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이시군요.. 축복합니다.. 기도만 많이 한다고 다되는것 아니지요.. 이말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하루에 열몇시간 기도한다고해서 그 기도가 성령이 인도하시는 영적인 기도가 아니라면 그저 인간의 혼적인 활동에 불과한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도라.. 목사님 기도에 대한 묵상은 주기도문을 묵상하시는것이 가장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설교문이 있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생각에 올려봅니다. 조금 깁니다. 하지만 굉장한 은혜가 있습니다. 싸이트도 올려드릴께요. 여기 들어가시면 기도에 관한 강의문이 꽤나 많거든요. 특히, 게리윈즈 목사님께서 기도에 관한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 두 강의에서는 특별히 아버지에 관해 많은 말씀을 나누신것 같네요.. 기도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것중의 하나는,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때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분으로 인지하고 나아가느냐 이기 때문인것 같아요.. 기도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강의안을 보고싶으시다면, 싸이트에 들어가셔서 목록을 보시면 많은 강의안이 있습니다. 게리윈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는 특별히 중보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그냥 기도가 아닌, "아버지 안에서 하는 중보" 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하는 기도야말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1월 7일(월) 오후1시 기도자영성학교1 <첫 번째 강의> -게리윈즈목사(말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가 히브리서 2:12절에 있는 말씀이다. (히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이 몇 날 동안 이것이 제 마음 가운데 있는 부르짖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 가운데 계시해 주시기를 소원한다. 우리가 오늘날의 방식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갖는 것은 또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성령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해 주신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소원은 이러한 일들이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동안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를 원한다. 주님의 영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초청하셔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바로 그 일을 우리 가운데 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그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 가운데 주님이 거하셔서 아버지를 우리 가운데 더 계시해주기를 소원해야겠다. 이것이 제 마음 가운데 있는 소원이고 부르짖음이다. 이 나라를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그러한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깊이 느끼는 것을 기도하길 원한다. 성령님! 우리에게 오셔서 나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소리를 높여서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우리 가운데 행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실제로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날이 곧 오고 있음을 제가 믿고 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백성들 가운데 서셔서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할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날이 올 때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소원하는 것들이 다 성취될 것이다. (히2:12)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께서 훌륭한 워십리더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계시는가? 음향 시설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특별히 제가 한 주간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특별히 중보기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길 원한다. 성령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시대에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그 백성들의 기도와 협력해서 일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셔서 모든 나라 가운데 기도를 통하여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행하실 때에 세상에 있는 통치자들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열국의 나라의 운명이 결국 중보기도자들이 기도하는 그 기도실에서 이루어진다. 중보자들이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는데 이르게 될 때에,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 가운데 행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닫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자리로 우리가 이르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되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의 의해서 그것은 덮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아주 두렵고 놀라운 일이 이 지구상에 행해질 때에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이 땅에 쏟아질 때에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친절하심을 담는 상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캔자스시티에 있는 기도실에서 늘 사용하고 있는 기도제목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최소한의 압력과 압박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우리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당신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동기되어지고 움직여진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인 확신 이상의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우리 마음 가운데서 경험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지식이다. 그래서 우리를 확신 가운데 붙잡아 두는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깨달을 때인 것이다. 물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좋은 신학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말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노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 뭔가 사랑을 느끼는 것은 뭔가 말을 해야 될 말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음악과 시들이 있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는 단순히 말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나타내기를 우리가 소원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한 가지로 집합이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로써 우리를 늘 껴안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한 사도바울이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모든 교훈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옆으로 제끼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 한 가지 것에 비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온 지구상에 기도의 집을 일으켜 세우시는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하는 제일 첫 번째 목적이 낙태를 근절하는 것이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의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낙태가 근절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첫 번째 일은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하는 제일 첫 번째 목적이 북한이 해방되는 것이라면, 또한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역시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기도제목들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일 첫 번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다. (빌3장) 내가 그를 알기를 원한다.