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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고보서 특강 교재

양정식 2015. 1. 3. 21:36

야고보서 특강 교재           2010년 4월 10일 경주 새순교회 모임


야고보에 대해서 기존 학자들이 어떻게 보는가? 그것부터 먼저 이야기합시다. 여기 야고보에 대해서 래드가 기존의 생각을 잘 대비해놨는데 ‘야고보에는 일관성을 찾지 못하겠다’ 하는 식으로 나오죠.

이건 우리가 지난 시간에 히브리서 할 때도 마찬가지죠. 야고보서 할 때도 상당히 자신감이 떨어진 일관성이 없이 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야고보서를 볼 때 사도 바울의 편지를 자꾸 의식을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야고보서를 사도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없다고 여기고 야고보서 이것만 달랑 성경책에 신약시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후에 야고보서만 있고 나머지는 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러면 야고보서를 왜 썼는지가 잘 드러날 겁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야보고서의 본래의 주장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존의 생각에서는 야고보서를 보면서 어디다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렇게 돼있단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내용이 실제로 뭐냐 하면, 이웃 사랑을 해줄 때 야고보서 2장 17절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그 원칙에 준해서 이웃 사랑이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있는 진짜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아니하면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이것을 왜 이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야고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이 야고보가 성경에 두 사람 나오죠. 한 사람은 제자들 중에 야고보인데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일찍 갔어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칼로 죽이고” 일찍 돌아가셨는데 15장 13절에 보면,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벌어지는 교회가 있어요. 그걸 팔레스타인 교회라 하는데.


예수님 태어난 고향마을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집단이 소위 자기가 원조, ‘원조 떡볶이’ 같은 것 있잖아요. ‘원조 할매 곰탕’ 이런 거 있잖아요. 원조로서 자처하면서 심사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 원조 팔레스타인 교회에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란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누구냐? 예수님의 형제라 했으니까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라고 볼 수 있죠. 씨가 다르죠. 마리아 바람 피웠다는 게 아니고. 그런 형제가 있는데 이 사람의 사상이 사도 바울과는 달라서 뭔가 이웃 사랑 안 하면 율법을 버리면 당신은 믿음이라고 쳐주겠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 보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율법을 실행하는 그것이야 말로 자유로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학자들은 이 야고보를 어떤 동네, 어떤 지역에 있는 문화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들을 익히 아는 입장에서 너무 방종하니까 까불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설이 있고, 다른 설은 미처 사도 바울을 몰라서 야고보 주장만 일관되게 밀어붙여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대로 이웃 사랑 하려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서 기존 신학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진짜 믿는 자 되느냐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진짜 믿는 자 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야고보는 ‘보통 사람’과 ‘진짜 거듭난 사람’을 과연 구분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이웃 사랑만 해대면(최고의 법이니까) 행함에서 믿는 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필리핀이나 알래스카 사람이나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도 율법 지키면 믿느냐 하는 거예요. 거듭났다는 말이 야고보서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의 질의: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는 그걸 봐서 거듭났다고 볼 수 없겠습니까?


저의 답: 열두 지파는 혈육에 관한 것이죠. 전통이죠. 이스라엘 전통. 열두 지파라는 것은 이미 여기서 율법에 대해서 특정 집단에만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말합니다. 즉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 경주에서 떡과 술 엑스포 하는지 몰라도 경상도 사람들은 그 엑스포와 상관없이 경상도 떡과 술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거듭나고 안 거듭나고 조건 필요 없이 출생 자체가 조상이 누구에요? 야곱이고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 조상과 더불어서 어떤 문화성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특별한 족속이다. 이게 인식 돼있는데 히틀러 밑에 유대인도 그렇고. 게르만 민족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 히틀러가 최고다. 우리는 게르만 민족이기 때문에. 게르만 민족 자체가 거듭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게르만족이 거듭나버리면 두 종류가 생겨요. 거듭난 게르만 민족과 거듭나지 않은 게르만 민족이거든요.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히틀러가 최고인데 거듭난 사람들은 히틀러가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같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버리면, 거듭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떻게 봐야 돼요? 또다시 율법을 버려야 되는지 그렇지 않으면 안 버려서 다 완성해야 구원되는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질의자의 질문: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열두 지파가 목사님 말씀대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인데 굳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의 답: 진짜 유대인은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은 진짜 유대인이죠. 진짜 유대인은 거듭날 필요 없고 그냥 가만있고 다만 예수님이 구주라는 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 자신은 변화가 없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율법 앞에서 어떤 자체적인 변화가 있을 필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데 자체적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율법을 지켰다’라는 원칙이 과연 야고보에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율법은 아무도 못 지켜요.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지켜요’라는 사실이 과연 이 야고보에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로마서에는 나오죠. 사람은 율법으로 해도 소용없고 마음으로 할례를 받아서 할례인데 만약에 할례 없이 율법을 앞세우면 모든 자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는 식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이뤘는가? 그것은 내가 행함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의가 우리 속에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킨 셈이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 와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 의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나와 있잖아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6-19)


