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9일 (수) 오후1시 -기도자영성학교1- <첫 번째 강의>
-게리윈즈 목사(말씀)-
오후 시간에 첫 번째 부분은 급박하게 나가기보다는 질문하는 시간도 가져서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원한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겠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특별히 질문하고 싶은 것이나 평가하는 내용, 또는 확대하길 원하는 내용에 대해서 질문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어제 오후 뒷부분 시간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에 대해서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에 따라오는 영광과 존엄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는 방식은 이 땅에 있는 남,녀들이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르게 나타내신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세상에 있는 신으로 내가 만약에 역사한다면, 내 이름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정 그 반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식은 깨어지고 상처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셔서 그들을 높여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신명기에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들이 큰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기 너희들은 지극히 작은 민족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이 땅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이스라엘을 높임으로써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신약성경에서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가운데 높고나 부유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존귀함이나 지혜를 높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높이심으로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강함을 나타내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제가 이것에 관한 성경 여러 구절들을 말씀 드리겠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위로해 드리기를 원한다. 잠깐 주석을 해드리고 여러분들이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가서 여러분들 스스로 이 구절들을 연구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구약성경-
1. (시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제가 수년전에 피지섬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관광을 안내하는 분들이 저희를 안내해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로 데리고 갔다. 아주 독특한 산이었는데 그 산꼭대기에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산꼭대기 산성에다가 우물을 가지고 있음으로 누구도 뚫고 침입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샘물을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강한 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다. 이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당신은 나의 산성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바위십니다. 나의 도움은 그 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윗은 그 마음에 감동을 입어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켜서 당신은 나의 산성이시오 바위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나를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위해서 지극히 작은 우리들을 돌보고 계신 것이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말하길 나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적은 사람들과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위대한 표적이 될 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함의 증거는 그 힘을 통해서 지극히 연약하고 작은 자들을 이끌고 지도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분의 성품의 위대함 때문에 하나님은 기쁨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왔을 때 하나님께 깊은 인상을 드리기 위해서 크고 거창한 것을 가지고 나아올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말하길 “나의 선한 순종을 보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라고 한다. 우리가 성취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많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마음이 상하고 궁핍한 자를 돌아보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위대함 때문에 친절하심 가운데 지극히 연약하고 작은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이 그 분의 위대함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의 자리로 나왔을 때 여러분들은 아주 약하고 능력이 없는 자라고 느낄 수 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느낄 때 사실은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입구에 들어선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2. (시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이런 말씀들을 인하여 여러분의 말씀이 힘을 얻고 격려를 받고 일어서시기를 바란다. 하늘에 계신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뻐하신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자가 없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도와주소서.”라는 구절이 참 인상 깊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위대하고 큰일을 행하겠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오히려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 분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하고는 정반대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위대한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희생해 주기를 요구한다. “바로 그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를 섬기실 때에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당신의 이름은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아름답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깨어지고 상처난 마음들에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방식은 연약하고 작은 너희들을 도와줌으로 인해서 나타낸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깨어지고 상처받은 우리들을 높이셔서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들이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나님 앞에 깨어진 자로 그 앞에 나오게 될 때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높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우리들에 대해서 피곤해 하거나 지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3. (시109:21)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게 된다. 내가 최근에 하나님을 당혹스럽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 조금 당혹스럽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성품과 이름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분께 가까이 나아가는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특별히 어려움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건지기를 기뻐하신다. “너희들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나와서 나에게 부르짖으라. 나는 너희를 환란과 어려움에서 건지기를 기뻐하노라.“