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마음에 부르짖는 첫 번째 소원이 된 것이다. 바로 그 한 분을 아는 것이 기도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그 하나님을 아는데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가지고 계신 그 놀라운 것들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또한 우리가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기도운동 가운데 여러분들이 참여하기를 제가 간절히 간청한다. 그것은 제일 첫 번째 것에 첫 번째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의 사랑을 아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를 우리가 기도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경험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하시는 것이다. (마6장) 기도학교에 있어서 제일 첫 번째로 제가 가르쳐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마태복음 6장에 나와 있는 것을 누가는 이렇게 소개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직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이렇게 요청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장 영향을 주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인데, 그것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자 고치는 법을 물었을 듯하다. 그래서 어떻게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많은 이들을 먹이는지도 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날 폭풍이 몰아치는 밤, 하나님께서 단 말씀 하나로 그것을 잠잠케 하신 것들의 방법을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두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 묻지 않았다. 그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삶에 실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기도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본 것이다. 그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던 것과 다르게 권세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권세 있게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성경 이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는 데 단순히 말씀으로만 쫓아내셨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쳤을 때 다 놀랐다고 말씀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 말씀이 그들이 그 배 한 가운데를 쳤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자 같이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제자들은 매일과 같이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제자들이 결국 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삶이다.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 것이다. 마태는 이렇게 그것을 가르친다. (마6:5)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셨을 때 마음에 동기에 관한 문제로부터 시작하신다. 네가 왜 기도 모임을 나가려느냐? 사람들에게 바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나가느냐?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 모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앞으로 그 기도모임에 나아갈 때에 네 생각 가운데 제일 앞선 동기가 무엇이냐인 것이다. 출석표에 표시를 하기 위해서 나가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이미 그 상급을 받았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회에 나오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 마음에 비밀한 것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와 교제하시길 바란다. 이번 주에 제 사랑하는 아내를 지금 미국 워싱턴 시애틀에 남겨두고 왔다. 제가 하루 동안 안 봤는데도 제가 제 아내를 정말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아내와 나눴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있는 은밀한 이야기는 옆에 탁목사님이 없을 때 나누겠다고 했다. 지금 탁목사가 앉아 우리 얘기를 듣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은밀한 것들은 은밀한 가운데 이야기하길 원한다. 이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이렇게 공공장소에 있더라도 은밀한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공공적 기도모임에 나가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님 아버지와 신랑되시는 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달콤한 교제를 가질 수 있다. 은밀한 가운데 내 마음을 보시는 주님이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너희 마음 가운데 있는 비밀한 것들을 간직하는 법을 알라고 하신다. 사람들에게서 떨어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사람 앞에서 갚아 주신다고 한다. 캔자스는 MISTY 가 많이 공연하는데 10년 전 그 자매가 처음 왔을 때 기도실 보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 있는 걸 즐겨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있는 걸 좋아 했다. 사람들이 가장 작게 모이는 곳에 자기를 예배하게 해 달라 했다.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한분에게만 자기가 보여지길 원했다. 그런 수년에 걸쳐 은밀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기도하는 것을 개발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수년 간 교제를 통해 예언적 음악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클 목사님이 너의 노래가 앨범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근데 미스티는 기도실에서 나와 음악을 녹음하는 것이 제일 힘든 것이였다. 앨범이 나온 후 , 그녀는 기도실에 갈 수 있어서 좋아했다. 그러나 앨범이 더 나오길 원하자 그녀는 두려워하게 됐다. 어느 날 기도실에 들어가니 자기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울게 되었다. “나 저거 아주 싫어해요. 나는 내가 예수님 앞에서 보여지길 원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은밀한 장소로 나아가라는 것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이 약속한 대로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서 상급을 준 것이다. 내가 말했습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이 너를 보길 원한다면 너는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앨범이 나온 이후에도 미스티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은밀한 교제를 개발 할 때 하나님이 더 많이 채워주셨다. 우리가 만약 주님의 숨겨진 집에 있는 자가 된다면 주님의 궁전에서 흥황하게 되는 것이다. (마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특별히 우리가 무얼 말하고 어떻게 말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는 위엄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어쩔 때 웅변적으로 아주 멋있게 말할 수 있다. 아주 큰 목소리와 더 큰 열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한다. 저는 웅변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아름다운 그 웅변적인 말로 너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말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능력의 말은 우리가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밀한 기도의 자리에서 그 능력이 개발되어 진다. 열심과 열정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응답하는 것,, 그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자신감을 갖지 말라.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자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점에 너희가 더 확신을 가지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듣고 계시며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 네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아신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지금 무얼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시고 듣고 계신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에는 우리가 무얼 구해야 하는지를 참 사랑하고 좋아하신다. 