지금 율법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킬 때 보통 사람도 지킬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과연 야고보서가 점검하고 있느냐 하는 그 문제를 생각하자는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유대인은 오지 마’라고 배척하는 게 있느냐 이 말입니다. 거부하는 게 있느냐? 야고보서는 없어요.


없으니까 기존의 신학자들은 상당히 당황하기 시작한 거예요. 도대체 보통 사람도 율법 지켜서 구원받아 버리면, 구원 여부를 마지막에 율법으로 어떻게 행했는지를 가지고 측정하겠다는 거예요. 여기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만약에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자를 못 본 채 하면 아무리 그리스도 종이라고 우겨도 ‘믿음 자’라고 간주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식의 신앙은 귀신도 아는 것이다 말이죠.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부자가 오는 걸은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은 천대하는 그런 것은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래서 야고보는 뭐냐 하면, 야고보서의 믿음은, 자기 믿음을 의지하는 게 믿음이 아니고, 율법대로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믿음을 믿는 그 믿음과 차별되는 참된 믿음이라고 보겠다는 겁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없다고 여기세요. 그런 것은 들어 본적도 없고 다만 야고보만 등장했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런 식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알지요. 율법 주신 그 하나님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지요.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이런 분인데 믿습니까? 믿죠. 그러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을 받아들인 것이냐 하면, 드디어 율법대로 이웃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이 오셨기에 이웃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이웃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야고보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뭐냐? 이웃 사랑을 온전히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믿습니까”를 묻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방금 제가 전한 예수님에 관한 이 뜻에 동의하신다면 행함이 있는 믿는 자라고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행함이 부족하네요. 믿는 건 됐는데 그 행함을 첨부하세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믿겠지만 이웃 사랑은 못하겠노라고 버티십니까? 그렇다면 애초부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새삼스럽게 예수님은 삼위일체인데 성자로 오시고 십자가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 하나도 없어요. 여기 십자가 부활이 안 나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그 이웃 사랑이, 본인이 행사하는 여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받아야 될 자가 도리어 이 불신의 세계에서 이웃 사랑을 받지 못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여생을 살더라도 오직 예수님을 믿고 버틸 각오가 되어 있느냐 여부로서는 확인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 전체가 믿음만 주장하고 행함이 없는 세상이라서 그 속에서 심한 핍박을 받더라도 세상이 원래 이렇다하고 참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신앙이란, 개인적인 행함이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생애로부터 확인된 바 있는 세상의 허무성이라는 전체 구조 안에서 행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더 간추려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이웃 사랑의 진수라고 여기고 걸어갈 마음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마음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다 는 겁니다.


1장부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그리고 이는 풀의 꽃같이 지나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달라고 하라는 겁니다. 예수부터 먼저 믿으라는 조건은 없습니다. 사람부터 먼저 거듭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들이 반갑고 좋아져야 합니다.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진리를 얻었다는 자유함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아야 합니다. 그동안 부정확한 체험이나 감각으로 살아왔던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 이거야!”라는 외침이 내면에서 올라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곧 자신의 감각이나 양심이나 의로움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를 포기한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런 유의 사람을 야고보는 ‘예수 믿는 자’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시험’을 빼버리면 뭐가 됩니까? 그냥 참는 것은 자기 성질 죽이는 거고,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서 악마가 어떻게 유혹하는가 악마를 의식하면서 거기에 대적하는 것, ‘악마야 그게 아니야’라고 강하게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 이게 바로 복이 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성질. 참아야지.’ 이게 복이 있는 게 아니고 그건 자기 이익 챙기는 거고, 자기 이미지 관리고. 악마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 1장의 내용만 봐도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마치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에덴동산의 경우가 그대로 와버렸어요. 우리가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있는데 에덴동산이 쳐들어와버렸어요. 그때 그 마귀가 지금 똑같이 역사하는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었다? 사람이 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죄 짓게 했다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그건 네 생각이고, 진짜는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신 게 아니고 네 욕심이 악마의 유혹에 짝짜꿍해서 “얼씨구나 좋구나. 반갑다 악마야. 기다렸다 유혹아. 얼마나 마음 설레며 죄짓기를 기다렸다고.” 하는 식으로  죄 지어서 그 죄 값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아, 다시 말해서 열두 지파 형제들아 지금 야고보, 내가 하는 말이 성경과 어긋나는 게 없다는 거예요. 성경핵심 그대로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야고보를 처음 접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치면서 백번 동의할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아담이 봐라. 아담이 유혹받아 신이 되고 싶어서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말에 유혹받아서 아담이 넘어간 것처럼 우리는 똑같은 상황이 우리한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욕심에 이끌려서 그런 죄를 안 지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요.


