도우심등이 이제는 머리가 아닌 진정 가슴으로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그 체험을 경험한지 2개월이 채 못 지난 11월 15일날,
저는 3일 작정의 단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어릴 때 저를 '묵돌이'라고 부를 정도로 저는 하루종일 쉴 새 없이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저가 만만치 않다는 단식기도를 작정하게 된 이유는, 사업구상을 하던 중, 한 전도사님이 제 마음대로 아무 사업이나 벌리지 말고 주님께 단식을 통해 여쭈어 보라고 하시는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결단이 필요한 이 시점에선 분명하고 확실하게 주님의 뜻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3일 단식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첫날, 늦은 아침 10:07분에 기도의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진실로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단식기도기간동안 철저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로 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릎이 저리고 아프기 시작했죠.
그래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순간에 두 손으로 꿇어앉은 자세의 허벅지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픈 다리를 치면서 조금이라도 아픔을 잊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조금 후에 손이 마치 저절로 어떠한 박자를 맞추는 듯한 손놀림으로 바뀌더니,
제 방언이 그 손놀림을 따라 노래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제 머릿속에 시편의 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시를 읆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찌어다"(시편 81:1-2)
왜 찬송시간에 여러 악기와 춤과 함께 찬양을 하는지
머리가 아닌 가슴, 온몸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선 저의 영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 손으로는 악기처럼 장단을 맞추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의 체험 또한 성령세례 때의 그것처럼 어떠한 문장으로 그 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처음엔 동요 같은 곡이더니, 조금 지나 중,고교 수준의 곡으로, 나중에는 어떤 오페라의 한 곡처럼 웅장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마치 독창회를 하는 듯한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청중은 오직 주님뿐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영혼을 다해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로 노래 불러 주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성악을 하라는 음악선생님의 끈질긴 권유가 있었었지만, 그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지 않았었던 저였더랬습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이 마치, 너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로 어디 한번 불러봐라 내가 듣겠노라 하시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 같은 은사를 주었는데, 왜 찬양팀에 속해서 노랠 하지 않았느냐 하시는 듯한 상상도 하지 못한 마음의 소리도 함께 올라왔습니다.
진정 무대 등에 서서 청중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정성으로 모든 성악가들이 노랠 부른다면, 어찌 세상적 시각의 성공 또한 이루지 못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에게 이 은사를 주신 주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얼마동안 노래를 불렀는지는 모릅니다.
행복감에 충만한 노래가 불려질 동안은 성령세례 때처럼 제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은 한 곡의 흐름이 끝나지 않고서는 다시 보통의 방언으로 말하려해도 음률로서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다시 방언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난 후엔 아주 오랜 동안 기도를 한 듯한데,
더 이상의 어떤 다른 체험이나 성령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다리의 통증으로 아무래도 이젠 좀 쉬어야겠다고 눈을 떴고, 시계를 보았습니다.
저녁 6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선명한 음성으로 뭔가를 지시하시기 전까진 절대 일어나지 않겠노라는 작심은 끝까지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 작심은 8시간 25분 동안 인내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첫 날의 이 체험은 그야말로 주님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럽고도 친밀한 교제를 한 듯한 행복감과 상쾌함을 주었고, 배고픈 줄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갔습니다.
문제는 둘째 날이었습니다.
3일 단식기간 중 가장 힘든 날이 둘째 날이었습니다.
왕성히 유혹하는 식욕으로 기도시간 중 문득문득 머리 속에서 수많은 음식들이 날아다녔고,
1-2시간 간격으로 눈도 뜨고, 물도 마시고, 첫 날과 같이 수 시간을 오직 기도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둘째 날을 넘기고, 마침내 삼일 째 되던 날,
오늘은 분명히 주님의 선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기도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저녁이 다 되도록 아무런 음성도, 첫날과도 같은 체험도, 그 어떤 영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진 분명 말씀을 해 주실 꺼야 라는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 중에 한권의 책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한달 전쯤인가 교회의 한 친구가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고,
저에게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였지만, 그땐 그 책에 대해 별 큰 관심이 없었더랬습니다.
