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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舊約)의 오역(誤譯)복있는 사람은(시1:1)

양정식 2019. 2. 13. 17:21

구약(舊約)의 오역(誤譯)

                               복있는 사람은(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yaiF;j'  &r,d,b]W  !y[iv;r]  tx'[}B' &l'h; al¿rv,a}  vyaih; Ayrev]a'
 

     (핱타임)                 (우베데렠)         (레솨임)        (바아차트)      (할랔)      (로)  (아쉐르)     (하이쉬)        (아쉬레)

     (그)죄인들         그리고~의 길에       악인들      ~꾀 안에서        걷다        not     that         (그)사람        ~의 복
 

׃bv;y:  al¿ !yxile  bv'/mb]W   dm;[;  al
 

(야솨브)     (로)       (레침)          (우베모솨브)        (아마드)      (로)

앉다           not    교만한자들  그리고~의 자리에      서다          not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םיlhT)이라고 하는데 ‘찬양하다’라고 하는 동사인 할랄(ll'h)에 명사형 접두어 테(T)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말로서 복수 형태이므로 ‘찬양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시(詩)는 히브리어로 미즈모르(רוֹמlמ)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프살모스(ψαλμός, Psalm)라고 하는데 둘 다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시편은 곧 찬양의 노래로서 운문의 장르에 속하므로 운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져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율법을 비롯하여 인류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 잠언과 시, 예언과 묵시 및 서신 등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산문과 운문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문 형태의 말씀은 읽고 해석하는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자적(Literally) 혹은 여자적(如字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 운문 형태의 말씀 곧 시가서와 예언과 묵시 기록은 산문을 이해하는 평범한 틀로써만 해석할 수는 없다.

  운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억양과 병행법 등 형식에 있어서의 운율적 특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표현에 있어서의 상징(Symbol)과 메타포(Metaphor) 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편이나 그 밖에 운문적 성격을 띄고 있는 말씀들을 이해하려면 소위 영해(靈解)라고 하는 비유적 해석 방법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편은 운율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어서 알파벳 시편이라고 불리는 답관체 형식의 시만도 아홉 편이나 된다. 이러한 시들은 각 행이 히브리어 알파벳 22자로 시작하는데 시 119편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유사한 형태의 문장 구조가 여러 편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본 장(Chapter)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시 1:1 의 초두에 사용된 아쉬레 하이쉬 아쉐르(רv,a vya'h yrva')라는 표현이 시 94:12, 시 106:3과 시 112:1에서도 같은 형태로 등장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하다.

 

 

  운명론적 복과 순종의 복의 차이

 

  위의 히브리어를 번역함에 있어서 시1:1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하다’라고 되어있고 나머지 시편에서는 ‘~한 사람이 복되다’라고 서로 다르게 하였는데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한 것인가? 원어를 직역할 때는 ‘사람의 복은 ~한 것이다’가 되어 두 가지 번역은 모두 잘못되었으나, 의역을 허용한다면 후자의 ‘~한 사람이 복되다’라고 번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위의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문법 지식이 요구되는데 우선 구문(Syntax)상으로 히브리어의 명사 문장(Nominal Sentence)을 이해하여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 중에서 술부(Predicative)에 동사가 나타나지 않고 명사 혹은 명사 상당 어귀(형용사, 분사 등)만으로 이루어지는 문장이 있는데 이를 명사 문장이라고 한다.

 

  시 1:1~1:2 까지는 하나의 명사 문장으로서 ‘사람의 복’이라는 뜻의 아쉬레 하이쉬(רv,a vya'h yrva')가 문장 전체의 주어이며, 아쉐르(rva)이하의 나머지 내용은 보어(Complement)인 동시에 술부를 이루고 있는데 주어와 보어를 연결하는 동사는 없다. 아쉐르(rva)는 영어의 관계대명사 That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는 독립 관계대명사로 사용되어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아쉬레 하이쉬(רv,a vya'h yrva)라는 주어를 해석해야 하는데 이는 명사의 독립형과 연계형에 대하여 알아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 시 1:1의 우리 번역은 아쉬레(yrva')를 수식어처럼 해석하여 ‘복있는’이라고 해버렸다. 그러나 아쉬레(yrva')는 ‘복’이라는 뜻의 명사 에쉐르(rva)의 연계형으로서 ‘~의 복’이라는 뜻이지 소유격이나 수식어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어느 나라 말이든 소유격을 나타낼 때 소유하는 명사를 소유격의 형태로 만들고 소유되어지는 명사는 그대로 두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왕의 말씀(King's Word)’에서 소유하는 명사인 ‘왕(King)’을 소유격으로 만들어 ‘왕의(King's)’라고 만든다는 말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소유하는 명사(독립형)를 그대로 두고 소유되어 지는 명사를 연계형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만듦으로써 소유격과 유사한 효과를 만든다. 예를 들면 ‘왕’이라는 뜻의 멜렠(&l,m)이 ‘말씀’이라는 뜻의 다바르(rb;D)를 소유하고자 할 때, 멜렠(&l,m)을 소유격의 형태로 변형시키지 않고 다바르(rb;D)를 데바르(rbD)라는 연계형으로 바꾸어 오히려 소유하는 명사 앞에 둠으로써 데바르 멜렠(&l,m rbD)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를 만일 시 1:1을 번역한 개역 성경의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왕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의 왕’이 되는 셈이다.