그와 같은 똑같이 이야기가 3장에 나오죠. 3장 1절에 선생 된 자들은 주의하라는 겁니다. 왜요? 8절에 보면, 말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 했어요. 죽이는 것이 뭐냐? 말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나오고 있는데, 그게 왜 독이 됩니까? 그것은 찬양이 나올 원래 자리를 우물에 독을 풀듯이 풀어서 틀어막기 때문이랍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3장 9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도대체 신약인지 구약 창세기 1장, 2장, 3장인지 구분 안 되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데 어떻게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내겠느냐? 말이 안 되지요. 단물 내는 샘 따로 있고, 쓴물 내는 샘 따로 있는데 한 샘에서 단물, 쓴물 나온다는 것은 모순이죠.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쓴물 내면 쓴물만 내든지 단물 내면 단물만 내지 어떻게 둘이 나올 수 있느냐?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단물만 내라 이 말이죠. 여기 12절에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잘했다 우겨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3장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이렇게 돼있어요.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 내려 오나니”와 연관 있습니다. 구조적입니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받고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도 위로부터 받고 있는 자가 곧 예수님 편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3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아까 선한 열매라 했지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위로부터 오는 것을 하게 될 때는 어떤 게 생기느냐 하면,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나오죠.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는 초점이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열매를 맺으면 끝나는 거다 말이죠.


기존에 야고보를 볼 때 어떤 허점이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야고보는 이렇게 봅니다’라는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의식하며 야고보를 흩어나가려고 하니 그림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거듭남에 대해서는 야고보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는 그 이야기도 없지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 그러니까 믿어라. 믿었다면 그 다음에 이렇게 행하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율법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가 야고보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야고보의 관심사는 창세기 1장부터 보게 되면, 사람은 사람을 위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놨지 사람 자기를 위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구약 율법 내에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몽땅 어긴 거예요. 그 사람 구원 못 받습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내용도 그게 아니지만 만약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오해한다면, ‘온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몇 가지 못 지키면 나머지 못 지킨 부분에 대해서 십자가 복음이 있으니까 그걸로 씻어주면 온전히 지킨 게 된다’라는 그러한 노림수가 있을 것처럼 보이죠. 사실은 그게 아닌데. 사도 바울은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러나 야고보를 보든지 사도 바울 서신을 보든지 보는 사람의 정신상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나 좋으라고 내 구원 위주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이 야고보가 용서를 안 해요. 그런 믿음은 귀신도 하는 거다 말이죠. ‘나는 하나님 믿는다. 나는 구원받는다.’ 이런 믿음은 귀신도 알고 떠는 거다 말이죠.


야고보는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이, 네가 사람이야. 사람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사람을 통해서 하늘의 지혜, 하늘이 온갖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믿는 자 아니라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반드시 내 말에 동의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 야고보의 이야기에 대해서 백 번, 천 번 동의하고 박수 치면서 “야, 속이 다 시원하다”고 동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상관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도 바울에서 다루죠. 이건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이 안 지켜도 되는 율법으로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4장 1절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이 말은 뭐냐 하면, ‘싸우지 말라’ 이 말입니다.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저는 어떤 때는 한 번 싸웠는데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하여튼 싸우지 마. 왜 뒷말이 많아. ‘저는 싸웠는데 그럼 지옥 갑니까’라는 말도 하지 마. 그거는 야고보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오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간음하는’ 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왜 간음하는 말이 세상을 뜻하는가요? 