우리가 성경 가운데 계속 연구해야 하고 묵상해야할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하나님께 요청하고 구하는 것이다. 특별히 아버지로써 아버지에게 나아가 요청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또 두 번째는 온 우주의 왕으로써 그 앞에 나아와서 요청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알았다. 아버지로써는 아주 지극히 적은 것 가지고라도 나와서 요청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로써는 여러분에 관한 지극히 적은 것, 자세한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까지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언제 일어나서 방에 나가는 것까지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 앉을 때 늘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주차장에 있는 그 작은 공간을 아시는 것처럼 우리 삶에 아주 지극히 적은 것까지도 자세하고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내가 꼭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을 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골프를 할 수 있는 좋은 날씨를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때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우리가 다 염려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지극히 적은 것 하나도 다 돌보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께 나올 때는 아주 크고 거대한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통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아주 크고 거대한 일들을 요청하는 것이 왕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익숙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왕과 그 아버지가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에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 그 대통령에게는 2자녀가 있었다. 그 때 대통령이 여러 사람과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 그 때 그 아들 존이 직무실 앞에서 아버지께 뭔가를 요청할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린 존이 그 아버지 직무실에 들어가서 선 것이다. 우리도 이와 동일하다. 우리도 아바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있는 지극히 작은 것까지라도 다 알고 있다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완전한 시간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보기도자로 왕 앞에 나아갈 때는 모든 나라의 문제들을 가지고 그 분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해한데로는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지정하고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어떤 왕들을 세우기도 하고 내려 앉히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모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바르게 하느냐가 아니다. 또 기도할 때 IHOP이 하는데로 하프 앤 보울데로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에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을 일으키는 그런 방식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지식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모든 형식적인 것들은 다 제쳐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지금 형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할 확신은 다음절에 나온다.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은 우리가 아주 수세기 동안에 걸쳐서 가장 잘 알려진 기도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고정적으로 늘 기도하는 기도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늘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그런 기도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짧은 구절 속에 아주 놀라운 깊이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도 주기도문의 이런 내용을 가지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밭을 갈기 원한다. 제자들이 요청한 것은 당신이 인간으로써 가지고 있는 그 영향력의 깊은 샘 근원을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신이 이 지구상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어놓고 있는 그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바로 여기에 우리 삶에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행하고 있는 것이 아주 놀랍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써 하나님을 가르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종교적인 사람한테는 굉장히 거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이해 가운데에서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있다는 것을 믿어왔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마저도 꺼려했다. 그래서 수세기동안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가진 것이 아주 오랫동안 있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이름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취해서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아빠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가장 어린 그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방법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네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 있냐고 해석했다. 여기 한 인간이 있다. 그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는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다. 그 하나님을 전달하고 이야기하는데 그 당시 있었던 모든 규칙과 규범을 다 무너뜨리고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 가운데 그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만들고 계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비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들이 잘못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뒤로 물르셔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것을 보고 나도 행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보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신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절대 혼동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오직 세 가지 가능성만이 있다. 예수님이 그 지옥에 던져져야 할 마귀이거나, 아주 정신이 나간 사람이든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인 것이다. 어떤 중간지대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좋은 분인 것만이 아니다. 그런 모든 가능성이 그에게 열려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도망가든지, 아니면 그 분 앞에 엎드려 예배하든지 그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빠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주 놀라운 진리가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내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놀랍지 않은가? 