근데 왜 이 단식기도 마지막 삼일 째날 이 책이 자꾸 기도에 집중하려는 나의 머리 속에서 훼방(?)을 놓았을까요?
온 식욕을 물리치고 견뎌온 지금 이 마지막 단식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시간이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온 영혼의 귀를 곧도 세워 오직 성령의 음성에만 집중해야하는데,
엉뚱하게도 이 시간에 이상한(?) 책이 왜 자꾸만 머리에 떠오르는 건지...
이 책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일 당장 이 책을 구해 읽어야한다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삼일 째가 지나고 나흘 째 되던 날,
점심까지 단식을 이어가며 좀더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주님, 저 무엇을 할까요?'에 대한 주님의 명확한 대답의 음성은 들려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하길,
'첫날의 그 체험으로 인해 2, 3일째 날까지 비밀스러운 체험을 기대했건만,,,,쩝, 그럴 거였다면, 첫날의 그 체험을 마지막 3일 째날 단식기도의 열매처럼 짠~~~하고 주시지 않고, 왜 첫날에 주신 걸까?'
큰 실망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제 마음속에서 어떤 깨달음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은 첫날에 그 체험을 주심으로, 그 체험으로 인해 나로 하여금 다른 체험을 사모하게 하시고, 이 사모함으로 인내하게 하셔서 2, 3일 째날의 단식을 무사히 끝낼 수 있는 힘이 되도록 해 주신 거구나!'
그 순간 저는 이번의 단식기도가 주님이 저에게 원하셨던 것이라는 것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도와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주님이 나의 기도에 명확한 대답도 안 해 주셨으면서, 왜 제가 3일간의 단식기도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는지에 대해선 그분의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저의 3일간의 단식기도는 이루어졌고, 그 책을 바로 입수(?)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주님께 "주님, 옛 주님의 사도들은 성령세례 받고 나자마자 담대히 세상에 나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명의 일꾼들로 크게 쓰임 받기 시작했었는데, 왜 저는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도 제가 맡아야 하는 역할조차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라고 그동안 여쭈어 온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책에서 발견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누가복음12:29-31)
아... 머리로는 이 말씀을 이미 수 번을 되새기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주님께 고백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히브리서 4:12-13)'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동안의 저의 신앙생활을 다시 되돌아보며, 전도의 사명을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감당해 왔었던가 진실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모르는 주변 이들에게 주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순간순간 그들의 감정을 살피고 눈치봐가며 소극적으로 전도하고 있었던 저의 모습이 하나의 영상과 같이 비쳐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힘과 의지로 그들을 전도하고 교회로 이끌려했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저의 전도함에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받아들이든 그것은 제가 감당할 부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 그저 담대히 믿음으로 주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그냥 증거만 하면 되는 것이었음을 , 그 후에 그들이 주를 구주로 영접하든, 교회로 발길을 돌리든 그것은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었음을 또 한번 가슴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이번의 단식기도를 통해 주님은 주께서 저로 하여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기를 원하셨던 많은 부분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실로 신앙생활에 있어 주님이 우리에게 그 어떤 부분들보다도 먼저 깨닫기를 원하시는 부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영혼들을 주님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친구들, 내가 아는 그 모든 이들, 알지는 못하나 그냥 스쳐 보게되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때려서라도, 강제적으로라도 교회로, 주님의 곁으로 데려가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게 큰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소원이 주님께서 제게 주신 전도에 있어서의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수많은 성도들이 저와 똑같은 소원을 가지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저는 이 소원이 생김과 동시에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습니다.
기뻐서 웃고 또 웃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립보서 2:13-14)
전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제게 주시는 주님의 돈으로 천국책을 사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합니다. 공공기관, 도서관, 교회, 제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이들, 길거리를 다니다가도, 이메일 등의 인터넷의 가능한 한의 모든 방법으로, 이 책을 권하고 읽게 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 된 것입니다.