인간 본래의 자리는 저주 아래 있는 자리에요. 야고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메시아에요. 그래서 야고보가 십자가 부활 이야기는 구원하시는 메시아 이쪽에 초점이 있습니다. 구원이 뭐냐 할 때는 십자가 부활이 언급돼야 되겠지만 야고보에 십자가 부활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상, 이것을 분석하는 겁니다.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의 자리가 저주 아래에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왜 우리는 저주 아래 있으며, 왜 우리는 죄인이냐, 왜 우리는 어떤 식으로 구원돼야 되느냐 하는 것을 십자가 부활로 이해하기 전에 이 상황 아래서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를 인간론을 가지고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지혜자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잠언 지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리고 현재 있는 세상 지혜, 이거는 문제성 있는 지혜죠. 인간의 저주받은 지혜죠. 이러면 저주받고 이러면 죽고, 이러면 살고, 항상 대비돼있죠. 지혜가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되면 이 땅에 있는 지혜가 문제 있는가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지혜가 저주받은 인간한테 흠뻑 덮여버리면 인간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이 저주받은 세상이고, 무엇이 하늘의 지혜인가를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뭐가 나쁜 것이며 뭐가 하늘로 온 순결한 것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있단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가 흠뻑 덮일 때 그때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이걸 알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아는 자에게 예수님은 곧 참된 하늘로 오신 지혜자라는 것을 동의할 수 있다 말이죠.


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서요”라고 말하면 야고보가 의아할 거예요. 누가 그러던데? 라고 말입니다. 야고보의 관심이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본래 자리에서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저주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자체가 인간은 마땅한 벌 받고 있는 사람에게, 복도에서 벌서고 있는 아이에게 “참 안 됐다. 애야” 이런 소리하면 안 되죠. 오히려 반대로 “의자 똑바로 들어” 이게 옳다는 겁니다. 벌서는 아이가 선생님 지나가니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는 그것을 요구할 자격도 없어”


야고보에서 예수님이 왜 오셔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진짜 율법의 정신과 지혜의 정신을 알려준 분이 없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란 걸 누구도 이야기한 적 없다 이 말이에요. 왜냐? 누구도 메시아가 아니니까.


그런데 메시아가 오게 되면,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가 어떻게 차이 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 분으로 오시는데 그 분이 바로 야고보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잊어버리세요.


야고보가 우리에게 할 말은, “당신, 욕심 때문에 죽어. 악마가 설치는 욕심이 붙었으니까 너는 죽어도 마땅하지”라는 말입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 너는 똑바로 살 수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대꾸하기를 “그래도 저는 신을 인정하는데요”라고 토를 달면, “그런 것은 귀신도 안다. 잘도 떠드는 구나”고 핀잔 받습니다. 


야고보는 이렇습니다. 지혜를 알고 행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야고보가 인간론이 사도 바울보다 더 깊이 들어가 버려요. 세상에 지혜를 아는데 행하지 않는 법이 없을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돼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마귀든 하나님이든 누구한테 영향 받게 돼있지, “나는 마귀도 모른다, 하나님도 모른다, 난 독자적 존재다”라고 할 인간은 애초부터 본래의 자리에서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든, 하나님이든 지혜가 찾아오면, 악마는 그동안 가짜 지혜로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율법에 대해서 반발하는 반응을 나타내면서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는데 그것이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나타난 모습이 바로 ‘죽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세상 그대로를 솔직하게 봅니다. “‘너는 안개니라. 네가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지키고 아니 지키고’가 의미가 없습니다. 상황이 구조적으로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을 하게 되면 실천에 옮기는 말을 하게 되지 실천에 옮기지 않는 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듣고도 안 지킬 수 있다는 말은, 야고보한테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하늘의 지혜가 오면 반드시 그 값을 해요. 아까 나왔잖아요. 뭔가 쓴물이 나오든지, 단물이 나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나오게 돼있지 아무것도 없는데 지혜만 아는 그런 경우는 야고보가 아는 인간에서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믿기는 믿는데 행함은 좀 부족하다. 그런 인간상은 야고보한테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뭘 믿는 게 아니고 위로부터 지혜가 주어지게 돼있어요. 하늘의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하늘의 지혜가 나오게 돼있고, 하늘의 지혜가 없는 인간은 땅의 지혜가 나오게 돼있는데 그게 바로 행함을 통해서 믿는지, 안 믿는지가 확인 된다는 게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이 말이죠.


