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신학 1
(이천수 목사)
1. 은사의 정의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성경에서 은사는 ‘신령한 것’(고전·12:1) 또는 ‘성령의 나타남’(고전2:4)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자기의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역사한다. 또한 성령님은 권세자에게 순종하게 함으로써 마귀의 영을 물리치게 한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님께는 정욕을 따라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게 하는 마귀를 물리치고 우리 몸을 헌신케 하신다. 그리하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사람의 영과 세상의 영을 소멸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의 일차적 목표는 성령 충만한 생활이다.(엡5:18) 성령 충만할 때 마귀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수종드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서 밖으로 이웃을 회개시키고 성도에게 복을 주시는 사역을 계속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 즉 은사라고 한다.
2. 인생의 성공 비결
과연 은사를 통해서 어떤 축복을 받게 될까? 구체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가면 다시 몸이 약해진다. 사람의 일생을 그래프로 그리고 0세와 40세와 80세를 표기해 봅시다!
40세를 인생의 전환기로 보면 몸은 점점 약해지는 반면, 해야 될 일은 점점 많아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에 비해 어린아이들은 몸의 에너지는 잔뜩 있으나 성취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에너지가 남아돌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장난이 줄고 철이 드는 것은 그가 해야 될 일이 많기 때문이다. 40세가 지나도록 장난하는 사람은 없다. 40세부터 사람은 점잖아지고 40세부터 그가 하는 말들은 인격을 반영하므로 진지할 뿐 아니라 매우 의미가 있다. 나이 40부터 사람은 다방면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육신적인 제약 때문에 누군가 대신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를 위하여 움직여 줄 사람이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나를 위하여 움직여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독방에서 외롭게 죽을 날을 기다려야 된다. 똑같은 인생을 살아도 나이가 들어 이렇게 된 사람은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성공할 확률이 점점 희박해진다. 나이가 들어서 성공하려면 더 많은 젊은 사람이 나를 위해 움직이도록 해야 되므로 점점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애쓸지라도 혼자서는 행복 할 수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인기라는 행복은 사람을 통해서만 온다. 출세하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온다. 부귀, 행복은 전부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불행지고 천해지는 것도 역시 사람을 통해서 온다. 한마디로 나는 사람을 통해서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왜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내가 잘되도록 돕고 어떤 사람은 내게 해를 끼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은 주고받고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지 않으면 그에게서 받을 것이 없다. 주어야만 받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이처럼 반드시 주고받는 관계로 유지되고 있다. 사람들은 받았는데 주지 못할 때 ‘미안’이라고 한다. 미안이란, 갚지 못해 불안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말로라도 갚으려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반드시 갚아야 된다.
이와 같이 나는 계속 주었는데도 받지 못하면 미움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계속 욕을 먹는 사람이 결국은 망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물질도 사람을 통해 움직이고 인정도 사람을 통해 흐르는 것이다. 저절로 물질과 인정이 흐르는 것이 아니다. 줄 것이 있어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줄 것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 피아노를 친다던가, 의시가 된다던가, 운전을 하는 것도 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줄 수 있도록 훈련받는 것이 교육이다.
주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육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서 주는 것, 곧 생산직이 있다. 기분을 좋게 해주거나 고민을 풀어주는 직업도 있다. 그것을 서비스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몸으로 주든지 기분이라도 좋게 해주든지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에 그 어떤 것이든 한 가지를 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돼지 키우는 사람은 열심히 돼지만 키우는 것이고, 다방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차를 나르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가 이러한 데도 보통 세상의 불신자들은 주기 위한 교육을 받고도 실제로는 받으려고 움직인다. 그들은 무엇보다 언제나 나를 더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받으려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받으려고 움직이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 마귀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살 때 마귀가 들어오고 본인과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손해를 끼친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옆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가게에 손님이 끓기고, 집안 식구들이 흩어지며, 기업이나 나라가 풍비박산 나는 것들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풍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텐데 남보다 내가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금 주고 더 받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옆 사람들이 한두 번 상대해 보고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상대를 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상대해 주지 않으면 가게도, 직장도, 가정도, 그리고 개인의 마음도 문을 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 것들은 다 사라진 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기관들이 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요일 2:17)
예수의 영이 없는 불신자들에게는 마귀로 가득 차 있으니까 예수가 아닌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한다. 자기한테 힘을 주는 것이다. 대개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힘을 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또 다른 마귀의 통로이다.(사14:13-15) 사람들마다 제각기 자기를 의식하는 방향들이 다 틀리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예쁜 자기 모습을 통해 자기를 느끼고 의식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만날 때 만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것 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는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자기를 의식하는 면들이 자의식의 포인트이다. 주먹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를 만나면 자기 주먹을 내보이고 그것을 믿고 힘을 준다. 사람마다 자기를 의식 하며 잘 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연속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그래서 자연히 나를 위한 수입이 없어진다. 무엇이라도 줄 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것과 바꿀 텐데 바꿀게 없으니 초조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바꿀 것이 점점 없어져서 실패하게 된다. 나이가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3. 은사의 유익