이 말씀이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충격을 주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팔을 뻗어서 우리를 이끌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너희들은 나의 형제요 자매라고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것을 가끔씩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그냥 아주 궁극적으로 다 자기 안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인류들을 초청해서 그와 하나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관계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과 하나되는 그 자리로 우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방인도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머무르고 계신다. 우리들은 그 첫 번째 난 자들의 무리들이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두 번째 등급으로 태어난 자녀들이 아무도 없다. 유대인의 문화 가운데에는 장남이 상속에 두 배를 받는다는 것을 아시는가? 예수님이 그 많은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첫 번째로 나신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첫 번째 난 장자의 무리들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2등급의 자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줄을 설 필요가 없다. 기다리실 필요 없다. 바로 이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2008년 1월 7일 (월) 오후3시 기도자영성학교1 <두 번째 강의> -게리윈즈목사(말씀)- 쉬는 시간 동안에 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아내가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할 동안에 주님께서 제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제 아내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이 여러분 모두에게 격려가 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을 원한다. 나를 아는 것을 원한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어떤 무엇을 행하는 것보다 주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가 박힐 때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마6장) 예수님께서 그의 개인적인 기도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애정에 넘치는 친밀한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친밀한 관계로 여러분과 저를 주님께서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제일 먼저는 그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아주 긴밀하고 가까운 애정에 넘치는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도 아주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에 있다. 그 진리를 주님께서 더 확대하실 때에 내 아버지께서 행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우리를 더 흥분시킨다. (요5:19~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들을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것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것은 두 친구가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 같이 어울려 지내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도시 가운데 잠시 어울려서 지내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흥분하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부어주시기로 헌신되어 계신다. 그래서 이제 그런 사랑의 관계에 역동성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매일 아침 일찍이 그 장소로 나아가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음성을 들으심으로 그래서 이사야서 말씀에 보면 매일 아침 학자와 같이 자기 마음을 깨우쳐서 듣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그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매일 아침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교통하심으로 그날 행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서로 의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별되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한 번도 절대로 분리되고 떨어지신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분들 사이는 항상 열려진 교통과 교제가 있으셨다. 그래서 이런 것을 염두해 두고 복음서를 읽어보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행하셨는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아침에 은밀한 시간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드러내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아들에게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그날 만나는 모든 것 가운데서 아버지가 말씀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저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을 터치해줘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듣고 행하셨다. (요8:28)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창조성이 매일 같이 예수님을 통하여 흘러 나갔다. 이런 상황들이 복음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시각 장애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부르짖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말씀하신다. “이제 재밌는 일 좀 해보자. 흙에 침을 묻혀서 진흙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대로 행하셨다. 그 당시 모든 규칙들을 깨뜨리시고, 그 소경된 사람을 고치는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흥미롭게 상호간에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말씀하시는데로 씻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행하게 될 때에, 이제 흙에다가 침을 뱉는 것을 가지고 교단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눈먼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라고 규칙을 만들 수도 있다. 또 기름부음 받은 진흙이라고 사람들에게 광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역사했던 그런 것을 가지고 우리가 의식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오직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하는데 어떤 잘못된 것도 없다. 많은 분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데 아주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오직 한번만 구원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각 사람을 다룰 때마다 항상 흥미로운 방법으로 행하셨다. 아버지가 원하는 방법대로 바람은 부는 것이다. 어디서 그 바람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터치되는 것을 볼 때에 그 바람이 어디로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일을 항상 즉흥적으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그대로 이끌림 받으면서 자유함 가운데 사역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또한 사랑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는, 저의 여러분을 아버지와의 관계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와서 내 아버지를 그런 방식의 친밀한 사랑을 개발해 가라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안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알기를 열망하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자.”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더 이상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하지 말자고 하신다. 왜냐하면 종은 더 이상 주인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무리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 부르겠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알려주신 모든 것들을 이제 너희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제자들에게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에게도 역시 또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구약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인 선지자들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고는 내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아들에게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얼마만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는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나타내셨다. 