-하늘의 지혜가 안 내려지고도 하늘의 지혜로서 나오는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은 기존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도덕과 거의 흡사하지 않습니까?


전혀 흡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정결하지 않고 순결하지 않으니까


-싸우지 말라든지, 부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든지 이런 것들은 오늘날도 경제실천윤리 이런데서 얼마든지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율법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모방하는 것은 진짜 율법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이 말은 지혜 자체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 속에 가만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후비고 사용하게 돼있어요. 그냥 지혜가 오게 되면 율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겠지요. 우리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늘의 지혜가 오게 되면 율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그 행함이 뭐냐? 사랑이죠. 율법을 사랑하는 거예요. 법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법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랑이 율법이 우리를 뒤덮어 씌워요. 그래서 하나하나 뜯어내면 돼요.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고, 이것은 이런 거고, 이건 이웃 사랑이고 이게 전부다 이스라엘이란 이유 때문에 위에서부터 지혜를 퍼부어주는 겁니다. 허옇게 눈사람처럼. 뭔가 퍼부었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개인적으로 구원받습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이기에 퍼부어준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지혜를 구해야 되죠.


그 다음에 20절.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위에서 오는 지혜가 오게 되면 개인적인 어떤 이득이나 이런 것은 땅에 속한 것이니까 만약에 개인적인 의나 이런 게 있으면 또다시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되죠. 아담이 개인적으로 하니까. ‘사람이 성낸다’는 말은 전체적인 하늘의 지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지요.


구약과  야고보서 사이에 예수님의 공생애 있습니다. 공생애에서 예수님의 대표적인 것이 산상설교입니다. 그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때 야고보도 함께 있었지요. 산상설교를 다 들었잖아요. 야고보는 뭐로 이해했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된 이스라엘답게 하는 하늘의 지혜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은 메시아니까 곧 지혜자고.


그러면 이 지혜가 있으면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죠. 그러면 이스라엘 안에서 뭐가 살아있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주신 지혜가 살아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없으면 이스라엘답지 못하죠. 살아있게 되면 어떤 열매가 나오는가? 성낼 이유가 없다. 성낼 필요가 없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다 포함돼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을, 예를 들어서 제자들이 ‘예수님, 저 인간들 하늘에 불내려 죽여 버리소.’ 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네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과 관계없죠.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다니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했던 설교, 사건 앞에 동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같은 지혜기 때문에.


여기 1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게 하나님의 지혜다 이 말이죠. 우리는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은 지혜가 있어야 이스라엘 되니까.


그 다음 23절.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게 뭐냐 하면, 자기는 늙었는데 자꾸 상상하기를 이십대로 보는 거예요. 거울을 봐도 분명히 오십 대라고. ‘아, 보기 싫다. 늙었다.’ 이러는데 거울 안 보면, ‘난 역시 이십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짓이 된다 말이죠.


그럼 거울이 뭡니까? 뒤에 보니까 거울이 율법으로 돼있고, 지혜로 돼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제파악. ‘나는 정말 이런 게 문제 있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렇게 못하고 있어.’ 이런 것이 계속해서 일어난 그것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지혜를 남한테 발산시키는 쓴물이 아니고 단물이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나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런 게 터져 나오면서 단물이 돼요. 쓴물이 아니고. 그럼 당신은 구원 못 받았네.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린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집단에서 개인으로 갔다가 개인이 다시 집단으로. 그래서 사도 바울에 있는 명령과 권면이 같은 맥락이죠. 그걸 개인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상을 모르고 야고보서를 들여다보면 ‘그럼 이걸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건 애초부터 구원 못 받은 사람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미 우리는 어떤 집단에 소속돼있는데 그걸 모르고 개인적으로 가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1장 25절에 보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게 미치는 거예요. 이게 왜 자유냐 하면, 개인 생각 안 하니까 집단에 포함되니까 이미 자유가 되는 거예요. 이미 주신 하늘의 집단은 나를 위해 준 집단이 아니고 너는 이미 어디 소속해 있다며 주어진 자유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거죠.


