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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상은 무엇인가?

양정식 2015. 3. 4. 11:59

우상은 무엇인가?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우상(偶像, idol)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다. 옛날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멸망한 것도 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우상을 싫어하시고 우상 섬기는 죄를 중대하게 보시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존엄과 관계되고, 온 피조계의 질서와 행복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우상 숭배가 죄인 줄을 모른다. 우상 숭배가 경건이며 미덕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또 우상 숭배가 죄인 줄은 알면서도 자기 자신이 우상 숭배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유대교와 이슬람 신도들이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다(요 8:19, 55; 14:7; 16:3). 그들이 만일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도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이슬람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그들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다고 하지만, 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따라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경전도 다르고 교리도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다 우상 숭배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우상

  

  구약 성경에서 ‘우상’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리킨다. 십계명 중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신 5:7)고 할 때의 ‘다른 신들’이다.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장엄복수로서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처럼 ‘신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럴 경우의 ‘신들’은 참 신이 아닌 우상 신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한다(신 4:35; 사 44:6).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새기거나 부어 만든 형상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말할 때가 많다. 십계명 중 제2계명에 나오는 ‘우상’이 바로 그것인데, 히브리어로는 ‘세펠’이다(출 20:4; 신 5:8; 삿 17:3; 사 44:15, 17 등).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새기거나 부어 만든 것은 참 신이 될 수 없으며 다 우상이다.

  그 외에도 ‘가증한 것’(식쿠츠; 신 29:17)과 ‘헛것’(엘릴; 대상 16:26; 시 2:8; 96:5; 97:7)이란 단어가 ‘우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길룰’(우상; 레 26:30; 신 29:17), ‘아웬’(삼상 15:23; 사 66:3)과 ‘드라빔’(삼상 15:23) 같은 단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벧엘’은 원래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지만, 우상 숭배를 많이 하므로 경멸적인 의미에서 ‘벧아웬’ 곧 ‘우상들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호 4:15; 10:5).

 

신약에서의 우상

 

   이러한 구약의 사상은 신약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오직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이며, 다른 신들은 다 거짓이며 헛된 것들이다(롬 1:23, 25; 딤전 6:15).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와 온 아시아를 다니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전파하였다(행 19:26).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에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다고 한다(행 17:16).

  그런데 이 하나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곧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며(요 5:18; 10:30), 자신이 또한 ‘하나님’으로 불리기도 한다(요 1:1; 20:28; 행 20:28; 딛 2:13; 롬 9:5).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예수님 당시부터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고대교회에서 ‘기독론’이 확립되자 ‘성령’의 신성이 또 논란되었다. 오랜 논쟁 끝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하나님 되심)이 모두 확립되면서, 이들 3위(位)는 3신(神)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제5문에서는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오직 유일하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 계십니다.”고 답한다. 제6문에서는 “그 신성(the Godhead)에는 몇 위(persons)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신성에 3 위(persons)가 있으니 곧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이 셋은 한 하나님(one God)이며, 본질에 있어서 같고(the same in substance),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equal in power and glory).”라고 답변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

 

 

  신약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언급은 골로새서 3:5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淫亂)과 부정(不淨)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情慾)과 탐심(貪心)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같은 맥락에서 에베소서 5:5에서는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基業)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한다. ‘탐심’(플레오넥시아)은 ‘자기에게 마땅한 것보다 더 가지려는 욕구’를 의미한다(Bauer 사전). 같은 단어가 마가복음 7:22, 로마서 1:29, 에베소서 5:3, 베드로후서 2:14에서는 ‘탐욕’(貪慾)으로 번역되었다. 누가복음 12:15,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2:5, 베드로후서 2:3에는 ‘탐심’(貪心)으로 번역되었다.

  어쨌든 ‘탐심’ 또는 ‘탐욕’에 대해 ‘우상 숭배’라는 강한 정죄(定罪)가 붙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 앞에는 절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속에 ‘탐심’이라는 우상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우상은 무엇보다도 ‘탐심’ 특히 재물에 대한 탐심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며 제 정신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자기를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다(딤전 6:10).

  그러면 돈은 악인가? 돈은 나쁜 것이고 멀리해야만 하는가? 어떤 철학자들의 말처럼 돈을 돌처럼 여기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인가? 소위 ‘청빈’(淸貧)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인가? 아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지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고 하였다(전 10:19). 따라서 ‘돈’은 나쁜 것이 아니며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곧 ‘탐심’이 죄이며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재물을 섬기면 안 된다(마 6:24). 재물을 섬기는 것 곧 재물에게 종노릇 하는 것이 죄이며 재물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다(창 1:4, 10, 12, 18, 21, 25, 31). 따라서 우리는 물질을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가난’이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미덕이다(딤전 6:17-19; 딛 2:14; 엡 2:10).

  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다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보다 낮은 자리에 두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도구가 될 것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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