제가 수년전에 목회를 할 때이다. 제가 그 당시 목회할 때 그렇게 좋은 목회를 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저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저 때문에 제가 목회했던 교회는 결국 좋지 않게 되었다. 그런 좋지 못한 시기에 당신은 당신의 성품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 당시 감독했던 지도자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교회에 저를 반대하는 한 사람이 저에게 화가 나서 그 회의 도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기 원한다.”라고 소리쳤다. 저에게 정죄를 붓기 위해서 소리친 것이다. 제가 그 때 아버지의 성품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저는 “나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심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나를 다뤄주세요.” 라고 속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자비 가운데 나를 다루시기를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 자리에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비로소 협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지금 여러분들이 아주 실패하고 어려움 가운데에서 계속 그렇게 나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와 같이 나에게 나아오면 나에게 자비를 호소하고 부르짖으면, 내가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너를 건져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자비를 베풀어서 너를 그렇게 들어올릴 것이고 내 아들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네게 능력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4. (시143: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영이 곤고함 가운데서 살려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영이 때때로 다시 소생하고 살아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주 심각한 영적 투쟁 가운데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써 살아가는데 당하는 압박과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에 사탄의 압박 가운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소생되고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다. 너희 영혼이 소생하기 위해서 나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의를 위하여 내 영을 환란 가운데서 건져내 주십시오.” 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생각 아이디어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는 하나님의 생각의 상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여러분의 존재가 충만케 되어질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우리가 완전히 충만함 가운데 이르게 될 때 그것이 곧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본받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의인 것이다.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지금 놓여있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과 닮아가기를 원하신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존재로 만드셨을까? 라고 생각할 때가 때로 있다. ‘왜 어떤 사람은 저런 자리에 있는데 왜 나는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우리가 어떤 특별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의 이름과 의를 위하여 나를 건져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소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시애틀에 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18살이 된 남자 아이를 가지고 있다. 그 엄마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뭔가 잘못된 일이 태아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게이브는 정말 아름다운 지성을 가지고 있고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젊은 청년이다. 그런데 그 몸은 아주 기형적이다. 팔도 없고, 어깨로부터 손이 바로 나와 있고, 아무 쓸 때가 없는 어깨를 가졌다. 상체가 아주 작고, 아무 쓸모없는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 그런 아이이다. 걷는 것도 힘든 그런 아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디 가고 싶을 때는 아버지나 형들이 그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렇지만 게이브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언젠가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게이브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했던 적이 있다. 그 게이브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때 그 능력으로 인해서 그의 몸이 아주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손이 한 시간 동안 내내 자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 때 그 부모들이 너무 기뻐했는데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만난 것이면 이제는 아들이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이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아주 평안해 했다. 이제 기도시간이 끝났을 때, 그가 깨어났지만 그의 몸은 치유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저희들이 실망했다. 그러나 게이브는 실망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예수님이 나에게 오셨어요. 예수님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고쳐줄꺼야라고 하셨어요. 아직 이 몸에 끝내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네가 이 몸으로부터 네가 충만한 영광을 받게 될 때에 고쳐주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그 게이브는 아주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이다. 게이브가 이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환란 가운데 있는 내 영혼을 건져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친절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환란 가운데 있는 그의 영혼이 살아나서 기쁨 가운데 이르게 된 것이다. 환란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를 기뻐하신다. 바로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
5.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다 없이해 주시고 당신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 용서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늘 하나님을 실망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못해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뒷부분에 보면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6. (사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네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내가 너를 인내하고 참는 것이 나의 성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특별히 인내가 필요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신다. 그것이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오래참고 인내하지 못한다. 신약성경에서 “인내”라는 것은 멀리 떨어진 분노라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너무 오래 참으신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연약한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신다는 것은 저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래 참으시는 것에 대해서 저는 너무나 기쁘다.
7. (겔20:9)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하여 행하였음이로라
하나님의 명성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이름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어떤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을 거기에서 건져 내겠다. 내가 너희를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해 주었다.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약속을 지키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들에 대해서 실망했다고 하신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웠던 것과 반대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놀이를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을 자극시켜서 모세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하신 것이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모세는 부르짖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신실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에 신실하신 것이다.
-신약성경-
1.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 분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천사가 태어날 예수님에 대해서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신다. 이 구주는 절대로 피곤해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주기를 기뻐하신다. 그의 성품이 그렇게 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함 가운데 그 분에게 나아와서 도움을 구할 때 그것이 그분에게 영광이 되고 그 분이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아주 요점적인 일이 있다. 우리가 죄와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와 같이 살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지금 바로 이 땅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오, 주님. 내가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그것에 비추면 아주 약하고 깨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어떤 단계에 이뤘냐는 것과 상관없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 주님, 도와주십시오. 다시 저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옵소서. 당신의 임재로 내 마음을 채워주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더 닮도록 나를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가 매일 같이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을 때 주님은 기쁨으로 우리 마음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실 줄 믿는다.