나는 내가 알아서 구원돼야 한다는 그 소속 자체로부터 이미 벗어나게 하는, 옛날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한 그걸 확인시키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기분 째지게 하죠.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그걸 즐겁게 하니까 세상에 이런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들여다봐라’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2장 10절에 봅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것 어디서 나온 겁니까? 아까 공생애 주님과 함께 있다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야고보 이야기 듣지 말고 누구 이야기 들어야 돼요? 지금 예수님이 내 옆에서 이 이야기한다고 보세요.


그래서 예수한테 따질 겁니까? “십자가 져놓고 이 소리 하나?”이렇게 따질 겁니까? 못 따지지요. 십자가 졌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자유케 하는 이 말씀 주시는 거예요. “아 이래서 율법으로 구원 못 받는구나.” 이걸 알게 하는 겁니다. 율법으로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위한 십자가지. 그걸 개인 용도로 사용했으니까 오해가 될 수밖에 없죠.


그러면 ‘온 율법’ 이 이야기는 어디 나오는 이야기죠? 산상설교에 나오죠. 바리새인들은 이걸 시도하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잘렸지요. 그들은 지옥에 가죠. 그런데 백부장은 율법을 안 지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버렸잖아요. 모든 천국엔 나라의 본 자손을 쫓겨나가고 백부장 같은 사람은 그 나라를 대신 차지할 것이다. 그 예수님을 야고보는 온전한 율법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거예요. 온 사랑이 우린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사랑이 그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우릴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것도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용서 이야기할 때 어떤 임금님이 이만 달란트 해놓고, 가차 없이 진노의 불 떨어지잖아요. 그 이야기를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또는 예수님이 옆에 서서 예수님이 야고보 속에 들어가서 우리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마태복음 읽으면서 야고보를 모른다? 말이 안 됩니다. 마태, 마가 즐겁게 읽으면 야고보도 즐겁게 읽어야 돼요. 어떤 입장에서? 이미 구원받은 열두 지파 입장에서, 흩어진 구원받은 입장에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거는 십자가 부활이죠. 개인적으로. 그런데 여긴 십자가 부활 안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이미 하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런 겁니다. 쉽게 말하면 긍휼 이미 받았고, 긍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야고보와 똑같은 발언을 저와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 못 지켰다고 다 안 지키면 안 돼’라는 말을 야고보 때문에 이미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 놓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이건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하죠.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지혜자인 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땅에 속한 지혜만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변명합니까? 자기 변명하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21절 보세요. 그냥 조상이 아니고 무슨 조상입니까? ‘우리 조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스라엘과 단절은 안 시키고 있어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행함을 보여줬다. 윤리도덕과 상관없이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윤리도덕이고, 바치는 것은 믿음이고 그게 아니죠. 바치는 것이 어디 포함돼있습니까? 바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율법 속에 같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온 율법이 되고 동시에 하늘에서 온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오니까 아브라함이 안 바칠 수 없지요. 믿는 자니까. 율법이 아멘처럼 일어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옆에 있는 너희들이라는 거예요. 성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 듣고 난 뒤에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만약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누가 한 거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성령이 하신 거죠.


그때 주의 말씀이 ‘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은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개인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문제인 것입니다. 묵시의 집단을 향한 말씀이지 역사적 개인주의를 위한 야고보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묵시에 속한 사람 같으면 이 말을 전부다 찬양하죠. 입에서 독이 나오는 게 아니고 찬양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찬양, 아까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것도 찬양하듯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야고보서 한 마디 할 때마다 찬양, 두 마디 할 때마다 찬양, 모든 지 감사. 세상에 이것보다 더 순결하고 정결한 열매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게 포도나무요 무화과나무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죄를 알아야 돼요. ‘이거 나쁜 거구나. 그렇게 되면 세상과 벗할 필요도 없겠구나.’ 순결한 게 있으니까.


3장에 대해서 래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에 선생 된 자가 많아서 선생 많이 되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것보다도 이건 혀에 관한 게 아니고 지혜에 관한 겁니다. 개인적인 용도로 지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지혜는 하늘에서 길들여져야 된다. 성령에 의해서.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땅의 더러운 세속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나온다. 세상적인 것이 3장 15절에 보니까 정욕이죠. 또다시 우리를 에덴동산으로 보내버려요.


