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이라야 나를 볼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성령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하라.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는 나를 만날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나를 만날 수 없다.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
남들의 이목을 피해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이 말씀에 덧붙여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당신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이 말씀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생은 차치하고 성령을 만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는 형식적이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영생을 확신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와 더불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영적 습관을 들여야 한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각종 공적 예배의 참석만으로 보장할 수 없다. 사실, 성경에서 요청하는 예배(Worship)조차 우리가 드리는,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축도로 끝나는 1시간짜리 예배의식(Worship Service)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예배의 삶을 예배의식으로 대신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신앙행위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함축하는 예배의 삶을 요구하고 계시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려면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르며 간절하게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찍 와주시는 법은 거의 없다. 적어도 몇 달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견고한 믿음의 유무를 지켜보시고 계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런 기도에 무지하거나, 설령 기도를 시작하여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자들에 보상해주신 다는 것을 확신하는 마음이다.(히11:6)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이다. 물론 장기간 기도에 전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들을 포기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도 즐겨하는 취미생활도 포기해야 한다. 제자가 되려면 부모나 자녀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조차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권면이 그러한 이유이다. 많은 이들이 세상에 즐기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 기도에 전념하는 영적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것은 물론 형통하고 평안한 삶을 덤으로 얻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97. 가난하고 추운 자를 위한 목회를 하라. 세상에는 세속적인 교회가 너무 많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역, 신앙의 짐을 지지 말고 순종하는 자세로, 계산된 믿음으로 하지 말고 순종하는 자세로.
가난하고 추운 자를 위해 목회하는 사역자를 보기 드문 게 작금의 우리네 교회의 현실이다. 필자가 이 교회 저 교회로 세미나를 다녔을 때, 식사자리에 참석한 부목사에게 향후 목회비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개척은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괜찮은 중견교회에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가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그래서 중대형교회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얻기 위해, 적지 않은 학비를 들여 외국의 이름 없는 대학의 목회학 박사학위라도 받으려 애쓰고, 큰 교회에서 부목사의 경력을 쌓으려고 한다. 이들의 소망은 융숭한 대접을 받아가며 부유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달콤한 목회를 선호하는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목회자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범한 목회자일 뿐이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은 아니다. 초대교회 시절의 사도들과 교회지도자들은 춥고 배고픈 사역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굶주리고 학대받는 것은 물론이고 고향과 가족을 떠나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그런 사역자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럭셔리하고 부유한 교회의 담임목사의 사례비는 웬만한 대기업의 사장연봉이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더구나 특별한 과오가 없다면 정년까지 보장되어 있으니 말이다. 필자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교역자로서 일반적인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아서이지,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소망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령님의 말씀은 매서운 겨울날의 얼음목욕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세상에는 부와 성공, 명예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교회가 차고 넘친다고 하시면서, 이를 멀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역’은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내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잠27:23)의 성경구절에서 해답을 찾았다. 작금의 대형교회는 너무 사람들이 많아 교인들의 개인적인 삶을 잘 살필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작은 교회는 교인들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보다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려는 곳이 적지 않다. 교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의 이름을 내건 종교시설일 뿐이다. 덧붙여서, 사역자에게 요구하는 태도로서 순종을 강조하셨다. 일부는 의무감에서 하지 못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과 세상의 지혜로 사역을 하는 이들도 허다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경건의 모양으로 속내를 가리는 사역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들이다. 그런 교회에서 삶의 자유를 잃고 신앙의 짐을 얹을 채 방황하고 유리(遊離)하는 양들이 너무 많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책임이 작지 않다. 스스로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있는 셈이다.
98.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하라. 머리로 사역을 하지 말고 가슴으로 사역하라. 수고한 짐을 맡겨라.
주의 사랑을 전하라는 말씀은 너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해빠진 구호로 보이는 게 필자만의 눈에 비친 생각일까? 이제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중가요의 가사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정체성은 사랑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요청하신 것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방식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냉정한 세상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볼 수 없겠지만, 교회 안에서 조차 진정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아쉽다. 이 역시 교회에 하나님이 떠나신 까닭이다. 성령께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을 하며 성령과 동행하는 삶으로 채운다면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리며 촘촘하게 계산된 믿음으로 사역을 하지 말고, 성령이 주시는 사랑의 감동으로 하라고 하신 이유이다. 물론 풍부한 재정과 충성스런 일꾼들이 준비되어 있다면 어려움이나 고통도 덜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항상 가슴속에 가득 채워야 한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 애쓰는 게 실제로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우선이다.
99.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는 것이 능력이 오는 비결이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희미한 기도를 하지 말고 분명한 기도를 하라. 기도와 말씀으로 능력을 키워라.