그렇다면 줄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으로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바로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나눠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겉 사람은 약해진다.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한데도 내게는 그 도움을 받기 위해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내 속에 있기만 하면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겉 사람에게 투자할 것이 아니라 속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앞날을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다. 속사람을 개발시키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투자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해지게 되며 그를 통해 성령이 역사할 때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생각과 재빠른 계산을 통해서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표현한다. 그가 표현할 때마다 마귀가 역사해서 하는 일마다 손해를 보게 된다. 나보다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손해이다. 나보다 머리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손해이다. 나보다 배짱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손해이다. 나보다 손재주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손해다. 언제든지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손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좋아 한다. 바보,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 어린아이들한테는 손해 볼 것이 없다. 바로, 멍청이에게 당해서 손해일은 없다. 그냥 동정만 해주면 된다. 그것이 훨씬 안심이 된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싫어한다.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렇게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손해 보게 할 수밖에 없다. 짐승처럼 말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움직였다 하면 말썽이 생기고 움직였다하면 손해를 보게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전부 다 문제투성이로 만들어 놓는다.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누군가가 출세를 했다면 많은 사람을 속였다는 뜻이고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권세와 부를 누리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압제하고 빼앗는가? 그렇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가 그런 식으로 잘 되도록 섭리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면서 복을 받도록 만드셨다. 그것이 은사(성령의 나타남)이다(고전 4:2, 고전 12:7) 모든 믿음 자는 영적으로 복을 받는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복을 받는 것이 은사이다. 은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다. 목회를 하되 몸으로 봉사하고 대가를 받는 서비스업 식으로 하면 안 된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나타남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은사이다. 그러므로 목회를 할 때 은사를 무시하면 안 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4. 은사의 나타남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4-11)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그릇대로 주셨다. 은사는 대체로 소질과 같은 통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머리가 좋은 사람은 마귀가 머리를 통해 역사하게 된다.
(1) 지혜와 말씀의 은사
가룟 유다가 돈 계산을 잘해서 마귀가 미리 붙은 것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은 마귀가 머리를 통해서 역사한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 사람의 머리를 통해 머릿속에 있는 마귀의 세상 생각을 다 쫓아내고 대신 성령의 지혜를 주신다.(고후10:5) 그것이 지혜의 은사이다.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리를 통해 오기 때문에 응답이 머리로 온다.(고전 12:8)
능력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손이 묵직한 느낌을 받는다든가, 또는 가슴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것을 체험한다. 이것은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머리로 응답이 오기 때문에 쉽사리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지혜가 머리로 오면 그것을 말하기만 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가 말한 것을 지킬 때 형체화가 된다. 문제가 해결되고 병도 낫게 되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몸은 적게 움직일지라도 예수를 통하여 잘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모든 성도들은 다 이렇게 살수가 있다.
하루라도 더 늙기 전,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많은 기도를 통해 은사를 개발해야 한다. 성령 충만해야 참된 삶을 살수가 있다. 시간을 아껴서 예수를 채우고 예수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만 구하려고 노력해라! 그러면 필요한 것들은 저절로 다 공급된다.(마 6:33)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교회만 일주일에 한번 씩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 충만 받아서 회개하고 복종하고 예배드리고 성령으로 교제하므로 말미암아 큰 축복을 받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곧 나의 성공이자, 나의 행복이며, 나의 영광이다. 무엇이든지 예수로서 얻을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추상적인 일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다. 머리로써 나를 나타내고 나를 확인하듯, 그 통로를 통하여 성령님이 오셔서 내 머리로서 주님을 깨닫고 나타내고 전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상품’을 꼭 개발해야 한다. 예수상품을 개발해 주고 필요한 것을 받아야 한다. 예수상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비참해진다. 다른 것은 염려할 것 없이 오로지 은사만 개발하면 된다. 보험회사 직원이나 변호사들은 입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얕은 지식으로 나발 나발 하기에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말이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 손해 본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을 하게 해야 한다. 성령으로 말을 하게 되면 성령이 나타나게 된다.
고린도전서 2장4절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했다. 말을 통해서 성령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으로 말을 하면 자연히 마귀가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마귀가 나가면 마귀 보따리 다 가지고 나가니까 그 사람이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말씀을 통해서 마음속에 있는 마귀가 나가면 답답한 심령이 뻥 뚫리고 훨씬 가벼워진다. 사람의 말은 듣는 이들의 귓전까지만 전달될 뿐 그 말을 통해 마귀를 쫓고 환경을 고치는 것은 성령님뿐이다.