-질의응답 시간-
1. 예수님이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었던 내용은 인내하심과 조금 멀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1500년 전에 주어진 예언의 응답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지도자들은 예언의 말씀에 대해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성전 안에 있었던 모든 지도자들과 율법 선생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거역하는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심으로 계속적으로 예언의 말씀들(선지자)을 보내신 것이다. 아버지의 조상들의 죄가 그 때 살던 자손들에게 계속 찾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고치기를 원하는 말씀들을 주셨다. 그런 말씀을 들은 자들의 후손들이 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고도 또 거부한다. 그다음 세대도,, 그 다음 세대도....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그런 패턴들이 쌓이고, 쌓이고, 계속 되는 것이다. 그들의 죄 뿐만 아니라 아버지들이 뿌려놓은 죄악의 열매들을 그 세대가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 죄악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그들의 눈이 눈 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있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보내진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치 암탉이 그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나의 날개 아래 너희들을 품으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느냐? 그러나 너희들이 거절하였도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사실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들이 무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전 세대에 걸친 하나님을 거역한 모습들이 총 그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의 종교 체계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들을 만족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그 아들에 대해서 NO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내하고 계신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때가 되면 그들이 휘장을 걷어내실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제목(에스더,IHOP,JHOP 등)을 통하여 이 나라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쩌면 마지막 때의 환란과 같은 현상과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기가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도피성과 같은 안전한 피난처의 도시를 세우기를 기뻐하신다.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것대로 애굽에 재앙이 임했을 때 특정 지역은 주께서 친히 보호하시는 것을 본다. 이 땅에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어떤 특별한 곳에 두어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를 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예루살렘을 그의 보좌로 삼으신다. 그래서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 재림 전까지 부분적으로 응답되거나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지라도 사실은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향력과 능력이 충만하기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예루살렘에 실제적은 정부를 세우실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실 것이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 의해서 의로운 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다스리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년 왕국을 세우실 때 한국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 때도 여전히 도로가 있을 것이고, 시설, 빌딩, 정부, 학교들이 나라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의에 의해서 한국도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어떤 형태의 악의 영향도 없을 것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는 제가 믿기로는 곧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데,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집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여전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재난이 오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나라고 올 때에 이루어질 나라의 원리와 가치에 의해서 사는 그런 특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도피 도시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재난과 어려움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긍휼을 나타내는 지역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오기 전까지 마치 하나님의 나라의 식민지와 같은 나라와 도시들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신다.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기도를 통해서 이 땅에 여전히 하나님의 의가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3.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설 때가 마지막임을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는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이 본다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완전히 나타날 때이다. 그 적그리스도는 영도 아니고 실제적인 인물이며,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자이다. 그는 이제 이 땅 지구상에서 아주 정치적인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 부상할 것이다. 그는 아주 놀라운 지혜와 권위를 가진 자이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이 지구상에서 그와 같은 자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할 것이다. 그는 귀신의 힘을 빌려서 아주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이 땅 가운데 행할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기적을 행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음번에 이 사람이 사실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평화조약을 세우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그가 자기가 세운 성전 안에 들어가서 자기를 신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섬기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이다. 이제 그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이제 우리가 알게 될 것은,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3년 반의 기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역사상 가운데 있었던 가증한 지도자들은 이제 앞으로 일어날 자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아직 실제 적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제가 믿기로는 그가 이 지구상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이제 실제적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면 몇 가지 일들이 또 일어나야 할 것이다. 왜 이런 24시간 기도의 집이 필요한가? 그와 같은 인물이 등장할 때에 그를 분별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는 기도의 집이 필요한 것이다.
4. 저는 통성으로 방언도 하고, 제가 하나님 앞에 한국어로 기도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많은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계속적으로 그런 시간을 더 늘려야 하는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는가?
많은 분들이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 기도하는 것과 많이 모여서 단체적으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 혼동하고 계신 것 같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고요한 경건의 시간을 가져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또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같이 기도회로 모여서 함께 기도할 때에 어떤 특별한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청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집이 세워질 때에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깊이 만나는 기도 시간도 필요하고, 또 공동체로 모여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로 모여서 기도할 때 개인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조금 어렵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다른 시간에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반드시 마련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 기도할 때라도 함께 모여서 관상 기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