아버지의 열망은 마음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 가운데 다 드러내시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버지가 아주 인색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갈 때가 많다. 열정을 가지고 나아갈 때조차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매달리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알고 있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아버지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그 아버지가 말하신다. “이것이 나의 뜻이다. 어떤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나의 성품과 나의 가치세계로 너희들이 내 안에 들어오면, 너희의 영이 나의 영을 닮아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너희들이 품기 시작하면 그럴 때 너희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래도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아버지께서 모든 열방을 이제 불러서 당신에게로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다음 구절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바로 그 아버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 아버지가 바로 내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또한 우리들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이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땅에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들도 다 부족한 것이 많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있는 아버지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정의하거나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 땅에 있는 아버지의 상을 가지고 접근 할 때는 그 이해가 충분치 않다. 그것은 아주 오류가 많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있는 아버지도 결점과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는 다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아버지와 연결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가 참 쉽다. 우리가 아주 어린 아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를 바라볼 때, 우리가 할 때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들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우리가 땅에 있는 지상에 아버지를 바라볼 때, 우리가 항상 생각할 때는 아버지는 항상 이렇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어떤 생각을 만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영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부성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우리가 땅에 있는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 부성이 무엇인가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지상의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패러다임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적용이 되고 있다. 그 분에게는 어떤 왜곡되고 구부러진 것이 없다. 그 분에게는 어떤 어두움도 없다. 그에게는 어떤 물질적인 동기도 없다. 그에게는 어떤 이기적인 동기도 없다. 그 분은 여러분을 완전하게 사랑하는데 한 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다. 그 분은 절대로 여러분을 내버리지 않으신다. 여러분들의 그 죄에 대해서 날마다 기록하고 계신 분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항상 여러분의 말을 듣고 계신 분이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항상 가진 생각은 좋은 것이고 놀라운 것이다. 항상 우리를 위하시지 우리를 반대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여러분의 지상의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돌아서서 하늘에 계신 그 분에게 여러분의 눈을 고정시키십시오. 그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하셨던 그 아버지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그 분의 성품과 그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늘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으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늘 아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여러 가지 종류의 행함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교통과 친구의 사랑의 관계에서 행하기를 원하신다. 노예적인 생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행하기를 아버지께서 기대하신다. 제가 특별히 한국 문화와 관련해서 예를 들어 보겠다. 제가 믿기로는 한국은 뛰어난 우월성에 대한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알고 있다. 그런 그 뛰어난 것에 대한 가치체계 때문에 아주 적은 나라이지만 세계 가운데서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기술적인 문명과 과학 등은 너무나 뛰어나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음악을 주시는 것은 기술적으로 우리가 완벽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악을 주신 것은 우리의 영이 자유로워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폭발적으로 표현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뛰어난 우수성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나오도록 하셨다. 그런데 압박을 주어 우리의 이름을 얘기해서 완벽한 음악가가 되도록 주시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산다는 것은 뛰어난 우월성을 무시하고 평범하게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그 영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아주 뛰어난 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 완전하신 그 분과 늘 교제하게 될 때에, 그런 관계 가운데서 우리가 뭔가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곧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그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완전함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그 춤추는 사람들은 춤추는 특별한 동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낸다. 압박이 그로 하여금 춤을 추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터치하는데서 우리의 기쁨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압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이다. 그래서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데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함이 있다. 아버지의 사랑의 자유함이 우리로 하여금 뛰어난 우수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것이다. 압박 가운데에서 우수하게 되고자 하는 몸부림은 우리로 하여금 떨어져 나가게 하고, 공허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할 때마다 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아버지께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그 깨어진 아버지의 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얻기 전에 어떻게 우리가 옛 아버지의 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마7장) 아주 흥미로운 단어를 사용하셨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한 잣대로 네가 동일하게 판단을 받을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여러 가지를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네 자녀들을 바라볼 때, 너희가 부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에 네가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제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면 그 판단에 얽매여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한 집안에 어린 아이로 자랐다. 