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 독일의 유명한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나를 바라보는 신의 눈과 같은 눈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일종의 '거울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즉 내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거울 속의 나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고 대하시는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주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본다. 그러면 그는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가? 그가 믿고 생각하는 대로 그는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무릇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의식과 믿음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압제자이며 불공평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가? 역시 그들이 믿고 있는 대로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의 하나님 관은 왜곡된 것이다. 진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을 때는 그것이 그에게 진리처럼 역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을 때 그에게 재앙이 임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믿는 대로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는 것인가?
나는 그것은 자신이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뿌리는 씨앗을 거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연적인 법칙이다.
하나님은 그처럼 무기력하신가? 어떤 이가 잘못 생각하고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실 수는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만드신 자연의 법칙을 허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질서를 어지럽히면 사랑과 행복의 모든 법칙들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심은 것을 거두며 그러므로 자신이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나쁜 것을 심어도 좋은 것이 생기게 한다면 그것은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내적 치유를 많이 시도하던 적이 있었다. 현재의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서 그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안에 형성되어 있는 과거가 슬픔이나 쓴 뿌리가 치유되면 그것은 현재의 성격이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성도들을 안락 의자에 앉히거나 아니면 더 편안하게 누운 상태에서 주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이 임하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임재와 평안 속에서 그 사람의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다음부터는 기도를 받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한다. 어떤 것이 느껴지는지, 무슨 생각이나 장면이 떠오르는지.. 그렇게 물어보면서 상황에 맞는 기도를 하곤 했다.
사람들은 과거의 아픈 시절, 인생의 가장 추웠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그 시점에서 그 때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울고 힘들어하고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그 사역에서 치유의 핵심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과거의 기억 속에 들어가 그 때의 동일한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 그들이 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곁에 계시는 주님이셨다.
어떤 자매는 기도를 받으면서 세 살의 나이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가 물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물밑에 있는 바위들, 날카로운 돌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너무 무섭다고 그녀는 울었다.
나중에 기도가 끝난 후에 그녀는 자기가 세 살 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놀라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면서 강가에서 빨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없어져서 보니 저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기도 중에 느꼈던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녀는 기도를 받으면서 그 장면에 주님이 계신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내려가는 것을 주님이 안아주시고 어머니에게 아기를 돌려주셨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울었다. 그녀가 세 살 때 그녀는 주님을 영접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의 곁에 계셨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고 주를 부르지 않았을 때도 주님은 항상 그녀와 같이 계셨던 것이었다.
나는 비슷한 많은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부르기 전에도 주님이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키시고 같이 다니시는 것을 알았다. 때가 되어 우리가 주님을 구하고 부르고 영접하며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신다. 하지만 주님은 그 전에도 우리를 아시며 사랑하셨던 것이었다.
이런 사례도 있었다. 한 자매는 자기가 태어나는 장면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울면서 외쳤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태어났는데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마구 울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게된 것은 태아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이 태어날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기억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버렸을 뿐이다.
그녀는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 중에 보게 되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게 될 때 주님이 그 아기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아기의 상태인 자매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두려워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마구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아기에게 부부의 싸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도를 계속 하자 그녀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주님께서 두 분의 사이에 서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어머니를 눕히고 옆에서 위로해주시고 있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의 많은 슬프고 아픈 장면에서 우리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받는 중에 느꼈던 감정이나 알게 되었던 사실을 부모님께 확인해보면 한결같이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기로 하자. 어떤 자매는 한 살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아기의 목소리로 칭얼거리며 울었다. 자기는 지금 한 살인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엄마 아빠는 집에 안 계시다고 울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부엌의 바로 옆에 자기 뒤에 주님이 서 계시다고 했다. 주님이 너무 키가 크셔서 자기는 주님께 안아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주님께서 자기를 안아주시더니 머리 위에 목마를 태워주셨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울더니 나중에는 행복해서 웃었다.
이런 내적 치유의 기도를 통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들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렇다고 소설처럼 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몇 번의 그런 기도를 통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바뀌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하고 귀중한 메시지가 있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주를 알지 못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우리가 주를 구하지 않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옆에 계셨다.
유명한 그림이 있다. 어떤 소년이 배를 운전하고 있다. 그는 큰 배를 운전하는 것이 몹시 두렵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면 뒤에서 그 소년의 손을 잡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 그림은 단순히 하나의 상상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신다. 우리가 외로울 때 옆에 계신다. 우리가 지쳤을 때 뒤에서 밀어주시며 손을 잡아주신다. 그것은 공상이 아니고 실제이다. 우리가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내적 치유를 하면서 얻은 가장 아름답고 실제적인 힘이 되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하나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왜 우리는 지금 기도하면 고통스러운 과거의 사건과 상황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데 그 당시는 그것을 볼 수 없었을까?