적지 않은 시간동안 성령의 말씀을 영음으로 들으면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내용이 나름 머릿속에 윤곽이 그려졌다. 그중 하나가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라는 주문이다. 기초체력이란 기도와 말씀을 가리키며, 필자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 양들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초체력의 연마가 능력이 오는 비결이라고 하시니, 더욱 그 중요성이 실감난다. 모든 교회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예배의식이다. 일주일에 서너개의 공적 예배가 있고, 새벽마다 열리는 기도회도 예배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배의식에의 참여가 곧 참다운 예배행위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고 예배의 삶과도 거리가 있다. 형식적인 예배행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것과 맞물린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행위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배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의식에 참여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한다.(요4:24) 즉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시간낭비인 셈이다.
기도응답이 오고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하고 평안한 삶을 체험하려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적절한 때를 따라 응답해 주신다. 그런 체험을 할수록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교회에 오래 다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무거워질수록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삶의 지난한 문제가 해결되는 기도의 경지에 오를수록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없다면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게 되며, 영적으로는 죽은 신앙의 상태가 된다. 영적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기도와 말씀을 능력을 키우는 것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길만이 형통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이요 천국의 자격을 얻는 열쇠이다.
100. 가만히 들어오는 영을 조심하라. 그들의 계획은 공격이다. 신령한 은혜를 구하고, 먼저 욕심을 버리라.
필자가 몇 달 전에 귀신들려 완전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 집사님에게서 어렵사리 귀신을 쫒아냈다. 원래는 조용하고 말수가 없으며 겸손하신 분이라고 했지만, 귀신들린 이전의 모습을 알리가 없던 필자는 그러려니 했다. 귀신이 나가고 완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그 분은 말이 많고 교만한 모습을 보였다. 순간 필자는 악한 영이 생각을 통해 공격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챘지만 그 집사님과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나고 나서 그 집사님의 부인과 전화할일이 있어 근황을 물어보니, 사람이 이상하게 바뀌었다고 했다. 툭하면 화를 내고 짜증을 잘 부리며 식구들을 피곤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면,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집사의 몸에 들어온 귀신들은 나갔지만, 주변을 맴돌면서 생각을 통해 틈을 타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성령으로 무장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화나고 짜증나고 음란한 생각이 드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면 즉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생각을 쫓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신다는 말씀(빌4:7)이 그것이다.
귀신들은 소리 없이,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들어온다. 악한 영들이 조종하는 거짓형제(갈2:4)나 악한 사람들의(유1:4)의 특징은 가만히 들어오는 것이다. 악한 영들은 생각을 틈타서 공격하거나 사람의 몸에 침입하여 몸과 정신을 억압하고 생명과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간혹 따라서는 성대에 달라붙어 떠들어 대는 귀신들도 있지만 희귀한 일이다. 또한 천사나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영음으로 지시하는 일도 혹 있지만 이 역시 드문 일다. 악한 영들이 생각을 통해 공격하는 것과 몸에 들어와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여 생명을 사냥하고 정신을 황폐화시켜도 존재감을 들어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악한 영들이 가장 쉽게 공격하는 빌미는 탐욕과 방탕에 약한 사람들의 틈을 타는 것이다. 탐욕에 물든 사람은 일확천금을 앞에 두면 불법과 불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위법과 부도덕한 짓도 저지른다. 그래서 한번 덫에 걸리면 평안한 삶과 건강한 가정을 잃게 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과 음란에 빠져 불륜을 저지르기 십상이다. 이들 곁에는 악한 영들이 덫을 쳐놓고 그들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덫을 예방하거나 빠져나오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탐욕과 방탕함을 버려야 한다.
101.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라. 매사에 나를 요청하라.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라.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회자의 심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넘쳐나는 게 우리네 교회주변의 실정이다. 물론 자신들이야말로 영혼을 사랑하는 목자라고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겠지만 말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목자는 돈을 위해 생활을 위해 목회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섬기는 자세의 모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도의 삶을 실천하고 성경의 지식에 해박하고 깨달음으로 충만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돈 많은 신도들을 가까이하며 오직 교인의 숫자에만 관심을 갖는 목회자라면 영혼 따위에는 안중에 없다는 증거이다. 교단의 감투자리를 위해 피터지게 싸우며, 엄청난 돈을 내가며 방송설교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며, 불우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열악한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는 깎는 데 앞장서면서 자신의 연봉과 복지에는 관대한 두 얼굴의 모습이 그러하다. 입만 열면 영혼을 사랑한다고 말을 앞세우며, 만나는 교인들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광고한다면 이 역시 성직자의 모습은 아니다. 진정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목회자들끼리 모여 밥 먹고 정보교환시간이 있다면 침묵하며 기도하는 시간으로 대신하여야 할 것이다.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가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항상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셨다. 크리스천이라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지 못하며,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찾게 되듯이, 성령의 도움도 받아본 사람들이 더 간절히 찾게 된다. 하나님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지하는 태도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옆에 두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