그런데 제가 자랄 때마다 항상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랐다. 어떤 아이든지 이것은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존재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른 아버지가 어떻게 행하는 모든 활동을 내 아버지가 행하는 활동으로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내 영 가운데에 아버지는 이런 존재다라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될 때 우리는 그 판단에 메여서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너에게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있는데 내가 그에 대해서 무한한 형태에 아버지를 보여주겠다. 라고 말했다. 이해가 되는가? 우리가 그 하나님을 볼 때 내 육신의 아버지의 얼굴과 결부된 것으로 내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하는 그 정도는 내 마음 가운데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는 이런 존재라고 판단을 내린 그 판단에 메여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사랑이 무엇이고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알지만, 내 머리 가운데무슨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내 영으로 아버지가 어떻다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 머리 가운데 생각하는 것과 마음 가운데 경험하는 그 사이에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를 여러분은 다 아실 것이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매우 작은 자를 가지고 우리의 아버지를 재고 판단한다면, 그런 그 판단은 쉽게 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 더 큰 자를 가지고 그것을 잰다면 그것은 더 깨뜨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판단을 깨뜨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드리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있는 그대로 여러분이 바라보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는 다르다는 것을 제가 인정한다. 그런 나의 경험을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하겠습니다. 이렇게 행하는데 두 가지 열쇠가 있다. 첫 번째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다다르지 못한 우리 육신의 아버지의 부족함과 결점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를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중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결점과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를 하나님 자리로 올려놓는 일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에 관점에서부터 우리 육신의 아버지를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해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가 연습하기 시작할 때에, 층층이 겹쌓여 있는 아버지에 대한 아픔을 용서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하나 벗겨가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는 수많은 자료와 책들이 있다. 이제 첫 번째가 중요한 것만큼 두 번째 자유를 얻게 되는 열쇠가 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이 이 두 번째를 다 도달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박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그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 대해 계속 말해 왔던 것에 돌이켜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 대해 말하고 계신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뭐라고 나에 대해서 말한 정도에 따라서 육신에 아버지가 말한 그것을 판단한다. 만약에 육신의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정서적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을 나에게 나타냈다면, 그럴 때 우리가 결론 내리기는 아버지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아버지가 나를 폭행하고 학대했다면, 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임으로 그는 절대로 잘못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고 폭행을 받기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가진 방식대로 내가 나를 정의하기 시작하면, 내 삶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 대해 쥐어준 그 짐에 따라서 살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할찌라도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선언했던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에 계신 한 분만이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고 계신 분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만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나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만약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경건한 분이셨다면, 그 분은 틀림없이 하나님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사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그것을 나에게 말해 줬을 것이다. 내 집에 살고 있는 이 아이가 얼마나 놀라운 아이인가를 날마다 말했을 것이다. 그를 주님이 창조하고 만드셨을 때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으시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주시는 분이다. 그렇게 될 때에 내 안에 있는 그 영이 살아나서 깨어나게 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내가 내 영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 있는 아버지 음성으로 인하여 내 영이 깨어나게 될 때에, 비로소 아버지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어렸을 적에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그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자녀들에게 강압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자녀들에게 지위한다. 어떤 때는 아주 좋은 동기로 할 수도 있지만 어쩔 때는 아주 좋지 않은 동기로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육신의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결점이 있는 분들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할 아주 기쁜 소식을 제가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땅에 있는 그 아버지가 여러분의 진정한 아버지가 아니다. 여러분은 다른 가족에게로 초청을 받았다. 그 새로운 아버지가 여러분이 진정 어떤 분인가를 정의해 주는 것이다. 그 분의 마음 가운데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 주고 싶어서 기다리고, 사모하고 계신다. 여러분의 땅에 있는 부모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는가로 여러분의 지성이 채워질 것 같으면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자리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진 모든 인식들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데로 가져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가졌던 모든 관계를 모든 인생들이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삶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여러분들이 성경이 나를 정의하는 방식과 다르게 나의 생각에 든다면, 우리는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나라에 대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기도 하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가진 생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터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라를 위해 열망하고 계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놀라운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일로 우리가 초청을 받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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