말은 귀로 듣고 머리에 들어가서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 올 때 비로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우리 목사님 말씀 재미있게 하시네, 참 멋져!”하는 식은 말씀을 머리로 듣는 것에 불과하다. 말씀이 머리에서 목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단순히 귀로 듣는 음성이 아니라 목 밑으로 내려가서 눌린 것들을 전부다 걸러내고 다 청소 해내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을 통해서 교인들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사로잡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은사’이다.(고전 2:5)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소에도 말을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말이란 것은 영의 통로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 반드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거나 마귀의 영이 역사하게 된다. 이 영의 통로가 여러 가지 다른 영으로 인해 혼전되면 마치 전깃줄이 합선된 것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말조심해야 하고, 곡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말, 은혜로운 말, 상대편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말만 해야 한다. 쓸데없는 소리, 무익한 농담도 하지 말아야 한다.(엡 5:3-4; 약 1:26)
(2) 믿음과 능력의 은사
성령의 은사가 밑으로 내려가면 배짱의 은사! 즉 믿음의 은사가 된다. 배짱 좋은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자꾸 일만 만들어 내기 때문에 사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매우 피곤하다. 그런 사람의 아내는 돈 얻어 오기 힘들고 이자주기 바쁜데도 또 딴 데 가서 사업한다고 일을 벌여 놓은 배‘짱 좋은 남편들 때문에 애를 먹는다. 그 사람들의 밑천은 배짱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 배짱을 주장하시고 사용하시면 믿음의 은사가 된다. 그 동안은 마귀를 통해서 앞뒤도 재지 않는 무모한 배‘짱을 부렸지만 이제는 주님이 권세를 주셔서 친히 예수 배짱을 부리게 하신다. 그것이 믿음의 은사이다. 산을 바다로 옮기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배짱인 것이다(행 3:6-7)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주여! 어찌하오리까?”하고 힘없이 앉아 있으면 무슨 일이 해결되는가? 더욱이 제각각 입만 살아 가지고 나불나불 떠들어대고 서로 비난하기에 바쁘면 일은 누가 하고 어느 누가 돈은 내겠는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 없이 머리로 잔뜩 계산만 하는 사람들은 한마디 쓸모없는 사람들이며, 어려운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배짱 없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다. 목사님하세요! 제가 밀어 드리겠습니다.“ 하면 목회자는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도 힘을 얻고 더불어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는 반드시 이런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목사님이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성령님이 주시는 배짱은 믿음의 배짱임으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이처럼 배짱을 통해서 오는 은사는 믿음의 은사이다. 모세가 정탐꾼을 보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배짱이 없어서 ‘아이쿠 키가 정말 크다. 저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것은 우리의 밥이다 그 땅은 내 것이다’라는 배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죽어 갈 때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눈도 어두워지지 않고 쌩쌩하게 살아남았다.
인생은 배짱의 대결이다. 머리 나쁘고 못생겨도 괜찮다. 배짱 하나 가지고 밀고 나가면 된다. 대체로 믿음의 은사가 있는 분들은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고 외모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움직이기 때문에 큰 역사를 일으키고 많은 영적 역사가 나타난다. 그들은 배짱을 통해 응답을 받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무엇인가 될 것 같다는 느낌 있으면 배짱이 생깁니다. 사실 배짱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배짱 또는 믿음이 올 때 입으로 시인하고 순종해야한다.(롬 10:10)
심방을 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하다 보면 손만 얹으면 금방이라도 나을 것 같은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담대하게 성량께서 주시는 감동대로 순종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쓰시려고 하실 때는 언제든지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믿음이 올 때는 반드시 입으로 시인하고 순종해야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믿음으로 상대에게 기도를 해 주는 것과 더불어 상대방도 그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내가 당신을 안수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나을 것이다. 입으로 시인해라” 배짱이 클수록 사실 매우 큰일을 합니다. 같은 목회자들 중에서도 배짱을 가진 목사들이 교회도 빨리 부흥시키고 큰일들을 한다. 믿음이 산을 옮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사이다.