그러니까 야고보는 구약 성경을 지나가 버린 것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로 하여금 악마와 대치 돼있는 에덴동산으로 넘겨버립니다. 그게 바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바로 악마와 짝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미 저주받은 상태인데 놀랍게도 흩어진 열두 지파는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았으니까 너희는 새로운 이스라엘 맞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분을 자유롭게 합니까? 거침없이 우리는 이걸 보면서 한 마디 뜰 때마다 아멘과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 다음에 4장 5절.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개인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넣어준 성령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죠.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주체입니까? 하나님이 성령하고 상대하면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보조로 우리를 붙여준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위해서라고 우리를 버릴 수 없죠.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은혜 주신다. 이것도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보통 하신 말씀 전체가 이걸 이야기하잖아요. 이것 하라면 어느 대목 댑니까?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했지요. 바리새인과 세리. 세리가 아예 고개를 들지 못했죠. 그리고 또 있죠. 수로보니게 여인이 왔을 때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하신 지혜를 야고보가 하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예수님 말씀 받듯이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너희를 가까이 하리라. 새삼스럽게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면 이 말씀 해당 안 됩니다. 이미 하늘의 지혜가 이렇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 놓고 이야기해야 되죠.


그 다음에 4장 11절에 보면, “피차 비방하지 말라” 이거는 딱 마태복음 7장 아닙니까. 비판하는 그것으로 네게 비판받을 것이다. 네 눈의 들보를 빼라. 그 이야기를 다시 한 거예요. 누가 입법자고 재판장이냐? 네가 뭔데 형제를 비판해.


그 다음에 4장 13절에 나오는 안개 이야기. 예수님 같으면 무슨 이야기합니까? 아버지 장례 지내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고 너는 날 따르라. 그리고 부자가 와서 ‘난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할 때 너는 모든 걸 다 버리고 날 따르라.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또 너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뭘 구하라?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예수님 말도 못해요, 야고보가? 예수님 말씀 그대로 하고 있는데. 야고보가 거부한 것 같으면 우린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보지 말아야 돼요. 이미 구원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답게 하고자 주신 거예요. 그것도 우리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니까.


5장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이거는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잖아요. 이미 배부른 자는 통곡하라. 똑같은 이야기에요. 웃는 자는 차라리 울어라. 우는 자야 너희들이 기쁘다. 또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나오잖아요. 예수님 이야기 그대로 아닙니까. 그동안 괜히 이천 년 동안 야고보만 욕 얻어먹었어요. 예수님 이야기만 그대로 했는데.


여기 삯을 주고받고 하는 이 이야기는 역시 예수님 이야기에 나오죠. 종 이야기, 포도원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주인이 올 때 작살내는 이야기.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 땅에서 삯을 못 얻더라도 지혜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수모 받았기 때문에 우린 그 지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오히려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7절에 이른 비, 늦은 비 이야기하면서 9절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이거야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한 겁니다. 참새도 하나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 그걸 현장화 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렇습니다. 빵에다 뜨거운 버터 넣으면 어떻게 돼요? 피자에 치즈 얹으면 치즈가 어떻게 됩니까? 녹아서 스며들지요. 지혜는 녹아 스며듭니다. 이 지혜는 무슨 지혜다? 나를 부인하고 이스라엘 지혜고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묵시적 단체를 위한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내 지혜가 아니고 하늘의 지혜죠. 하늘의 지혜의 아들이 누구냐? 이스라엘 흩어진 열두 지파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취지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구약과 단절되어 있는 진짜 이스라엘 취지가 이거라는 겁니다. 뭔가 치즈가 우리 안에 녹아서 내릴 때 우리는 치즈하고 아닌 것하고 구분하는 지혜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오해해서 “목사님, 치즈가 녹아서 내리면 나쁜 것도 없어져야 되죠”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요? 야고보나 예수님께서 항상 죄인 아니면서도 죄인의 길을 간 것처럼 우리가 이미 죄인 됨의 치즈로 완전히 포장을 해놓았기에 우리로 하여금 항상 위만 쳐다보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과 같이 우리는 죄인이니까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외칠 수밖에 없어요.


뒤에 엘리야 이야기도 나오죠. 엘리야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룰 때까지 참아라 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지혜라는 것이 참는데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려운 초대교회시기를 주님도 가신 길인데 고난의 길을 좀 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의 운명이요 참된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결론


지혜는 그리스도가 통과하신 그 인생길을 흩어진 12지파가 그대로 따라가게 합니다. 안개로서 사라지면서도 하늘에서 내려준 지혜는 우리의 행함을 통해 발산하게 되어있습니다.

출처 : 예수피교회
글쓴이 : 김종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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