3일 단식기도를 통해 주님은 제게 부업이 먼저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그동안 머리로만 믿어왔던 주업의 의미를 비로소 온 영혼으로 깨닫게 하시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이전 같으면 돈을 벌어 그 일부로 천국책을 사서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줘야지 라고 했다면, 지금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이들에게 천국책을 전해 주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여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한 부업이 필요하다로 바뀐것입니다.
마음 같아선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천국책을 보내고 싶습니다. 한권 한권 돌려가며 읽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 주업의 원활한(?) 성공을 위해선 부업도 필요하지요,
천국책을 살 돈이 하늘에서 계속 뚝뚝 떨어지면 좋겠지만(^^).
그럼, 주님은 저의 부업으로는 무엇을 하길 원하실까요?
이 부업의 업종에 대해선 주님의 응답을 아직 명확히 받지는 못했습니다.
홀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천국책을 가능한 한 많이 많이 사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라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원, 즉 하나님이 제게 두시는 뜻을 알았으니, 길은 저절로 열리지 않겠습니까?
조용기 목사님의 어느 주일설교 제목처럼 말입니다.
그 부업이 어떤 길일지라도 그 길이 정녕 정직하고, 주님 아래 거하는 한, 주님은 제가 하고 싶어하는 길이라면 그런 저의 꿈을 허락해 주시고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길은 주님나라로 연결되어 있는 길이기에...
간증이 너무 길어졌군요.
저의 개인간증을 바탕으로, 저는 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 님들께 무엇보다도 성경의 이 말씀 부분을 전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론이나 상상이 아닌 현실로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편 42: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1-13)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주님을 믿음으로 사모하고 사모할수록, 부르짖고 부르짖을수록, 찾고 찾을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크고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심을 믿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들을 삶의 기회나 변화와 연결해서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저에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믿기 어려운 영적 체험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그 단어처럼 "크고 비밀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자아의지를 존중하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찾고 부르짖는 것은 오직 당신의 자아의지와 판단에 달려 있으며,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누가 얼마나 간절히 나를 찾고 구하고 있는가를 바라보고 계실 뿐이지,
그 부르짖는 정도는 모두 우리의 자아의지에 맡기셨다고 믿습니다.
주께 구하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세상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구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부르짖고 두들이고 구하고 찾으십시오.
주님 앞에서 데려온 자식처럼 눈치보지 마십시오.
이것을 들어 주실까, 이런 것을 간구 해도 될까 등등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는 우리의 모든 이성과 의지, 판단들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주께 구하십시오.
그것을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는 주님이 판단하실 일이지,
당신이 주님 먼저 그것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멋지시고 믿음의 왕이신 예수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그분이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부활하실 때까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일을 앞두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까지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거역되는 것이었다면 아무리 괴롭다해도 그분은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 14:36)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몇가지 방법을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4복음서를 통해 보이고 있는 수많은 표적과 기사, 치유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방법들이 수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 방법들을 철저히 따르는 교회가 저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여의도 순복음 교인은 아닙니다만... 장로교에서 시작한 저의 신앙생활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믿음의 성숙을 더해 왔다고 믿으며, 어느 단계에 이르러 저의 믿음관(?)이 순복음 교회의 그것과 일치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구하고자 할 바를, 마치 자식이 부모 앞에서 '아빠, 엄마, 나 이거 가지고 싶고, 저것도 가지고 싶고, 등등...' 눈치는 고사하고 염치없이 구하고 또 구하는 자식들처럼, 불가능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먼저 구한 후에, 아버지의 뜻대로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원하시는 모든 바를 부르짖으십시오.
다만, 모든 바를 구한 후엔, 예수님처럼 제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시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의 고백이 머리로서 일까요, 가슴으로서 일까요?
어떤 한 시인이 쓴 당신에 대한 시가 생각납니다.
당신의 천사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름을 리스트에 적는다고 하셨나요?
제 이름이 그 리스트에 적혀있나요?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의 리스트에도 제 이름이 적혀있나요?
전 욕심쟁이예요, 주님. 그 두 리스트에 제 이름을 꼭 적어주세요. 사랑합니다, 내사랑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