(3) 사랑과 섬김의 은사
내성적인 사람들은 주로 마음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사람들이다. ‘난 참 의로운 사람이야. 난 참 착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해주지’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믿고 스스로를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보통 내성적인 사람은 그렇게 못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전연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받거나 비난이라도 당하게 되면 마음이 무척 상한다. 그런데도 그의 성격상 같이 맞대 놓고 욕을 하거나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낸다. 마냥 참다보니 이들은 마음의 상처가 많다. 마침내 그 마음의 상처가 자꾸 많아서 한 많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족은 대체로 내성적인 민족이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다른 나라를 한 번도 공격한 적이 없고 도리어 침공만 당했다. 쳐들어 간 것은 몇 년 전에 미국에 따라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밖에는 없다. 그만큼 내성적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국은 실속 없이 외부의 용청에 대해 냉정히 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잘해 주다가 상처를 받아 한만 쌓인 역사를 살아온 것이다. 한이 쌓이면 병이 나고 병이 나면 반드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기 마련이다. 결국 병자는 외로워지게 된다. 하지만 마음속에 성령님이 오시면 그 한 많은 속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우게 되는 것이다(롬 5:5)
주님은 인격이기 때문에 그분의 지혜와 믿음을 우리 안에 채울 수가 있다. 주님의 사랑이 사람의 한을 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내성적인 사람은 이렇게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슬픔을 소멸하시며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신다. 하나님의 기쁨을 내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굳은 혀가 부드러워지고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고 방언이 나오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주님의 마음이 계속 해서 쌓이면 내 속에서 주님의 은성이 들린다. 주님의 음성이 속에서 들리는 것이 곧 기도의 응답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처럼 눌림 받은 사람을 이해하고 동감하여 사랑으로 도와주게 된다. 이것이 섬김의 은사요, 섬기는 은사이다.(롬 12:7-8)
특히 방언을 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 하셔서 내 모든 생각과 감정을 소멸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생각이 나게 하고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방언통역이다. 또한 우리 마음에서 성령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바로 예언의 은사이다. 이처럼 예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면 우리 속에서부터 예수의 말이 나오게 된다.(고전 2:16) 또한 손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은 특별히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역사나 마귀를 내쫓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성경에 “여로와의 팔이 뉘게 나타낫느뇨”(사 53:11)라는 말씀과 같이 다니엘 시대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썼고 이를 본 벨사살 왕은 정신이 빠져 그 밤에 나라가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단 5:5-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과 자신의 손과 같은 능력의 도구로써 주시는 분이다. 앞에 말해 듯이 그런 사람들은 손이 묵직하고 전기가 오는 느낌이 있다든지 혹은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만 하면 그의 병이 나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이 능력의 은사요, 병 고치는 은사요, 귀신 쫓는 은사이다. 이런 사람이 안수 기도를 하면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처럼 능력이 손에 나타난 사람은 심방을 할 때 손을 통해 주님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며 무조건 말씀만 전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것이 은사의 필요성이자 유익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은사에 따라 손을 얹어 기도해 주고 따뜻하게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시기 바란다.(마 16:18)
주일학교 교사들 가운데 대체로 능력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말솜씨는 유창하지 못하다. 말로 재미있게 이끌지 못하면 학생들은 유창하게 말 하는 선생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능력의 은사를 받은 교사는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학생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주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면 아이들이 정신이 바짝 나서 교사들에게 잘 호응하고 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몇 번하다 보면 주님의 능력으로 아이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잘 가르칠 수가 있게 된다.
이처럼 주일학교에서도 은사를 활용하여 말로서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사는 손으로 하고 어떤 교사는 사랑으로 안아주고, 쓸어 주고 만져 주고 위로해주고 쓰다듬어 주면 아이들에게 놀라운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자꾸 어루만져 주고 쓰다듬어 주라! 아무리 말을 듣지 않는 아이라도 계속적인 교사들과 의 따뜻한 접촉이 있으면 이를 통해 전달되는 주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잘 녹여 옥토를 가꾸는 기적이 일어난다. 어른 심방에서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섬김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만져 줌으로써 불안하던 사람, 우울한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아 난 집사님 보기만 해도 참 좋아요”라고 한다. 사랑의 통로가 열린 사람들은 다른 심령들을 만나면 손으로 만져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눅 7:14) 이처럼 손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랑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각자 자기에게 열린 은사의 통로대로 목회를 하면 반드시 성공하게 된다.
제가 몇 년 전에 기도원에 갔을 때 어떤 권사님을 만났다. 그 권사님은 나이가 많은 분이신데, 그 권사님의 소원은 죽기 전에 주님의 일을 한번 해보고 죽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어느 섬에서 심방 전도사로 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분에게 걱정이 하나 있었다. 심방을 다니려면 말을 잘 해야 하는데 그분은 어눌하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고민하다 하도 답답해서 기도원에 오셨는데 마침 저를 만난 것이다. 제가 그 권사님을 보니까 그 권사님은 섬김의 은사를 가진 분이었다.
대개 섬김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말에는 서툰 경우가 많다. 마음과 손으로 사역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그 권사님께 말하기를 “권사님, 염려하지 마시고 가셔서 설교는 하지 말고 그저 손을 붙잡고 찬송만 부르면 나머지는 성령님께서 다 해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때그때 감화를 주실 것입니다. 권사님 모습만 봐도 사람들이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가세요.”라고 말씀드렸다.
목회라고 해서 누구나 다 말을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성령님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만져 주고 베풀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꾸 갖다 줄수록 더욱 크게 역사한다. 비누도 사다주고, 과일도 갖다 주고, 따뜻이 어루만져 줌으로써 성도들을 섬기고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