그 때에는 주님이 곁에 계신 것을 왜 느낄 수 없었을까?
우리가 어리기 때문이었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치유에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상황도 많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아프고 슬픈 일을 겪었을 때 그 옆에는 주님이 계셨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왜 그것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알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 때에는 아직 그러한 주님을 볼 수 있는 의식, 생각,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그 때는 항상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며 나를 돕고 계시다는 의식이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곁에 계셨어도 그것을 보거나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보는 눈은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이다. 우리가 사랑의 주님을 알며 긍휼과 용서와 자비의 주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두렵고 무섭고 엄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사랑의 주님이 곁에 계셔도 우리는 그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보는 주님의 눈이다. 우리를 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보신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하게 보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 원하신다. 주님은 비록 우리가 넘어지고 죄를 지을지언정 그것을 후회하고 다시 주님께 가기를 원하시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그 마음과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자신을 향하여 엄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주님을 체험할 수 없다. 아니 옆에 계서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체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를 원하셔도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이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당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당신이 간절하게 주를 추구하면 주님은 당신에게 임하실 것이며 깊은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주님께 별로 관심이 없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다. 그리고 오셔도 당신은 그것을 알 수 없으며 느낄 수 없다. 주님과 당신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당신의 마음과 시선이 당신을 대하는 주님의 시선과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먼저 당신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모해야 당신에게 그 사랑의 역사를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세상을 보는 당신의 눈은 세상이 당신을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가? 그러면 세상도 당신을 아름답게 볼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보는가? 그러면 세상도 당신을 그렇게 보며 그렇게 대우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라. 세상이 당신을 버린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세상을 버린 것이다. 당신은 피해자인가? 아니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대인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보는 당신의 눈은 당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외로운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 버린 것이다. 시간의 순서를 따지지 말라. 영계에서 시간이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서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부디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로버트로 만들지 않으셨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우리의 인생도 정복하고 다스리고 스스로 심고 거둘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각 자의 인생의 창조권을 주셨다. 그러므로 나쁜 것을 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삶이 괴롭다면 당신은 죽은 후의 생은 더욱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금은 기회가 있지만 사후에는 아무런 기회가 없다. 지금은 마음을 바꾸고 시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고 반성할 수 있지만 사후에는 아무런 기회가 없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사후에는 후회는 할 수 있지만 회개는 불가능하다. 변화는 불가능하다. 나사로와 같이 살던 부자는 얼마나 열심히 후회했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았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변화가 가능한 시점인 것이다. 군대에 있을 때는 괴롭지만 일단 한번 제대하고 나면 더 이상은 진급이 없다. 그러니 힘들어도 진급의 기회가 있을 때 진급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삶은 우리의 책임이다. 당신의 눈을 바꾸라. 당신의 시각을 바꾸라.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라. 그것은 새 인생을 창조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과 미래와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치유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은가? 치유의 하나님을 믿으라. 용서의 주님을 체험하고 싶은가? 용서의 주님을 믿으라. 왜 쓸데없이 어둡고 눌리고 비참한 인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 의식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왜 인생을 나쁘게 보는가? 왜 결혼을 무덤으로 보는가? 인생은 아름답고 결혼은 즐겁다. 당신이 잘못 심은 것을 가지고 왜 인생 전체를 나쁘게 생각하는가? 아이를 기르는 것은 고역인가? 그렇게 믿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아이들을 통하여 행복과 누림과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짐을 무겁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즐거운 삶과 인생의 행복을 가르치신다.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즐기는 분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 그렇다면 주님이 왜 사람들을 치유하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신다는 말인가? 기억하라. 주님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하신 분이다.
나는 당신이 신앙생활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겁게 힘들게 믿지 말라. 취미생활을 하듯이 게임을 즐기듯이 그렇게 신나게 믿으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싶으면 먼저 그 사랑을 받아들여라. 나는 악하니까 자격이 없다, 나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 고생을 하고 괴롭게 사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면 말이다.
당신은 귀한 존재이다. 당신은 아름다운 존재이다. 당신을 지으신 분이 그렇게 보신다. 기억하라.
당신의 관점이 당신의 미래이고 인생인 것을, 인생은 아름답다. 삶은 행복한 것이며 신앙이란 참으로 아름답고 즐거운 게임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주님께 아주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당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라. 아름답고 행복한 시선으로 주님을 보고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할렐루야! 기뻐하라.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그분이 지금 당신의 곁에 계신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자유롭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2중에서>
글쓴이 : 정원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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