 

  이제까지 ‘복 있는 사람’이란 번역이 잘못된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시 1:1-2를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자면

 

“사람의 복이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이라”

가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자라야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의 모든 행사가 형통하게 되리라는 뜻인 것이다.

 

  결국 시 1:1-2의 사상은 신명기 28장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때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며, 이는 시 94:12과 시 106:3 그리고 시 112:1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한편 신약의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여덟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 역시 복 받을 조건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으로 시 1편의 원의(原意)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정 번역한 것과 기존의 번역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얼마 전 어느 설교자가 시 1편의 본문을 강해하면서 택함과 예정의 교리와 접목시키는 것을 들었다. 즉 복 있는 자는 받은 복 때문에 믿고 순종하여서 더욱 많은 복을 받게되고 악인은 복을 받지 못함으로 자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운명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로 볼 때 원어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복의 유무가 운명론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는 오해를 함으로써 원의(原意)와 전혀 다르게 해석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의 생애가 자신의 책임과 무관하게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는 곳은 없다. 다만 혹자가 ‘예정’ 등 운명론적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구절이 있음을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특별한 언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그러한 용어가 포괄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전후의 문맥과 성경 전체를 충분히 검토해 볼 때 드러난다. 운명론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희석시키는 인간의 추론일 뿐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상은 아니다.      

 

 

  복의 종류와 개념

 

  그렇다면 이제는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겠다. 신ּ불신을 막론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하여 복을 달라고 열심히 구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되는데 과연 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복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 것 같지만 크게 나누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참된 복의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은 분복 즉 헬렠(qlj)라고 하는데, 이는 전 5:19에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말씀하는 대로 신ּ불신간에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행복을 누리도록 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분의 소득을 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은 바로 분복으로서 ‘행복하다’라는 헬라어 유다이모니아(εuδαίμονια)의 개념과 같다. 이는 ‘좋다’라는 뜻의 유(εu)라고 접두어가 ‘마귀’ 또는 ‘세상 신’이라는 뜻의 다이몬(δαίμον)과 합하여 이루어진 말로서 ‘세상 신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세상 신의 정체는 마귀인데 이 마귀가 세상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 5:19에서 보듯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지 마귀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세상 사람들의 세상 행복은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음으로 해서 마귀로부터 오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귀의 공격 목표는 참된 신자들이거나 앞으로 그렇게 되어질 자들이지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세상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인간의 행복을 뺏으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잘 되어 가는 대로 두고 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역시 제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내 버려둔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행복이 성도들에게는 보장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욥기에서 보듯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하나님께 참소하고 하나님의 허락 하에 성도들의 분복을 빼앗아감으로써 시험하며 괴롭힌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환란과 질고가 많으며(시 34:19), 세상 행복인 유다이모니아와는 거리가 먼 삶을 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도들도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으며 그런 것들을 전적으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참된 복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궁극적으로 추구할 바가 아니며, 그것들보다 차원 높은 참된 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복(福)은 세상에서 육신이 잘되게 해달라고 하는 헬렠이나 유다이모니아가 아닌 또 다른 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시 1:1에 나오는 에쉐르(rva)이며 헬라어로는 마 5:3-11에서 주님이 말씀하는 마카리스모스(μακάρισμος)이다. 즉 에쉐르와 마카리스모스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 133:3에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라고 말씀함으로써 ‘복’의 궁극적인 내용은 다름 아닌 ‘영생’ 즉 하이 올람(םlוֹע יj)이라고 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요12:50에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 133:3에서 말씀한 ‘복’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베라카(הlrB는 신령한 복과 분복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의 뜻은 물론 신령한 복인 마카리스모스와 같은 것이다. 한편 요일 5:20 에서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라고 함으로써 주님이 바로 ‘영생’이시라고 하였다. 영생은 헬라어로는 조에 아이오니아(ζωή αiωνία)인데 위의 두 성경 말씀을 종합하면 참 복은 영생이며 영생은 곧 주님이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곧 영생을 소유하였으며, 또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을 소유함으로써 고전 3:21의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라는 말씀대로 만물을 소유한 자도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만물을 우리의 것으로 주신 아버지가 계심과 온 우주를 소유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얽매어 물질 이외에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이 부족한 듯이 그저 복을 받으려고 애쓰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되겠다
 
 cafe.daum.net/amos9/89Uk/87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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